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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죽은 사람이 웃는 걸 봤다

[양규헌 칼럼] 한국 민속명절의 ‘자연균형’을 깨뜨리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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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명절엔 오래된 전통이 깃들어 있다. 전통이란 오랜 세월동안 자동적으로 기입된 그 사회의 질서로 공동체 사람들에게 미풍양속의 권리와 의무, 양식 등의 심리기제를 발동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짧은 연휴에 장시간의 교통체증을 극복하며 고향과 부모형제를 찾아가 친족의 정을 나누려 한다. 고유의 명절에 맞는 음식상을 앞에 두고 그동안의 소원했던 만남 을 아쉬워하며 그 속에서 오고가는 인사와 덕담과 안부들은 친족들의 정을 새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서양은 모르겠으나 우리의 명절은 축제라기보다는 미풍양속에 가깝고 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죽음을 추도하는 애도문화라는 것이다. 어쩌다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호텔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장면을 우리는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그 만큼 조상에 대한 제사가 중요한 집단의식의 커다란 부분으로 작용하고, 오랜만에 풍족한 음식과 술, 식혜 등을 마시며 공동체 쾌락을 맛보는 시간은 축제의 마음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애도는 주부에게 ‘명절 증후군’으로 일컬을 만큼 과도한 가사노동을 부여한다고 하는, 제사 음식 차리기에서 시작된다. 이 음식은 조상에게도 바쳐지지만 멀리서 방문하는 사랑하는 아들 딸 들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기도 하니 팔다리 허리 끊어지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에 대한 애도는 그들이 살았던 삶과 죽음을 기억하겠다는 뜻이다. 즉 ‘죽은 조상들은 죽었다’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산 사람들은 모이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자연균형’이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일이다. 죽음도 사안에 따라 다르겠으나 죽음자체는 삶의 일부이고 삶이 품어 안는 또 다른 삶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제삿날 제사지내고 명절에도 엄숙하게 정장을 입거나 한복을 차려 입고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엄숙한 시간이 진행되는 가운데도 이 ‘자연균형’이 깨지는 일들이 벌어진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거주하는, TV가 켜져 있는 다른 방이거나 아니면 안방에서 제사지내는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거실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있는 죽음이 출몰한다는 것이다. 죽었는데 다시 살아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좀비영화이겠다고 상상하겠지만 그게 절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인지 이전부터 죽 그래왔는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된 박정희를 목도하고 있다.

채널 사이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출몰해서 흑백사진으로 빙긋 웃다가 싱긋하고 사라진다. 소란스런 이야기 속에서,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대는 아이들의 함박웃음 속에서, 그런 현상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처럼 반복된다. 여기서 중요하고 무서운 일은 ‘영향력이 없는 것처럼’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에게, 사람들에게 큰 타자(박정희의 허구적 신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이 된다)를 무의식중에 기입해 놓는 자동질서로 작용하게 된다. 사람들은 큰 타자(절대자, 신, 민족의 지도자, 당수령 등으로 호명되는 것들을 큰타자로 볼 수 있다)로 인식하는 것들을 자신과 분리된 대상으로 절대시하게 되며 그것은 곧 자기-주인의 주체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결과의 작용으로 우리는 우리가 뽑았다는 권력에서 주인이 될 수 없는 모순을 겪어오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것의 끊임없는 반복이 영원 할 수도 있다는 무서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제 죽음과의 엄숙한 대화시간(제사)이 끝나고, 음식도 맛있게 나누어 먹고 세배도 끝이 났다. 세배 돈도 받고 덕담도 주고받았으니 윷놀이로 대미를 장식해야 한다. 두 편으로 나누어진 흑과 백의 싸움인 윷놀이! 이것은 정말 신나고 아슬아슬한, 명절놀이 중 백미라고 생각한다. 세 살 아기부터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다 선수로 참여할 수 있고 ‘말판 쓰기’에도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참여한다. 정말 이런 대동놀이가 없을 정도로 아파트 거실이 들썩거린다. 대단한 진영의 싸움이 벌어지고 승패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모습이 캐릭터들의 성격을 드러내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기는 쪽은 환호하고 새해의 행운을 점쳐보기도 한다. 그 떠들썩한 순간에도 선거에서 승리한 딸을 통해 죽음을 극복한 박정희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얼굴을 들이민다. 예민한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은 이 죽음의 출몰에 암담함을 느끼는데 그 사이로 박정희의 연장정부에 대한 기대의 말들이 노인들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윷놀이 판은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 놀이의 전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전쟁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지난 명절에도 지지난 명절에도 그랬었다. 보수 이데올로기와 자유주의 중도파로 나누어 논쟁이 이어졌고,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의 정치는 말도 꺼내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었다. 그런데 이번엔 완전히 보수의 선거 승리로 다른 견해는 그냥 침묵을 택하는 분위기로 침잠한다. 집안의 어른들이나 골수 경상도 아저씨의 박근혜 대통령시대의 찬양을 속수무책으로 들어야만 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단이 나게 된다. 은행에서 금융노동자로 일 하는 비교적 성질 급한 남자애가 경비 일을 하는 친척아저씨에게 대들었다. 경비주제로 살면서 특권계층을 위해 정치하는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묻는다. 이에 한 성질 하는 친척 아저씨는 갑자기 멱살잡이로 젊은 조카를 패대기친다. 그 이후 어찌어찌해서 정치이야기는 가족 간에 더는 하지 말자고, 정치는 더러운 놈들이나 하는 거라며 애써 흥겨웠던 명절 자리를 마무리 짓지만 서먹한 분위기나 허접한 이데올로기 대립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감정의 골을 파고들어 상대방의 인격까지도 부정하고 싶은, 깊은 상흔을 남기게 된다.

가족이라면 대개 비슷한 처지의 계급적 기반을 갖고 있을 텐데도 서로 다른 정치이데올로기로 나누어진다. 가족 내의 분열도 여러 성질의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계급적 기반을 토대로 하는 ‘계급이데올로기’의 분열은 우리사회의 심각한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야 말로 희극이지 않는가. 모든 가족 간의 친밀한 유대감, 한 조상의 뿌리로 여러 갈래의 기쁨을 나누던 잎들이 갑자기 ‘모든 이의 아버지’ 타자라는 강풍에 맞아 혼비백산 흔들리는 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지젝”에 대입해 본다면 ‘인간이 기표의 네트워크에 사로잡힐 때, 이 네트워크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효과를 끼친다. 강박적인 반복을 통해서, 항상성을 지닌 자연적인 균형을 교란시키는 기이한 자동 질서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의 풍경이 되어버린다. 먹고 마시며 즐거운, 쾌락의 원칙에 충실하던 가족들은 갑자기 각자의 속내를 알 수없는 이방인 족속들이 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모든 이는 두 번 죽는다. 한번은 자연적인 죽음(신체의 죽음), 한번은 상징적인 죽음(사회적의미의 죽음)이다. 이것은 바로 역사속의 반복에 대한 헤겔의 이론이다. 박정희는 이미 죽었지만 아버지를 애도하는 딸(그의 정치목적이 아버지의 복권)로 인하여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마 역사의 ‘최후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박정희는 그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므로 지금도 여전히 그의 죽음을 알려주려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의 반복’에 부딪칠 것이다.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일부 국민의 믿음에 의해 유지되는 독재자의 부활은, 죽음의 완결을 거치지 못해 자꾸 반복되어 살아난다. 즉 완전히 그의 죽음이 끝나지 않는다면 노동해방의 꿈은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다.

처음엔 비극의 아버지 그다음엔 희극의 딸로 우리의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노동자에겐 절망의 날들이 반복되는 걸 말한다. 노동자가 우리자신의 주인으로 큰 타자(권력자들)에게 호명당하거나 줄 세워지지 않고, 명절가족들이 윷놀이를 한 다음 서로 이방의 가족으로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복적인 변혁의 몸짓을 끊임없이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 땅 다수인 노동자의 역량을 모아내어 어떤 것이든 시도하고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주인에서 활동가로 거듭나는 변혁의 길을 만들고 실천해 나가는 새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