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금속노조 KEC지회는 ‘관리자 비상대기(공장 점거정보-국정원)’라고 적힌 회사 문건을 입수했다. 국정원의 개입 의혹을 폭로했지만 이들의 주장은 여론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2012년에는 당시 은수미 의원실에서 창조컨설팅의 ‘국정원 이메일리스트’를 폭로했다. 그럼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8년이 지난 현재. 당시 검찰 수사 자료를 통해 국정원이 해당사업장들의 노조파괴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 지난한 시간동안, 세상은 노조파괴 범죄에 등을 돌렸고 피해 노동자들은 그간의 고통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 2010년 3월 4일 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의 직장폐쇄 철회 투쟁 현장 [출처: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
#1 발레오전장시스템스코리아, 신시연
신시연 씨는 발레오전장시스템스코리아에 민주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0년을 버텨왔다. 2010년 2월 직장폐쇄의 발단이 됐던 것도 경비업무 외주화를 막기 위한 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의 저항이었다. 당시 발레오의 생산, 경비, 식당 노동자 875명은 모두 정규직이었다. 노조는 경비 등 비생산업무 외주화가 단체협약 위반이라며 쟁의행위에 나섰다. 2월 16일 회사는 직장폐쇄를 단행했고, 용역을 투입했다. 3월 4일 조합원 600명이 공장 진입을 시도했을 땐 33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발레오 노동자들에게 노조파괴의 칼날을 겨눈 쪽은 회사만이 아니었다. 경찰과 고용노동부, 창조컨설팅이 가세하며 노조파괴의 강도는 높아졌다. 회사는 3월 14일 창조컨설팅과 노조파괴 자문계약을 체결했다. 3월 16일에는 경찰이 금속노조 경주지부를 압수수색하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6월 4일에는 고용노동부 포항지청이 금속노조 탈퇴를 위한 노조 총회 소집권자로 사측과 가까운 노동자를 지명했다. 노동부가 직접 어용노조를 통한 노조파괴의 길을 터준 셈이었다. 2010에서 2011년까지, 발레오 투쟁으로 29명의 노동자가 해고됐다. 신시연 씨도 해고된 금속노조 조합원 중 한 명이었다.
신시연 씨는 2010년 당시 금속노조 경주지부 수석부지부장이었다. 당시 직장폐쇄 철회를 요구하며 연대파업과 도로점거 투쟁 등을 벌였다. 이로 인해 2010년 3월부터 두 달 간 옥살이도 했다. 해고 후 1년간은 노조가 지급하는 해고자신분보장기금으로 생계를 꾸렸다. 이후에는 금속노조 경주지부 조합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버텼다. 큰 아이가 10살, 작은아이가 7살이던 때였다. 부양가족이 있는 신 씨는 연금과 보험을 깨고 대출을 받아야 했다.
국가기관의 노조파괴 개입 정황이 하나씩 드러나는데도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분노만 커졌다. 결국 2017년 8월, 신시연 씨는 국정원 앞으로 갔다. 국정원으로부터 노조파괴 피해를 입은 KT민주동지회, 유성기업, 전교조, 공무원노조 등도 함께였다. 노동자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노조파괴 공작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어떤 목소리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듬해 4월, 신 씨는 국정원에 민원도 제출했다. 한 달 뒤, 국정원장 명의로 “재판 중인 사안에 해당해 별도의 답변을 드리기 어렵다”는 답변서를 받았다.
▲ 2010년 3월 4일 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의 직장폐쇄 철회 투쟁 현장 [출처: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
신 씨는 대법원의 부당해고 확정판결로 그해 9월 현장으로 복직했다. 하지만 현장에는 이미 민주노조가 사라진 뒤였다. 노조파괴의 피해자는 신 씨만이 아니었다. 노조파괴 이후 회사는 인사고과에 따른 각종 성과급을 도입했다. 어용노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2014년 7월부터는 정기 상여금 700% 중 500%를 상반기, 하반기 두 번에 걸친 평가 성과급으로 지급했다. 최하등급인 D를 받으면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학자금도 안 나왔다. 인사고과 최고 등급과 최하 등급의 연봉 차이는 1천만 원에 달했다. 신 씨는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성과급 차별로 큰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회사는 금속노조 조합원들을 풀 뽑기나, 화장실 청소 같은 업무에 배치하는 등 직장 내 괴롭힘을 가했다.
10년의 기간 동안 신 씨를 포함한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회사와 무수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최근, 금속노조 조합원의 규모가 과반을 넘어섰다. 현재 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 조합원 수는 229명. 과반인 225명보다 많다. 아울러 검찰은 지난3월 11일, 발레오 강기봉 전 사장(지난 4월 24일 의원사직)에 대해 업무상 배임·업무상 횡령 혐의로 공소를 제기했다. 강 전사장이 회사 자금을 노조파괴 비용(창조컨설팅 자문 계약금과노조파괴 사건 변호사 비용)으로 썼다는 이유에서다. 이번 공소는 공소시효 10년을 바로 앞두고 이뤄진 것이었다.
#2 KEC, 김성훈
2010년 6월 30일 새벽 1시, KEC에 직장폐쇄가 단행됐다. 한 시간 전에 배치된 용역 경비 600여 명은 여성 기숙사에 진입해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냈다. 사측 주도의 기업노조 설립을 위한 노조파괴 시나리오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KEC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국정원의 노조파괴 개입 문제를 제기했다. 2011년 말, 노조가 회사 ‘상황일지’를 입수하면서다. 해당 문건에는‘2010년 11월 10일, 직장폐쇄 147일차에 관리자 비상대기(4공장점거 정보-국정원)’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회사가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노동자들은 국회에서 문제를 폭로했지만, 귀 기울여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검찰 수사자료를 통해 국정원이 창조컨설팅을 통해 KEC의 파업정보를 확인한 정황이 밝혀졌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노조의 목소리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난 셈이었다.
2010년 10월 해고된 김성훈 씨는 국정원의 노조파괴 개입 증거가 뒤늦게 밝혀졌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부당노동행위 공소시효는 5년. 검찰 수사가 빨리 이뤄져 증거들이 속속 밝혀졌다면, 법원 판결의 처벌 수위도, 노동자의 피해도 달랐을 것이었다. 2017년 5월, 대법원은 2012년 KEC의 정리해고가 노조파괴 일환이었다며 부당해고 판결을 내렸다. 사건 이후 지회는 검찰 수사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 수사기록만 5천 쪽에달하는 문서에는 회사의 범죄행위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여러 부당노동행위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회사의 혐의는, 그들이 저지른 무수한 범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이미 끝난 뒤여서 추가 고발은 불가능했다. 검찰의 거듭된 불기소처분과 늑장 대응으로 KEC 회장은 처벌을 피해갈 수 있었다.2016년 11월, 일부 관리자들만 200~3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을 뿐이었다.
기업주 처벌을 피한 KEC는 2020년 1분기 흑자 전환(당기순이익 15.9억 원)을 했다. 반면 해고자 김성훈 씨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KEC의 노조파괴가 시작된 10년 6월, 당시 김 씨는 KEC지회 부지회장이었다. 회사는 2010년부터 이듬해까지 김 씨와 같은 노조 간부를 포함해 40여 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이 가운데 복직하지 못한 노동자는 5명이다. 그리고 그들 중 김 씨만이 현재까지 노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조합원들이 매월 김 씨의 생계비를 보태고 있지만, 4인 가구를 책임지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김 씨는 정작 본인 생계보다는 손해배상과 소송에 시달리는 지회 조합원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실제로 조합원들은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큰 고통을 겪었다. 회사는 노조 파업을 이유로 2011년 3월, 301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6년 9월 법원은 손해배상금을 30억 원으로 조정했다. 조합원 60여 명은 3년 동안 최저임금만 받으며 이 30억 원을 모두 갚아야 했다. 그때 국가기관의 노조파괴 개입사실이 소상이 밝혀졌다면 달라질 수 있는 얘기였다.
파업 복귀 이후에도 조합원들은 회사의 괴롭힘을 견뎌야했다. 2011년 6월 회사는 직장폐쇄를 철회하고 파업에서 복귀한 조합원들에게 ‘정신교육’을 시켰다. 파업 참여자는 노란색, 기소유예자는 파란색, 기소자는 빨간색 티셔츠를 입혔다. 각 티셔츠에는 ‘KEC 혁신학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조합원들은 7주간 이 모멸감을 견뎌야만 했다.
10년 전 714명에 달하던 금속노조 KEC지회 조합원은 현재 110명에 불과하다. 지금 제2노조(노조파괴 당시 사측주도 설립)가 약 250명, 금속노조에서 빠져나간 제3노조가 20명 수준이다. 현장에서의 금속노조 차별도 이어지고 있다. KEC지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처음으로 여성 노동자 2명이 ‘S4’직급으로 승진했는데, 모두 제2노조 조합원이었다.
#3 상신브레이크, 조정훈
상신브레이크도 2010년 8월 직장폐쇄를 단행하며 노조파괴에 나섰다. 결국 지난해 금속노조 상신브레이크지회는 해산했고, 현재는 조정훈 씨만이 금속노조 대구지역지부 조합원으로 남아 있다. 조 씨를 비롯한 해고자 4명은 2017년 대법원의 부당해고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회사는 2017년 4월 복직 예정자들에게 자택 대기 발령을 내렸고, 그해 7월에는 정직 1개월의 징계를 통보했다.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해고자들은 2017년 10월에서야 어렵게 현장에 복직했다.
조 씨에게 지난 10년은 분노와 고통이 겹겹이 쌓인 세월이었다. 회사의 노조파괴는 고용노동부와 검찰 등 국가기관이 공모하고 은폐한 사건이었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었다. 실제로 직장폐쇄 시작부터 고용노동부는 회사와 손발을 맞췄다. 2010년 8월 19일, 회사는 대구지방고용노동청에 상신브레이크지회 파업의 불법성을 질의했다. 다음날 노동청은 노조의 파업이 불법이라는 공문을 보내왔고, 회사는 3일 뒤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노동부가 이렇게 신속한 답변을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회사의 노조파괴 자문을 맡은 창조컨설팅에 대한 검찰조사도 주먹구구식이었다. 2012년 9월 은수미 의원실은 창조컨설팅과 국정원의 노조파괴 공작을 폭로했다. 하지만 검찰이 상신 본사를 압수수색 한 것은 한 달이나 지난 뒤였다. 회사가 증거를 파기할 시간을 벌어준 셈이었다. 결국 2016년3월, 대법원이 상신 대표이사와 전무이사에게 고작 200만 원형을 선고했을 뿐이다. 최근 이명박 노동부가 상신, 발레오의금속노조 탈퇴로 ‘노사파트너십 프로그램’ 사업을 지원한 사실도 밝혀졌는데, 사건의 공소시효는 속절없이 지나 있었다.
조 씨는 7년의 해고 기간 생계유지가 어려워 투잡도 뛰었다. 장날이면 닭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다른 해고자들은 대리운전, 건설 현장을 전전했다. 사실 해고보다 마음 아픈 것은 금속노조가 사라진 일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지금 상신 기업노조 집행부는 과거 금속노조 상신브레이크지회 간부를 역임했던 사람이 맡고 있다. 기업노조는 지난해 상반기, 상여금을 기본급에 녹이는 회사의 정책을 받아들였다. 최저임금 인상에 맞선 회사의 꼼수였다. 조 씨는 금속노조 사업장 중 이를 받아들인 곳은 없다며 기업노조 집행부 입장에 반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발레오, KEC, 상신의 노조파괴는 이명박 정부 시절한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를 거쳐 현재 문재인 정부에서도 노동자들의 문제 해결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국가기구의 노조파괴 공작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