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일병 계급장을 달자마자 임기 막판인 노태우 대통령이 군단 사령부를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 청와대 경호실은 대통령 방문 사흘 전부터 사령부 곳곳을 발칵 뒤집어 놨다. 군사령관만 방문해도 쓸고 닦고 불고 털고 난리인 판에 대통령 방문은 사령부 내 모든 사병들을 가혹한 청소노동으로 내몰았다.
대통령 방문 전날 사령부 안에 별도의 작은 건물에서 독립적으로 근무하는 기무사령부의 중사 한 명이 시위 전력이 있는 사병들을 만나 “경거망동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기무사령부는 전국의 각 군단과 사단 사령부에 예하부대를 두고 군인들을 감시해왔다.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기무사 중사가 육군 중령이나 대령과 바둑을 두면서 친구처럼 지냈다. 기무사 대위가 3성 장군인 군단장과 맞먹을 위세를 지녔다.
엄격한 계급사회인 군대에선 있을 수 없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기무사 대위가 부대 안에서 준장인 부군단장과 함께 테니스를 치며 놀았다. 그동안 모든 국가 권력이 국가정보원(국가안전기획부)와 기무사령부를 중용한 까닭이다.
몇 달 뒤 대통령이 김영삼으로 바뀌고 기무사에 칼바람이 불었다. 민간인처럼 긴 머리를 하고 다녔던 기무사 부사관과 위관장교들을 모두 일반부대로 전속시켰다. 건들거리며 사령부 내 아무 사무실이나 들락거리던 중사 한 명은 전방의 전투부대로 간다고 울고불고 난리였다.
이른바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작업이 시작된 거다. 기무사령관도 3성 장군에서 계급을 한 단계 내려 소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사령부 내에 있던 기무사 책임자였던 대위는 전방 부대 중대장으로 갔다는 둥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잠시였다. 권력은 다시 감시견을 필요로 했고, 전방부대로 갔던 기무사 간부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일반부대를 감시하는 역할을 다시 맡았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도 기무사는 여전히 군대는 물론이고 가끔씩 민간인까지 사찰하다가 언론에 폭로돼 말썽을 빚고 있지만 여전히 해체되지 않고 건재하다. 권력을 군부가 잡든 민간인이 잡든 간에 감시견이 필요하니까.
특무대, 방첩대, 육군 보안사령부, 국군 보안사령부, 국군 기무사령부로 이름 만 바뀌었지 이들이 1948년 5월 27일 육군 정보국 산하 특별조사과로 시작한 이후 지난 66년 동안 해오던 일은 변하지 않았다. 초대 방첩대장이 박정희 소령과 동기였던 김안일 대위였고, 전두환 본인이 1979년 보안사령관으로 정보를 독점하면서 대통령 자리까지 훔쳤으니.
이런 군부의 더러운 정치개입을 놓고 흥미 있는 학술논문이 나왔다. 지난 5일 열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2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아우렐 크루아상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교수는 주제발표문에서 “6월 항쟁 이후 한국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이 ‘군부의 탈정치화’를 가져왔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이를 학술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3일자 23면에 “막강한 대통령, ‘군부 탈정치화’ 가져와”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이 기사만 읽으면 군부의 탈정치화를 위해 싸워온 60~90년대 수많은 학생과 지식인의 역할은 어디에도 없다.
크루아상 교수는 한 발 더 나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 군부 주도의 경제발전과 현대화가 역설적으로 민주화의 터전을 마련했다며 한국사회에서 군사 정권을 역사발전에 필수조건으로 인정하는 듯한 발언도 한다. “군부가 민간 엘리트와 협조를 통해 정부를 장악하고 국가 점장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더욱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민간 통치의 구조적 조건을 만들었다”는 부분이 그것이다.
지식인과 언론은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속성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무리하게 일반화하다보면 본질을 한참 벗어나기 일쑤다. 결국 크루아상 교수는 “한국의 발전에서 군부 주도의 경제발전과 현대화가 민주화의 터전을 만들었다”는 괴상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망발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독재’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