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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총선, 예상을 넘어선 NLD 압승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투쟁의 승리와 불확실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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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25년만에 열린 버마의 민주적 총선은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전국민주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의 압승으로 끝났다. 최종 결과의 집계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NLD의 승리는 유권자의 80퍼센트 지지에 육박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선거 전에 대부분 해외 언론은 NLD의 승리를 예견했지만, 군부의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의식해 NLD의 단독정부 구성 가능성에 대해 대부분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의 NLD는 버마 민중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단독 민주정부 구성을 쟁취했다.

2010년부터 진행된 군부의 프로젝트는 이번 선거로 사실상 실패했다. 일정한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면서 NLD를 하위 파트너로 포섭해 지배력을 유지하려던 군부 주도의 민주화-경제발전 구상은 버마 민중의 압도적 거부에 직면해 좌초하고 말았다.

사상 최대의 선거

이번 총선은 상하원 의원 491명과 주 및 지역의회 의원 644명, 민족대표 29명 등 1171명을 뽑는 대규모 선거였다. 선관위에 따르면 현 집권당 통합연대발전당(USDP)이 1134명, NLD가 1151명을 입후보했고 이밖에 91개 정당에서 4090명의 후보를 내는 등 총 6375명이 출마했다.

미얀마 전역에 설치된 4만500여개의 투표소에서 이날 총선 투표가 별 사고 없이 마무리 됐다. 1만2000명의 국내 감시단, 1000명의 국제감시단의 평가 역시 대체로 공정한 선거라는 점에 일치한다.

총선거의 잠정적 결과

이번 선거에 NLD의 압승은 명확하다. 상원 135석, 하원 255석으로 명목상 60.27%, 57.95%의 의석을 차지하게 됐다. 임명직을 제외하면, 그 비율은 각각 80.35퍼센트와 77.27퍼센트에 이르는 수준이다.

군임명직(상하원 166석, 전체 의석의 25%) 때문에 개헌선인 상하원 75퍼센트(498석)에 못미치지만, 득표율을 기준으로 보면 498석 중 390석으로 78.31%의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따라서 NLD의 승리는 명목상 개헌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개헌선을 넘는 의석수를 확보한 절대적 압승이다.

반면 승리를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군임명직 25퍼센트에 기대어 정권 재창출을 희망했던 집권 USDP의 참패는 명확하다. 상하원에서 획득한 5.36퍼센트와 6.59퍼센트의 의석은 최악의 참패임에 분명하지만, 군임명직 의원들과 함께 30%대의 의석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 NLD와 USDP 양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은 대부분 소수민족 정당들이다. 버마족이 다수(68%)이지만, 샨, 카인, 라카인, 몽, 카야, 카친 등 소수민족도 독자적 민족정당으로 이번 선거에 참여했다.

※ 위의 집계는 2015년 11월 15일자이며, 아직 집계가 완료되지 않은 선거구가 존재하며, 소수민족 게릴라와 정부군의 교전으로 선거가 취소된 경우도 있다.

배경 - 민주화를 위한 지난한 여정

지난 2011년 3월 말 출범한 신정부는 49년간의 군부 지배를 종식시키고 한편에서 2012년 경제재제 해제 조치를 진행하면서 정치적 민주화 일정을 주도했다. 군부의 강압적 지배방식을 포기하고, 군부의 주도 아래 일정한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추진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2010년 헌법개정과 선거에 NLD는 불참했다. 1990년 선거에서 압승했음에도 군부 쿠데타로 승리를 빼앗긴 경험 때문이다. 1960년 이래 최초의 자유선거로 열린 1990년 선거는 새로운 헌법제정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였고, NLD는 79퍼센트의 득표로 492석 중에서 39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반면 집권 국민통합당(NUP)이 21퍼센트 득표, 10석에 머물자 군부는 선거결과를 승인하기를 거부하고 국가평화발전평의회의 이름으로 군부통치를 지속했다.

민주화를 위한 버마 민중의 투쟁은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1988년 민중항쟁은 5개월에 거친 투쟁으로 독재자 네윈을 퇴진시켰고 1990년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군부의 철권통치로 귀결됐다. 이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수천명의 인명이 희생됐다. 그리고 2007년 9월에는 승려들의 시위로 샤프란 혁명이 일어났다.

2010년 군부가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한편에서 아래로부터 민주화를 향한 민중의 저항에 대한 대응이자, 이른바 버마식 사회주의의 실패로 귀결된 저발전과 광범한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 때문이다. 또한 과도한 중국의존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우려도 작용했다고 한다.

쟁점 - 헌법개정과 군부의 역할

지난 2010년 헌법 제정 당시 군부는 일종의 안전장치로 정권 교체를 어렵게 하는 여러 가지 독소조항을 포함시켰다. 첫째,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 하의 헌법과 유사하게 상하원의 각각 25%와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국경부 장관 등 3명의 핵심 요직에 대한 지명권과 대통령 후보의 지명권을 군 최고사령관에게 부여했다.

둘째, 특히 헌법 제59조는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군사지식 보유자’, ‘후보자 직계가족의 미얀마 시민권자 보유’를 명시해 영국인과 결혼하여 영국 시민권자인 자녀를 두고 있는 아웅산 수치의 대통령 출마를 원천봉쇄했다.

셋째, 헌법 제436조를 통해 헌법 개정을 위해선 상하원합동의회의 75% 이상이 찬성하고 이후 국민투표로 개정이 가능하도록 하여 사실상 개헌을 불가능하게 했다. 특히 상하원 의원의 25%에 대해 군부가 지명권을 갖고 있어 군부가 실질적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다.

현상황에서는 2010년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로 총선을 통해 구성된 상하원에서 각각 1명의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며, 군부도 1명을 지명, 총 3명에 대해 상하원합동회의에서 선거를 실시, 최다 득표자가 대통령, 나머지는 부통령으로 임명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이번 총선의 압승에도 아웅산 수치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선거 직후 외신과의 이후 인터뷰에서 아웅산 수치는 “대통령 위에서” 통치할 것이며, 군부와의 협력을 통해 통치하겠다고 밝혔지만, 이후의 정치과정에서 개헌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다.

전망

선거 직후 군부와 집권당은 NLD의 승리를 즉각 인정했다. 집권당과 군부는 선거 승리와 정부 구성의 과정에 개입하기에 너무나 취약한 득표 밖에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분간 군부가 노골적인 개입이나 방해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군부는 기존 헌법 아래 여전히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고, 군사독재 시절의 경제독점을 통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NLD가 주도하는 민주정부 구성은 불가피하게 군부와의 지난한 협상을 거칠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아웅산 수치와 NLD의 실질적 통치능력이다. 개방국면에서 NLD의 정치활동이 재개된 이후 아웅산 수치와 NLD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비판과 회의적 시선은 적지 않았다. 특히 최근의 민주화투쟁을 주도했던 1988년 세대를 조직적으로 배제한 점을 둘러싸고 NLD에 대한 실망이 적지 않다.

민주화와 경제발전, 소수민족문제 등 난제가 아웅산 수치와 NLD 정권 앞에 놓여 있다. 현재로서 군부의 퇴각은 명확해 보이지만, 헌법개정과 부정축재 재산 등 민감한 사안을 다루게 되면 군부와의 대결은 불가피하다. 이번 선거의 압승으로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중대한 승리를 거뒀지만, 버마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