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국제노동기구(ILO)가 국제가사노동자의 날을 선포하면서 노동으로 인정한 가사노동은 한국에서 여전히 노동권이 주어지지 않은 그림자 노동으로 남아 있다. 코로나19 국면에서 많은 가사노동자가 직업을 잃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잃었지만, 가사노동자들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다. 노동쟁의를 하거나,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동조건을 변화시킬 투쟁을 할 조건이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코로나19 국면에서 가사노동자들의 노동량은 배가 됐다. 직업을 잃은 쪽은 ‘가사도우미’나 ‘파출부’로 불리는 가사노동자들이고, 노동량이 늘어나 힘들어진 쪽은 ‘(전업)주부’들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사노동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가사도우미노동자’들이고 여기에 ‘전업주부’ 혹은 ‘주부’는 포함되지 않는다.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집단으로 주장할 수도 없고, 노동시간에 대한 임금지불이나 화폐화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부 혹은 전업주부를 가사노동자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1970년대 서구에서 여성해방을 외친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에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가사노동을 둘러싼 논의는 여성해방운동이 진행되면서 제일 먼저 부각됐다. 그러나 2020년 현재, 가사가 노동이라는 말은 현실에서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가사가 노동이란 말은 여성해방론자들에게는 중요한 말이었지만, 사회는 여전히 이 ‘노동’이 기존 ‘노동’의 대열에 들어갈 수 없는 ‘집안의’ ‘일’이라 여긴다. 현재도 ‘가사도우미노동자’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최소한의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전업)주부는 노동운동의 ‘동지’들이 되지 못한다. 전업주부를 자신의 노동운동의 ‘동지’로 생각할 수 있어야 가사노동자 운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것이다.
![]() |
필자는 현재 가사도우미와 주부의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되는 인식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노동과 일상의 구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생산과 재생산의 구분이다. 먼저 노동과 일상을 구분하는 입장에서 보면 일상의 영역은 노동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이 일상의 영역이라 간주된 곳에는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일상과 노동의 구분은 생활 세계와 생산 세계를 나누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생활양식과 생산양식의 구분은 가정과 공장을 나누고, 가정은 생활 세계를, 공장은 생산 세계를 대표한다. (물론 현재 이 공장은 다양한 산업의 장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 구분은 철저하게 가부장적이다. 생활 세계가 노동과 관련 없는 것이 아님에도 생산과 생활을 나누게 됨으로써, 여성들이 하는 집안일은 노동이 아니고 생산이 아니게 된다. 필자는 가사노동자도 생산자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가사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생산과 무관하다는 생각, 그리고 노동과 무관하다는 생각이 현재 가사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는 사회가 가사를 비노동, 비생산, 비가치의 영역이라 여기도록 해 생산-노동-임금-화폐-가치의 영역과 무관한 영역이라 생각하게 했다.
가사는 생산의 영역이다. 집안일은 다양한 측면에서 생산한다. 가사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생산적 노동이다. 음식을 생산하고, 즐거움-쾌락-안락함을 생산하고, 관계를 생산한다. 그런데 이 생산을 페미니스트들까지도 ‘재생산’ 노동이라 부른다. 공장도 물건을 생산하고 그 생산한 물건과 같은 것들을 재생산한다. 가정에서도 음식을 생산하고, 아이를 생산하고 양육한다. 가사는 생산양식이다. 가사는 생산적 노동을 통해 다양한 가치를 생산한다. 가정과 사회, 가정과 공장을 나눈 서구 근대산업사회의 이분법은 철저하게 가부장적이었다. 이 이분법은 가부장체제를 형성해 왔다.
생산과 재생산으로 나누는 이 구분이 우리의 상품생산 중심성, 상품생산노동 중심성, 자본 중심성을 만들어 왔다. 상품생산노동이라 불러야 할 것을 그냥 노동이라 하고, 상품생산을 생산이라 해 왔다. 그래서 상품생산노동을 임금노동이라 부르고, 노동운동의 중심을 여기에 두고 있다. 상품생산과 가사생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재생산 노동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 이 이데올로기가 사회 구성원들을 근대체계, 자본주의체계, 가부장체제에 묶어두고 있다. 집안일, 가사는 사랑이데올로기, 가족이데올로기에 묶여, 화폐로 가치화되지 않아야 한다고 믿게 했다. 하지만 이미 가사노동은 화폐와 상품의 영역으로 훌쩍 들어갔다. 그런데도 ‘가사도우미노동자’들의 노동권은 챙겨지지 않고 있다. 노동권이 챙겨지지 않는 이유는 앞에 말한 이데올로기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업주부의 집안일이 가사노동이라 불리더라도 화폐화-임금화-가치화되는 길은 멀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임금화 혹은 가치화하려는 시도에는 집이라는 공간, 가정이라는 공간, 사적 공간마저도 자본주의화 혹은 상품화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가사노동과 가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자본’의 영역이 아니다. 자본 외부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자본은 비가치와 가치의 경계를 지으면서 자신을 유지·재생산해 왔다. 가사노동이 비가치의 영역에 남아 있어야 자본은 축적이 가능하다. 물론 필요하다면 자본은 이 영역을 직접적 화폐 가치의 영역으로 만들어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한다. 집안일이라 한 내용은 상품의 영역으로 계속 전환하고 있다. 그리고 소규모 소개소 중심의 가사도우미노동이 이제 앱을 사용하고 고용하는 플랫폼 자본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에도 전업주부, 주부의 일은 비가치, 비노동, 비생산의 영역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다.
실비아 페데리치 같은 페미니스트는 성혁명의 ‘영점’(핵폭발의 중심점)으로 가사노동의 임금화 투쟁을 제안한다. 그리고 ‘뉴딜이 기획한 가족과 여성’에 대한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의 논의를 따라가 보면 결국 가족과 여성을 자본주의적 국가가 기획했다는 말이 된다. 이 기획을 뒤집으면서 ‘화폐화되지 않은 (전업)주부의 생산노동’과 ‘화폐화되고 있지만, 노동권이 부여되지 않은 가사도우미노동자의 생산 노동’을 가치화- 노동화 하는 일이 진행돼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을 경유하면서 자본주의의 상품생산 중심과 화폐화를 넘어서는 가치화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향은 인간이 지닌 다양한 생산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삶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