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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사내유보금 환수는 생산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시작

[연속기고](5) 사내유보금환수운동의 과제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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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순서>
(1) 사내유보금 곳간을 열어라
(2) 전경련 보고서 - 동아일보 보도 반박
(3) 삼성-현대차그룹 이윤축적과 노동착취
(4) 구조조정과 사내유보금
(5) 환수운동의 전망


어차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IMF 구제금융 시기의 구조조정은 노동의 희생으로 자본축적 메커니즘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정리해고제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명목으로 무수한 대중을 거리로 몰았고, 파견근로제는 그렇게 퇴출당한 정규직 노동자의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했다. ‘고통분담’ 이데올로기는 ‘지금 누군가를 해고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였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단 이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모두가 망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 - 그때건 지금이건, 노동이 희생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단지 정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어차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체제의 주인인 자본이 희생할 수는 없다는 이념은 대중 스스로에게서 발원한다. 더군다나 단 한 번도 왕의 목을 쳐본 적이 없는 나라가 아닌가. 이에 더해, 살아남기 위해 뚫고 들어가야 하는 문은 좁아 보였지만 아직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다. 당시는 ‘386’이라는 말이 유행할 즈음이었고, 아직 고도성장의 기억은 잔존했다.

이른바 ‘대중 자본주의’의 형성과정, 곧 마가렛 대처가 조직 노동자의 저항을 가혹하게 궤멸시키는 한편 금융시장을 민간에 개방하여 대중의 계급의식 그 자체를 해체했던 과정은 모든 신자유주의자에게 모범이다. 대처는 그렇게 영국 인민을 ‘자본주의자’로 만들었다. 김대중 정부 역시 노동자의 저항을 가차 없이 진압하는 한편 금융시장을 키웠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공공자산 매각과 주식시장 팽창으로 모든 인민을 자본시장의 이해관계자로 재편해내고, 그를 통해 인민의 심성 자체를 재편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정권은 공황으로 폐허가 된 사회의 한편에 벼락부자의 꿈을 불어넣었다. 저축 이외의 금융상품에 익숙하지 않던 대중이 한 집 걸러 한 집이 펀드에 가입하는 과정은, 노동력 시장에서의 경쟁이 한층 더 격화되는 흐름과 일치했다. ‘바이코리아 펀드’는 지금도 금융업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미국발 신경제가 ‘벤처 열풍’이라는 마이너 판본으로 이 땅에서 재현되기도 했다. 대중은 그렇게 금융시장의 적극적 주체가 되었다.

노동운동에는 가장 가혹한 시기였다. 그야말로 개별적 투쟁을 묶어낼 정치와 이념이 필요한 시기였지만 운동세력은 이렇다 할 대항이념도 없이 구조조정 전선에서 하나하나 격파 당했다. 물론, 대항이념이 선재해야 투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임단협 투쟁이 총체적 이념 없이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거대한 사회재편의 과정에 대항이념 없이 뛰어들어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를 실은 기사에는 무더기로 ‘악플’이 달렸다. 정권은 자유주의자들을 흡수했고, 집권세력과 이념은 물론 인적 계보까지 공유했던 자유주의자들은 정권의 편에서 노동의 희생을 요구했다. 이회창이었다면 훨씬 어려웠을 일이다.

2008년 이후의 위기가 낳은 것

[출처: 재벌사내유보금환수공동행동]
공적자금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투입된 공적자금은 모두 158조 원이다. 재벌은 노동의 희생과 공적자금 투입으로 회생했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무소불위 권력이 되었다. 그렇게 재벌이 부를 쌓는 과정은 곧 대중이 빈곤을 쌓는 과정이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그 자체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열어 두었던 계급이동의 좁은 문은 거의 완전히 닫혔다. IMF 구제금융을 겪은 한국 자본은 진화했다. 30대 재벌 중 16개가 무너지는 총체적 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자본은 상시적 구조조정 체제구축으로 마른 수건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대중이 빈곤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재벌의 이익잉여금은 폭증했고, 이익잉여금이 쌓여 만들어진 사내유보금은 거대해졌다.

바로 그러했기에 사내유보금에 대한 문제 제기는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IMF 구제금융 국면에 대한 반성과 각성에 근거한 분노였다. 2008년 국제공황이 서브프라임 위기의 형태로 발발한 이후, 노동조합에서도 사내유보금 문제를 공식적으로 내걸기 시작했다. ‘기업잉여금의 10% 사회 환원을 통한 고용창출’ - 2009년 2월 16일 금속노조 23차 임시대의원대회가 의결한 5대 요구안 중 하나다. 개별 노동조합 역시 해당 자본의 사내유보금 문제를 지적해왔다. IMF 구제금융 국면처럼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진 것이다. 그 절박함이 현재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재벌 사내유보금환수운동의 본질적 동력이다.

1987년 이후 두 번의 위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대중은 자기계발서와 거짓 치유에 쉽게 속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년’이고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값싼 위로에 대한 헬조선 흙수저의 답은 ‘죽창’이었다. 연영석의 노래 가사처럼 그 누구도 밥만 먹고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 밥도 먹고 살기가 힘든 상황이다.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에서의 노동은 이제 더 이상 20대 초반에 용돈을 벌기 위해 잠시 하는 일이 아니다. 안정적 일자리가 부재한 지금 그것은 ‘직업’이다. 헬조선 대책, 흙수저 대책을 수립해야 할 국가는, 헬조선과 흙수저라는 말이 유행하는 이유를 ‘젊은이들이 자학적 역사관을 가져서’라고 한다. 우리는 박근혜 정부의 끝 간데없는 무능을 이해한다. 자본주의와 이윤축적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해답이란 그 질서에 적응해 살아야 한다는 충고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체제의 질서를 건드릴 능력을 갖춘 이들은 누구인가. 총선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노동개악을 추진하는 새누리당도, IMF 구제금융 시기의 구조조정을 주도하며 오늘날 한국사회의 원형을 주조한 더불어민주당도, 그 자체가 형용모순인 ‘공정한 시장경제’를 주창하는 국민의당도 아니다. 그 원동력은 빼앗겨온 노동계급의 분노와 배제당한 대중의 박탈감에 있다. 대중은 사내유보금 환수운동을 통해 “너희들이 가져간 우리의 몫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경련이 답하는 방식은 꽤 미묘하고 흥미롭다. 그들은 ‘사내유보금은 사유재산’이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 ‘사내유보금은 이미 투자되어 있다’며 대중의 분노를 달래려 한다. 물질적 이론적 자원이 넘쳐나는 대표적 재벌단체가 내놓는 답변치고 허술하기 그지없기에 더 많은 분노를 부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긴 찰스 윈슨의 말을 살짝 비틀어 보자면, 대중은 더 이상 ‘재벌에게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금붙이를 자발적으로 가져다 바치던 IMF 위기 당시의 대중은 없다. ‘알고 보면 우리 사정도 쉽지 않다’라는 재벌에게, 대중은 ‘우리는 나가 죽으라는 말이냐?’라고 답하고 있다. 정치의 과제는 머릿속에 존재하는 최대강령과 손발이 행하는 최소강령의 분리를 넘어, 구체적 전술로 분노를 조직하는 것이다.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운동은 그 시작이었다.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특별법을 제정하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 1995년 7월, 검찰이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리며 사용한 논리다. 대중의 분노는 끓어올랐고, 거리는 신군부 쿠데타 세력의 처벌을 요구하는 투쟁의 행렬로 가득했다. 그리고 5개월 뒤, 헌법재판소는 대중의 분노 앞에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다.
이와 비슷한 논리가 재벌사내유보금 환수주장에 대해 제기된다. 이른바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말은 상황에 대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개인 혹은 집단이 응당 사회로 환원되어야 할 부를 사적으로 전유하고 있다고 했을 때, 그 부가 사회로 환수되기 전까지 그것은 당연히 사유재산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이미 11년 전인 2005년 입법되고 집행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그 대상으로 삼았던 친일행위로 취득한 재산의 국고귀속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얻은 부가 부당한 재산이라면, 비정규직을 양산해 얻은 부 역시 부당한 재산이다.

왜 특별법이 필요한가. 우리가 그간 제출해온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를 한계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재벌이 지금껏 부당하게 축적한 거대 이윤에 대해 침묵한다는 점에서, 둘째 애초 비정규직, 청년실업, 낮은 최저임금 등 당면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목적세가 아니라는 점에서, 셋째 재벌이 과세가 두려워 투자를 증대시킨다고 해도, 그 ‘투자’가 대중의 삶을 개선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점에서, 넷째 그 법안의 일상적 작동과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이 유기적 연관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법인세 인상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도 법인세 인상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는 재벌과 무엇이, 또 얼마나 다른가? 재벌의 이윤 독식이 야기한 대중빈곤과 고용불안의 가장 큰 공범이 바로 국가다. 대중이 직면한 생존의 문제를 국가 주도로 해결할 의지가 있었다면, 사내유보금환수 운동을 제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재벌의 이윤을 사회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간이윤에 대한 증세와 국고환수가 아니라, 그 사용과 집행을 계획하고 감독할 사회적 통제기구를 건설해야 한다. 사회적 통제기구는 사회적 힘의 형성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재벌사내유보금 환수특별법을 제정하자는 것은, 단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서류봉투를 관계기관에 제출하자는 것이 아니다. 대중적 요구와 투쟁 없는 입법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공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 특별법은 대중적 투쟁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법조문의 성안 역시 공론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내유보금 환수특별법의 제정은 그 시작일 뿐이다. 재벌의 독점 이윤과, 그 막대한 이윤을 가능케 하는 축적 구조자체를 변혁해야 한다. 재벌사내유보금 환수특별법은 재벌 독점이윤의 환수를 통한 한국사회의 구조적 재편의 시작이며, 그 목표는 생산에 대한 사회적 통제다.

“당신은 수력발전 댐에 사용되는 터빈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에 가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정밀하고 세세한 설계도와 함께 주문된다. 설령 그것이 공개입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장할당’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말마따나, 국가와 자본이 그토록 강조하는 완벽한 ‘시장 질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조정된다. IMF 구제금융 자체가, 또한 현재의 기업구조조정 자체가 자본가를 위한 계획경제 아닌가. 문제는 그 수혜자다. 절대 다수의 대중인가, 자본인가? 우리가 사내유보금이라 부르는 재벌의 이윤은 자본으로 축적되어 그 재벌 대자본의 일부가 된다. 자본의 이윤을 사회로 되돌려야 한다는 요구는, 그 이윤을 낳는 생산체제 그 자체에 대한 통제의 요구로 확장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