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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징스타 이재명, 국가재정 논쟁에 불을 지피다

[요즘 경제] 미국 중앙은행장과 이재명의 싱크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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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크빅!” 크게 생각하라는 뜻의 이 말은 미국의 중앙은행장이 코로나 사태에서 미국 하원의장한테 건넨 유명한 한마디이다. 중앙은행은 모든 실탄(머니)이 다 준비돼 있으니 의회가 돈을 쏟아붓는 데 주저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보통 의회가 재정을 적극적으로 늘리고자 한다면, 중앙은행은 반대로 보수적인 통화정책을 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는 이런 관례들이 여지없이 깨졌다. 오히려 중앙은행이 써포트 해 줄 테니 의회가 서로 투덕거리지 말고 재정을 원하는 대로 늘리라고 주문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과 재정지출의 시급성을 고려하면, 국가재정이 악화하는 건 별 논의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강산이 몇 번 바뀌어도 오지 않을 거 같은 날들이 도래한 듯하다. 진정 뉴노멀 시대가 불러온 놀라운 모습이다.

이런 글로벌 코로나 시대에 진정 앞서 나가는 자를 한 명 꼽으라면 이재명도 그 대열에 끼일 만하다. 요즘 그를 둘러싼 핫한 이슈들은 매우 묵직하면서도 논쟁적이다. 보수언론에선 포퓰리스트니, 뭐니 하지만, 이미 대중들은 재난지원금을 경험하면서 지금 이 국면에서 국가가 어떻게 재정을 써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써야 할 땐 아낌없이 써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본다면 국가재정에 관해 이재명과 미국 중앙은행장의 싱크로율은 99%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뉴노멀 시대의 전 국민 기본대출권 논쟁

뉴노멀 시대가 불러들인 중요한 특징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초저금리 시대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까지 등장하고, 양적완화를 통해 자금이 무제한 공급되고 있다. 이를 완화적 통화정책이라 불렀는데, 그 수혜를 누가 가장 크게 입었는가 따져보면 국가다. 한때 뉴스에 독일의 국채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마이너스란 얘기는 국채발행하면 되레 돈을 벌어들인다는 뜻이다. 이러다 보니 50년 넘는 초장기국채까지 등장했다. 50년 동안 국가가 돈을 금리 0%에 빌린다고 생각해보자. 반백 년 동안 그 세대는 이자 부담 없이 국가재정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얼마 전 일본계 대부업체 산와머니의 시장 철수설이 흘러나왔는데, 뉴노멀의 시대적 흐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이재명이 던진 ‘기본대출권’ 논쟁은 뜨거울 수밖에 없다. 1∼2% 금리로 1000만 원씩 마이너스통장을 뚫어주자고 하는데, 중앙은행들이 기업들에 제로금리로 무제한 자금을 공급해주는 대출프로그램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대상이 개인이냐 기업이냐라는 차이가 있을 뿐. 심지어 일본이나 유럽에선 기업들의 주식도 사주는 마당에 제로금리 대출이 뭐가 대수롭겠냐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한국은행도 대략 30조 원 규모로 중소기업들에 0.5%대로 대출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2%대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마이너스 실질금리이다. 명목은 경제부흥을 위한 강소기업 지원인데, 이제 여기에 코로나 사태로 인한 중소기업의 자금 사정 해소가 추가됐다. 코로나로 힘겨운 개인을 위한 삶의 터전 지키기 대출 프로그램으로 이름을 바꾼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국가재정이든 중앙은행 대출이든 매한가지이다. 재정조달을 위한 국채를 중앙은행이 매입해 주면 그게 그 돈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금의 뉴노멀 시대에서 양적완화가 국가재정의 도구로 작동하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됐다.

한편에선 이를 두고 금융시장의 혼란과 도덕성 해이를 말하는데 다 부질없는 지적이다. 시대의 흐름을 못 읽은 비판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코로나 국면 속에서 벌어지는 기본대출권 논쟁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경제학 교과서에도 없고 경제규율과 동떨어져 보이는 이 황당한 주장이 왜 지금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다. 그냥 그가 대중 인기에 영합하려 드는 포퓰리스트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전 세계 금융수장들과 정부 지도자들은 이미 이재명의 100배쯤 되는 포퓰리스트들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장인 파월 연준의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하트 브레이킹(가슴이 미어집니다)”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코로나 사태로 실직한 저소득층 유색인종들의 곤란한 삶을 보면 마음이 아프단 이야기이다. 그래서 돈을 쏟아붓겠다고 한다. 무제한으로! ‘흑인’ 실업률이 떨어질 때까지. 심지어 이 시대엔 실업과 경기침체에 맞서 싸우는 게 중앙은행의 중요한 책무가 됐으니, 인플레이션쯤이야 좀 올라도 괜찮다고 선언했다. 올드 노멀의 인플레 파이터로서의 중앙은행은 어느덧 유물이 됐고, 이젠 디플레 파이터가 뉴노멀 시대의 중앙은행 상징이 됐다. 그러므로 올드 노멀의 시대 인식에 머문 비판으로는 이재명의 기본대출권 논쟁을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없다.

국가재정 논쟁 “뭣이 중헌디?”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결국 국가재정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기본소득, 기본대출, 재난지원금 등 모두 국가재정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지라는 질문으로 모인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재정수지에 나타나는 숫자 싸움으로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국가권력에 대한 논쟁이다. 국가권력의 창출과 관리가 국가재정으로 발현된다. 그래서 이것은 개인의 재무관리와 전혀 다른 성질이다. 개인 부채와 국가의 부채는 같은 성질의 부채가 아니다. 국가가 얼마나 부채를 창출할 수 있는가는 국가 권력의 크기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유로존은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에 대해 전격적인 재정지원을 결의했다. 재정통합 논의를 둘러싼 10년간의 길고 긴 내홍에 종지부를 찍고 재정통합을 위한 초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럽중앙은행이 자금 조달의 커다란 돈줄 역할을 했다. 이는 10년 전과 비교하면, 아니 유럽 전후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충격적인 사건이다. 누구는 이를 이렇게 평가했다. “미국이 국가연합이라는 합중국을 만들었을 때와 같은 상황이다. 이제 유럽합중국이라 불러야 할 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에게 낯선 미연방 초대 재무장관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국가가 부채를 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국가부채는 국가신용의 거울이다.” 당시 초대 미국은 독립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연방정부의 힘은 매우 미약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주정부의 부채를 연방정부가 새로운 채권을 발행해 모두 떠안고 연방정부가 발행하는 화폐를 통용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스페인 통화가 가장 많이 유통될 정도로 나라다운 모습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랬던 미국이 19세기를 지나면서 강력한 산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연방정부가 구심력을 갖추고 국가재정을 조달했기 때문이다. 국가부채는 숫자로만 보면 갚아야 할 빚이지만 국가부채로 일으킨 국가재정은 사람을 모으고 물건을 만드는 권력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보면 아직 우리는 이재명이 쏘아 올린 국가재정 논쟁의 본질에 전혀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본질은 재정 조달의 액수가 얼마인가가 문제가 아니다.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있다. 사실 현재 GDP 대비 40% 대의 국가부채 비율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매우 양호한 수준이다. 4000억 달러가 넘는 세계 9위의 외환보유고 역시 재정위기를 논할 게재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97년 외환위기를 겪었던 우리에겐 국가의 곳간이 빈다는 말만 들어도 트라우마가 작동한다. 그래서 이재명식의 주장에 대해 97년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비판이 쉽게 작동한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한 세대에겐 그런 비판의 자극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97년뿐만 아니라, 10년 전 그리스 재정위기 사태나,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는 국가적 혼란함 등은 현재 우리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음에도 대중적 불안감을 자극하는 선전도구로 종종 활용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가 어떻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대중들은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재난지원금으로 누가 손해를 봤는가, 일부에선 재정이 악화하면 미래세대가 이를 짊어져야 한다고 하는데, 가정에 가정을 더한 비판일 뿐이다. 국가재정은 양호하지만, 피폐화된 국민경제를 미래세대에 남겨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재명의 비판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이제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가 변하고 있다. 뉴노멀 시대의 라이징스타 중 한 명인 이재명이 불러들인 국가재정 논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안타까운 건, 이런 논쟁에 적극적이어야 할 정치세력들이 손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의제를 만들어나갈 힘을 상실하면서 자기 영역 지키는 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다. 심지어 신자유주의의 재정규율에 공명하면서 나라 경제를 걱정한다고 설쳐댄다. 풍전등화에 처한 국가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으니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한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대선주자 선호도 1위로 급부상한 이재명에게 대중적 의제를 뺏긴 채 무슨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것인가? 이재명이 불러들인 국가재정 논쟁은 성큼성큼 앞서가고 있다. 기본소득이 옳으니 그르니, 보편 지급이니 차등 지급이니 하는 논쟁은 이젠 부차적이다. 국가권력의 출발점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살펴보고, 국가권력을 실질적으로 민주화시키기 위한 논쟁으로 확대해야 한다. 국가재정과 국가부채는 이 장기적 과제를 위한 논쟁의 첫 출발점이다. 언젠가 이재명의 분신들과 싸워야 할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뉴노멀의 라이징스타 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