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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신이 신자유주의라는 '신'에게 묻는다

[칼럼] 노동자를 하늘로 추방하는 비상한 머리를 가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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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설명서인 스펙이나 미스김 사용설명서나 뭐가 다를까 마는 스스로 비정규직을 택한 미스김은 비정규직을 넘어 아예 스스로 제품 혹은 상품이 되는 길을 택했다. IMF 때 구조조정으로 친구를 잃은 미스김은 ‘감정’을 잃어버렸다. 좀 웃어 보라는 장규직의 말에 계단을 내려오며 ‘씨익’ 웃는 미스김의 미소는 인간의 따스한 미소가 아니라 차가운 공기인형의 미소였다.

마케팅 부서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미스김의 손놀림은 감정을 가진 인간의 손놀림이 아니라 기계의 동작이었다. 애써 손님들에게 미소를 보이며 두 손을 조아리고 90도 인사를 하는 백화점의 계약직 노동자는 감정노동을 한다지만 미스김은 감정노동을 하지 않는다. 8시간 어치만 일하면 됐지 회사를 위해 더 일할 필요가 없다는 미스김에게서 우리는 파업의 이유를 배워야 한다. 노동의 가치를 돈 백으로 회계 처리해 버리고 마는 자본가들에게 노동을 더 제공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미스김이 굳이 김 양 호칭을 거부하고 미스김 호칭을 고집하는 이유도 6시에 칼퇴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과연 우리는 퇴근 후 살사댄스를 즐기는 미스김처럼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으로 살고 있는가. 무엇이 김 양을 미스김으로 만들고 사용설명서가 동봉된 제품으로 만들었는지 분명하다. 미스김의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사물화된 노동이고 자본주의는 이러한 노동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직장의 신>에서 내레이션은 스스로 비정규직을 택한 자, 3개월 후면 홀연히 직장을 떠나는 자,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자 미스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들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인형이자 기계 부품인 미스김은 철저하게 시간 외 수당을 챙긴다. <직장의 신>에서 이야기하듯 비정규직 800만 시대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다. 최근 박근혜 정부의 등쌀에 밀려 SK가 5천 명을 정규직 전환한다고 발표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는 미스김처럼 시간 외 수당은커녕 해고의 공포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미스김이 정규직인 장규직에게 말했듯이 미스김은 스스로도 은행에서 해고된 경험도 있거니와, 우리 같은 계약직은 3개월, 6개월 해고의 공포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도 자기 통치 능력이 필요하지만 미스김처럼 직장의 신으로 등극하기 위한 각종 스펙을 쌓는다는 것은 무리이거나 불필요한 일일지 모른다. 직장의 신은 미스김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28년 동안 Y-Jang에서 근무하던 고 정도 과장의 시계가 멈추면서 고 과장이 권고사직을 받았을 때 같은 부서의 사람들은 고 과장에게 온정의 손길을 뻗치지만 미스김은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정규직이 무슨 필요 있느냐“고 말한다. 가혹한 말일지 모르지만, 감정을 도둑질당한 미스김에게서는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궁극적으로는 계약직, 파견 노동자, 비정규직 등이 정규직을 먹여 살리는 피라미드 구조를 자본주의가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규직은 정년 연장으로 각자도생의 길을 찾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찾을 곳은 저 높은 하늘밖에 없다. 드라마는 역시 드라마일 수밖에 없는지 모르지만, 밥 먹고 가라는 고 과장의 부탁을 시간 외 노동으로 치부하고 거절하던 미스김은 벤치에서 홀로 흐느낀다.

자기 인생의 가치가 28년 ‘고정도’로 끝난 고정도 과장의 인생도 서글프고 ‘고정도’라는 이름도 슬프지만, 해고의 경험, 구조조정의 경험으로 상처를 받고 감정까지 상실한 미스김에게서 드디어 인간의 감정이 복원되는 것인가. 미스김 개인으로서는 피가 흐르는 감정이 되살아날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정도’도 안 되는 인생을 힘겹게 버티고 있다. 미스김처럼 조산사 자격증 등 각종 자격증을 딸 시간도 돈도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직장의 ‘신’은 강림은커녕 한 번 그 이름 불러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미스김에게 말을 건네고 애정의 감정을 느끼는 무정한이 ‘유정’이고 정을 갖고 있어야 할 미스김이 무정으로 뒤바뀐 현실에서, 육체와 정신 모두가 기계로 둔갑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의 신>은 그 자본주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캐묻지는 않지만, 회사로 대변되는 자본이 신의 지위를 갖추고 있음을 인정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날 노동과 자본의 투쟁은 기계와 신이 블록버스터 영화 속에서 벌이는 싸움이요 투쟁인지 모른다. <직장의 신>은 미스김과 달리 정을 주고 건네는데 익숙한 정주리를 통해 ‘꿈이 스펙을 이긴다’는 말이 환상임을 보여준다. 못 하는 일이 없는 미스김 탓에 인사고과를 받을 길 없고 해서, 3개월 계약을 갱신할 길이 도무지 없는 정주리는 ‘꿈이 스펙을 이긴다’는 자본주의의 환상에 잠시 빠져 보지만 임신 탓에 계약 갱신 여부에 목 타는 박봉희를 보면서 레알한 자본주의 현실을 깨닫는다.

시간 외 수당과 기본임금을 챙겨 뉴질랜드로 개인 휴가를 떠나는 미스김의 모습은 환상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우리의 소원이긴 하지만 그 소원은 절대다수 노동자들의 소원이 아니다. 그 소원이 드라마 안에서 미스김의 스펙 앞에서는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기계 부품으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소외된 노동은 생존 앞에서 번번이 좌절한다. 노동자들의 시간 외 수당, 잔업 수당은 필연적이고 강제된 노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이것을 알기에 노동자들을 먼저 저임금 구조 속에 몰아넣은 후 다시 시간 외 노동을 시켜가며 노동을 강제하고 시간 외 작업을 생존 앞에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비열한 자본의 논리를 노동자는 어떻게 혁파할 것인가. 오늘, 직장의 신이 신자유주의라는 신에게 묻는다. 아주 다양한 형태의 임금 트랙을 만들어 놓고 장난치는 신자유주의의 신, 정규직을 인질로 잡아 놓고 비정규직, 계약직들을 위협하는, 그리고 끝내 노동자들을 저 높은 하늘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추방하고 마는 이 비상한 머리를 가진 신에게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