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음란물공유방’, ‘고담방’, ‘n번방’, ‘박사방’으로 이어지는 방들의 행렬과 가담자들. 지금 한국사회를 흔드는 ‘박사’와 ‘박사방’과 연관된 방들이다. 최근 몇 년간 ‘디지털 성폭력’은 끊임없이 드러나고 지워지는 것을 거듭 반복했다. 필자는 혐오의 정치경제적 구조를 혐오-차별-배제-폭력-착취-살해로 말한 적이 있다. 지금 한국사회를 흔드는 ‘박사’와 ‘박사방’은 여성혐오의 정치경제적 구조 속에서 특별히 ‘폭력-착취’의 형태로 전면화 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분노 또한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미투’가 드러냈던 성폭력과는 질적, 양적으로 다른 성폭력이 디지털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수없는 n번방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디지털성폭력에 대한 법을 만들자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텔레그램n번방 방지 및 처벌법’ 제정과 n번방 가해자들에 대한 ‘무관용 처벌’을 촉구하고, “검경은 n번방 사건 철저히 조사하고 사법부는 엄벌하라”고 요구한다. ‘법치국가’에서 법제정은 중요한 정치적 움직임이다. 처벌 또한 필요하다.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분노의 정치와 제도화는 중요하다. 이 정치적 움직임들이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필자는 이 글에서 ‘n번방’들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와 경제학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우리는 성폭력의 경제적 측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경제와 경제학에 대한 성찰은 정치적 대응만큼이나 중요하다. 성폭력의 경제 혹은 정치경제 구조는 폭력의 뿌리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 페미니스트들은 ‘성착취’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박사방’ 사건을 계기로 언론도 확실하게 ‘성착취’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성착취’ 개념은 ‘성폭력’의 경제 혹은 경제구조로 이어지는 고리가 된다. 폭력과 착취의 연결선 그 경계에서 한쪽은 범죄고 한쪽은 합법이 된다. ‘박사방’은 디지털시대의 성폭력-성착취의 연결고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작-생산-소비-유통이 인터넷기술과 SNS를 통해 ‘손쉽게’ 이루어진다. 인터넷과 SNS라는 플랫폼은 유저들의 생각에 따라 사용가능한 상태가 됐다. 가부장체제를 타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플랫폼들은 폭력-착취의 칼날을 휘두르는 유저들에게 맡겨지기도 한다.
페미니즘경제학은 기존 경제학이 다루지 못한 성인지적 관점을 경제학으로 끌어들이는 중이다. 일차적으로 개별경제주체의 경제행위를 연구하는 ‘미시경제학’과 한 국가의 경제를 논하는 ‘거시경제학’에서 제외된 여성들의 부불노동과 재생산영역에 대한 논의들이 시작됐지만 아직 미미하다. 여성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2014년 기준 360조 원을 넘는 상황이지만 여성의 노동은 여전히 상당부분 부불노동이다. GDP계산에서 조차 빠진다. 여성의 일이 ‘비노동’, ‘비가치’, ‘비생산’이 되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기존 경제와 경제학은 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하는 일이 ‘재생산’이 되는 것도 여성을 ‘피해자’로 놓는 일에 일조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생산’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필자가 ‘상품생산’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생산’은 화폐가치의 영역이자, 노동의 영역이고, 합법의 영역이다.
경제학에서 섹스와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빠진 것은 이들이 화폐-가치의 영역에서도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관점으로 보면 상품경제, 시장경제, 화폐경제는 여전히 남성-이성애 중심적이다. 경제학 또한 남성-이성애 중심적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경제로부터 제외되고 배제된 성(섹스-젠더-섹슈얼리티)은 왜곡과 굴절과 은폐의 영역이 돼버린다. 결국 ‘박사방’이 끊임없이 n번방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회가 섹스와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음성적으로 놓기 때문이다. 양지화를 한다고 폭력과 착취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음성적으로 놓기 때문에 그곳이 특화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어느 곳을 특화해버리면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합법적이 된다. ‘박사방’은 이 특화와 음성화의 결과다.
남편과 아내 사이 혹은 아버지와 딸 사이의 ‘가정폭력’을 ‘성폭력’과 ‘성착취’라 하지 않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가정이라는 양성적인 공간과 ‘n번방’이라는 음성적인 공간의 경계, 지하시장과 지하경제를 양성화하지 않고 법으로 다스리려는 법치국가의 도덕과 윤리가 우리 모두를 지배한다. 양성화와 양지화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논의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그럴 수가”와 “인간이 어떻게”라는 말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들을 마치 인간의 행위가 아닌 것처럼 감추려고 한 우리의 음지다. 이제부터 경제학은 섹스의 경제, 젠더의 경제, 섹슈얼리티의 경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가사노동을 위시해 여성의 생산-노동의 가치화도 전면화 돼야 한다.
섹스가 경제가 되는 순간, 혹은 성이 경제와 만나는 순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 성은 사회의 몸통이다. 인간사회의 민낯으로 여겨지는 섹스는 가부장체제 하에서 인간사회를 구조화하는 원리로 작동한다. 민낯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구조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성-이성애적 가부장적 경제학은 섹스와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논의의 장에서 밀어냈다. 왜 ‘박사방’의 ‘피해자’들은 그 방에 들어가서 자신의 몸에 ‘노예’와 ‘박사’를 새기는 지경까지 갔을까. 그리고 그 영상을 자신의 손으로 보내는 지경까지 가게 됐을까. 극단의 형태까지 가는 이 관계와 행위는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합리적으로’, ‘합법적으로’ 진행돼 온 배제의 결과다.
‘박사방’을 운영하고 가담한 26만 명의 남성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말이 아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원인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상품생산, 상품경제, 화폐경제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다시 말해 여성의 일을 생산-노동-경제에서 여전히 밀어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그 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조건만남’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조건이다. 끝없는 ‘n’방들의 존재가 양지화되고 폭력-착취의 고리가 계속 양지화 되기를 바란다. ‘박사방’에 대한 분노를 지금의 경제체제에까지 밀어붙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