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기술(만능)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주기적으로 대중 열광에 힘입어 새로운 옷을 입고 줄곧 반복되는 경향을 띤다. 1980년대 반도체 등 극소 전자혁명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90년대 중·후반 이래 인터넷 기술의 대중적 확장 국면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술주의의 변종들을 줄곧 목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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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혁명과 퇴행의 반복적 시간여행
자, 먼저 1990년대 말로 되돌아 가보자. 이 때 우리는 초고속 인터넷 1천만 가입자 시대를 바라보던 그야말로 ‘브로드밴드 천국’이었다. 냅스터와 소리바다 등 익명의 파일교환 프로그램을 매개로 또래간(P2P)에 파일 교환과 공유 방식의 새로운 사회적 지식 유통의 자유문화가 등장했던 때다. 자신의 지식 콘텐츠 저장고의 내용을 평등한 방식으로 전 지구적 익명의 타인과 교환하고 나눌 수 있는 현실이 되면서, 이를 두고 언론은 ‘닷코뮌’ 혹은 ‘사이버코뮌’으로 상찬했다. 실제로도 또래 간 파일교환 기술은 전 세계 모든 이용자의 파일 목록이 상호 검색, 연동되고 막힘없이 공유되고 거래되는 극적 상황을 만들어냈다. 인류의 지식 유통을 이처럼 전 지구적인 파일 교환과 공유로 이끄는 장밋빛 미래는, 마르크스가 내다 봤던 ‘집합지성’이 기술력으로 현실에서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하지만, 또래 간 공유되는 지식의 내용 대부분이 이미 시장과 저작권 질서에 들어간 지식과 소프트웨어 ‘상품’ 목록이 되면서, 글로벌 파일 교환의 진보적 계기는 점차 수그러들었다. 물론 또래 간 파일교환의 영향력은 지금까지 건재하고 컸다. 예컨대, 이는 레이블 음반 제작과 유통 방식은 물론이고 글로벌 문화산업 유통 체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주요 동인이 됐다.
2000년대 말 또 한 번, 기술 혁신의 열광은 ‘소셜미디어’ 혹은 ’소셜웹’이라 불리는 새로운 기술 혁신으로 과대 포장됐다. 디지털문화의 전도사, 케빈 캘리(Kevin Kelly) 같은 이는 올드한 사회주의와 전혀 다른 새로운 집합지성의 기술문화에 감격해 ‘디지털 사회주의(digital socialism)’란 신체제의 도래를 예측하기도 했다. 국내에선 소셜웹의 등장으로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이란 말이 90년대 중반 ‘사이버’란 말만큼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구린 ‘죽은 용어’가 될 정도였다. 물론 소셜웹은 정서와 말의 공유와 글타래의 힘을 보여줬다. 위키피디아는 인간의 백과전서적 기록의 방식을 협업과 공동의 지식 생산과 수정 작업으로 바꿔 놨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좋아요와 리트윗, 멘션의 힘은 우리에게 크나큰 정치 과잉과 디지털 매개형 사회 변화의 믿음을 선사했다. 사사로운 이야기와 힘없는 이들의 정서를 대중의 지배적 역동으로 뒤바꾸는 디지털 정치력을 일부 보여줬다. 즉 특정의 사회사적이고 정치사적 사건에 매달린 거대한 감정의 증폭과 흐름이 어떻게 요동치고 여론으로 생성되는지를 소셜웹이 무엇보다 잘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셜웹은 이렇듯 사회적 의제를 형성하는 정치적 플랫폼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럼에도 점차 소셜웹의 감정 타래는 타자와의 사회적 결속 보다는 취향이 같은 집단들만 끼리끼리 빠져 드는 외려 ‘단속’(斷續)의 현실을 부추기고 있다. 게다가, 이제 누리꾼의 감정 덩어리조차 새로운 자본주의 이윤 체제를 위해 사적 데이터 수집의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데이터 집적지로 매순간 흘려보낸 지 오래다. 대중이 매일매일 남기는 수많은 감정과 정서의 데이터 부스러기로 후기자본주의는 연명하고, 오늘날 자본의 능력을 배가하는 데 소셜웹이 일종의 누리꾼들 뇌 정보 수집기계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대 기술주의 반복과 최면 효과
2010년대 말부터는, 많은 이들이 또 다시 공유 플랫폼 기술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플랫폼 기술은 직접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구조적 체질 변화와 연결돼 있다. 이제 또 다시 자본주의는 플랫폼을 매개해 데이터, 노동, 집, 차, 서비스, 문화 등 현실에서 남아도는 모든 것을 시장 거래 대상으로 놓고 이를 매개해 수익을 올리고 효율을 증대하겠다는 발상이 덕목이 됐다. 일명 ‘공유(共有)경제’가 그것이다. 때로 이는 ‘플랫폼경제’로 불리기도 한다. 정거장과 같은 플랫폼에서 유무형의 자산과 물건의 공유 행위가 이뤄지고 성사되기 때문이다. 공유경제 아래 플랫폼을 운영하고 임대하는 브로커들은 사람, 자원, 노동 등을 적재적소에 짝을 찾아 배치하고 맺어주면서, 신종 지대 이윤을 발생시킨다. 우버(차)나 에어비앤비(숙박) 등 공유경제의 성공 실험을 지켜보면서, 제레미 리프킨 등 사회학자나 국내외 도시 혁신가들은 섣부르게 ‘반(反)자본주의’의 도래를 외쳤다. 이들이 열광하는 근거는 공유 행위를 통해 시민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사회 혁신을 이루고 사회 민주주의까지 획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무늬만 혁신의 생태계가 지배적 시장자본의 논리로 포획되고 지대 이윤이 브로커에 독점되고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줄곧 무시하고 있다.
최근 수십 년 간 새로운 디지털 기술은 이렇듯 인류에게 미래 긍정의 비전을 선사했다. 앞서 본 것처럼, 또래 간 파일교환 시스템은 사회혁명을, 소셜웹은 온라인 매개형 정치혁명을, 그리고 공유경제와 플랫폼 경제는 시장혁명의 비전을 우리에게 약속했다. 기술주의의 역사적 면역 효과는 지겨울 정도로 계속 반복됐다. 당장 오늘을 보자. 어디를 가도 제4차 산업혁명의 광풍에 휩쓸려 대중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휘청거린다. 이제 퇴물이 된 ‘창조경제’와 디지털 기술들의 대체물로 또 다른 신조어와 기술적 경향이 대세가 됐다. 전 세계에서 우리만큼 4차 산업혁명의 기술 신드롬에 갇혀 있는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장차 끝 모를 경제 침체의 공포를 벗어나는 데 이 신기술은 국가의 숙원 사업이 되고 노아의 방주에 오르는 일과 같이 필사적이 된다. 하지만, 기술 혁명의 그 지겨운 프로파간다에 대한 대중적 최면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대부분의 기술들이 처음에는 개방의 사회 코드로 다가왔음에도 끊임없이 정치경제학적으로 규정되는 ‘불순한’(impure) 속성을 지녀왔음을 기억하라고 일러준다. 기술주의의 장밋빛 사회 구제론은 기술의 권력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순진함의 극치다. 국내의 시민사회조차 기술을 매개한 혁신을 상찬하고 기술이 마치 시장의 민주화를 가져올 것처럼 열광하는 경향도 종종 관찰된다. 이는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을 등치하려는 기술주의적 조급증에 다름 아니다. 기술이 지닌 사회적 힘에 과도하게 기대치를 많이 거는 순간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딘 줄 분간하는 능력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젠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 기술의 최면으로부터 깰 때다.[워커스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