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해고투쟁은 스스로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 미래 가치를 포기않고 싸우는 것

[연정의 바보같은사랑] (71) 재능교육지부 ‘기아해복투’ 거리강연에서 故 윤주형 조합원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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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주] 1월 28일 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윤주형 씨(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 사내하청분회 조합원)가 기아차 화성공장 인근 자취방에서 목을 매었습니다. 목을 매고 얼마 뒤 자취방에 찾아간 노동자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그는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2월 4일 현재 故 윤주형 조합원이 세상을 떠난 지 8일차가 되었지만, 아직 장례를 치르고 있지 못합니다.

고인의 죽음 직후, 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는 고인과 함께 복직투쟁을 해온 ‘기아자동차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이하 ’기아 해복투’)’와 협의 하에 책임자 처벌과 원직복직 등의 요구안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례를 주관하기로 한 기아차지부 화성지회는 원직복직이 아닌 고인의 사망일인 1월 28일 자로 신규채용 하겠다는 회사 측 안으로 합의를 하고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기아 해복투’는 반대 입장 표명을 하고, 다른 부분은 다 포기할테니 고인의 염원이었던 원직복직이라도 관철된 후에 장례를 치루어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는 2월 1일 장례 강행 입장을 표명하였고, 여기에 반대하는 기아자동차 원하청 노동자들과 투쟁사업장 노동자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장례식장 염습실 앞에서 연좌하며 원직복직을 요구하였습니다. 2월 1일 장례식장에 온 화성지회와 사내하청분회 상집간부들은 연좌하고 있는 ‘기아 해복투’를 포함한 기아차 노동자 등과 장시간 동안 토론을 하였으나 결국 물리력을 행사하며 장례를 강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순식간에 장례식장은 아수장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상주인 기아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김수억 씨가 화성지회 상집간부들에 의해 사지가 들렸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실신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연좌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우리한테 이러는 걸 회사에다가 하라’며 항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장례 강행에 실패하자 화성지회는 장례식장에서 철수하였습니다. 화성지회는 철수하는 시점인 이날 오전 10시까지 장례식장 이용료를 지불하고, 그동안 들어온 조의금과 방명록을 갖고 철수하였습니다. 이후, 새벽에 화성지회가 사내 상조회를 이용하여 몰래 염습실에 들어가 상주도 입회하지 않은 상태에서 염과 입관을 한 사실이 드러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현재 故 윤주형 조합원의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기아 해복투’를 포함한 기아차 원하청 노동자들과 연대단위들은 어렵게 다시 장례식장 재계약을 하고, 빈소를 지키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故 윤주형 조합원이 있는 화성 중앙병원 장례식장(사당역 4번출구 경진여객, 수원역 32번·33번·35번·38번)에 조문을 부탁드립니다. 매일 저녁 7시, 기아차 화성공장 북문에서는 고인의 넋을 기리고,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립니다. 화성지회가 그동안의 조의금을 모두 가져가버려 당장 빈소를 유지하기도 힘든 상태입니다. 투쟁기금으로 함께 해주실 분은 기아해복투 후원계좌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새마을 금고 90021-4386-6421 예금주 김수억)

힘겨운 해고생활을 했던 故 윤주형 조합원이 원직복직 하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을 독자들께 전하고자 2012년 7월 17일 재능교육지부 시청사옥 앞 농성장에서 진행했던 재능교육투쟁 거리 강연, <기아차 해복투 용감한 4총사 “이동우는 우리 조합원이다”> 내용을 나눕니다. 故 윤주형 조합원은 ‘해고란 스스로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 미래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2.3차 하청 노동자와 계약직의 노동조합 가입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고, 노동조합에게 이것을 요구하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의 철학과 관점을 대변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故 윤주형 씨가 해고되고 나서 가장 참담하고 힘들었던 것은 해고노동자는 도와주어야 하는 불쌍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시선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정규직 노동자들과 회사 측의 시혜적인 동정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그가 당한 해고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으로 인한 해고’였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원직복직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또, 故 윤주형 조합원은 조합원들이 어깨 당당하게 피고 일할 수 있는 신나는 현장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를 지키기 위해 꼭 현장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본 글을 쓰는 데에 꼬뮌영상네트워크의 영상 기록을 참고하였습니다. 소중한 영상 기록을 남겨주신 꼬뮌영상네트워크에 감사드립니다.



해고가 예약되어 있는 비정규직의 일상

“기아자동차 1차 하청 해고노동자구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기아 해복투에서는 해고자들 가운데서 가장 경박한 그런 해고잡니다. 저는 해고노동자 윤주형 입니다. 반갑습니다.”

2012년 7월 17일 저녁, 재능교육지부 시청사옥 앞 농성장. 재능교육투쟁 거리 강연, <기아차 해복투 용감한 4총사 “이동우는 우리 조합원이다”>에 공동 강사로 참여한 윤주형 씨는 자신을 ‘경박한 해고자’라고 소개한다. ‘기아 해복투’는 매주 수요일마다 ‘용감한 형제들의 외부세력되기’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고·비정규직·노조탄압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단(이하 ‘공동투쟁단’)’ 활동 등 연대투쟁을 하고 있다. 이 날, 시종일관 재밌게 이야기 하려던 윤주형 씨의 계획이 실행되지는 못했다. 돌이켜보면 윤주형 조합원은 자신의 아픔을 들키지 않으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밝고 씩씩한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는 ‘해고가 되고 난 다음에 해고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는 솔직한 심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해고투쟁은) 스스로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 미래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것이라고 한마디로 정의를 해봤는데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실은 어디 가나 언제가 해고가 예약이 되어있고, 자신의 당당한 요구를 이야기 하게 되면 회사에서 잘 잘리죠. 고만고만한 사업장에서 일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꿈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지 못하는 처지가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비정규직의 일상이라고 생각합니다.”

  2012년 7월 17일 저녁, 재능교육지부 시청사옥 앞 농성장. 재능교육투쟁 거리 강연, <기아차 해복투 용감한 4총사 “이동우는 우리 조합원이다”> 故 윤주형 조합원이 이야기하고 있다. [출처: 전국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해고노동자는 불쌍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시선이 힘들게 했어요

기아차 정규직 해고자인 이상욱 씨가 사회를 보고 비정규직 해고자인 윤주형, 이동우, 김수억 씨가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 날의 거리강연 주요 컨셉은 자신들이 해고된 이유와 복직이 안 되고 있는 이유, 오랜 시간 복직이 안 되면서 받고 있는 상처 등이다. 이상욱 씨는 자신들이 용기 내서 하는 이야기를 하면 여기 있는 연대동지들을 통해 자신들이 치유를 받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노동자 윤주형이 해고되고 나서 가장 참담하고 힘들었던 것은 해고노동자는 도와주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 해고노동자는 뭔가 많이 부족한 존재라고 하는 현장의 시선과 돌봄들이 저를 굉장히 불편하게 하고, 저를 너무너무 힘들게 했어요.”

그는 2009년 공정변경 시 노사합의에 따라 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며 사내하청분회의 지침을 받고, 그 지침을 완강하게 사수하는 현장투쟁을 하다가 2010년에 해고가 되었다. 하지만, 정규직 노동조합이 그 투쟁을 허락해준 적이 없다는 이유로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기아차지부로부터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으로 이한 해고’를 인정받지 못해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도 불승인이 나서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각종 민형사상 고발을 당하고 벌금이 나왔는데,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그는 그 돈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기소중지가 되고 수배 상태가 된다.

“어디를 갈 때마다 누군가 불심검문을 하지 않을까? 이런 것들 때문에 조마조마 했어요. 경찰들하고 막닥뜨려서 싸울 때도 예전 같으면 (경찰이)방패를 들어도 물러서지 않았을 텐데, 싸우게 되면 어느 순간 멈칫 하는 순간이 생기고. 내가 멈칫하는 걸 느낄 때마다 너무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고 너무너무 비참했던 기억이 있어요.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다른 동지들이 ‘우리가 모아서 벌금을 내줄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돈을 너무너무 받기가 싫은 거에요. 나는 현장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투쟁하는 동지로 서고 싶은데, 이 사람들은 계속 도와줘야 되는 동지로 보는 것이죠. 그것이 너무나도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정당한 조합활동으로 인한 해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노동조합으로부터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와주겠다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지만, 윤주형 조합원은 그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정말 받고 싶었던 건 기아자동차지부의 ‘정당한 조합 활동으로 인한 해고 인정’과 신분보장기금, 법률비용 지원 등 공식적이고 정당한 지원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해고를 선택을 했나?

윤주형 씨는 2012년에서야 기아차 해고자 후원회 ‘희망’의 지원으로 벌금을 정리하고, 동료들의 집을 떠돌면서 생활하던 것을 정리하고 비로소 공장 앞에 월세방을 얻게 된다. 후원회 ‘희망’이 만들어지고 나서 윤주형 씨는 처음으로 생계비를 받게 된다. 그는 아직 현장에서 자신이 아직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이 현장을 언제 들어갈지 알 수 없고, 이 투쟁을 승리할지 알 수 없지만. 작지만 그래도 이 현장에서 윤주형이 남아서 꼭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더라. 현실에서 느끼는 참담함과 미래를 생각하면서 느끼는 희망. 윤주형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 그래서 현장에 남아서 해고자동지들과 투쟁을 하고 싶고요.”

그는 벌금 내지 못한 이야기가 창피하지만, 많은 동지들 앞에서 얘기를 했으니 앞으로는 마음이 좀 더 편해질 거 같다고 했다. 2008년에 해고된 정규직 노동자인 이상욱 씨는 자신이 해고를 선택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조립팀에서 일하던 그는 카렌스 단종으로 진행된 사측의 강제 전환배치에 반대하다가 해고가 되었다. 당시, 기아자동차지부(김상구 지부장)는 회사와 일방적인 전환배치에 합의서를 작성하고, 이상욱 씨는 여기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자동차 라인에서 기계 밑에 기어들어갔죠. 그래서 설비가 섰습니다. 차가 내려오면 저는 죽겠죠. 그때 노동조합 사무국장이 와서 지금 나오면 살고 안 나오면 죽는다라고 최후통첩을 저한테 하더라고요. 그때 안 나왔습니다. 그리고 해고되더라고요.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나는 왜 해고 됐을까? 그때 내가 해고를 선택을 했나?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서 물음표가 있습니다.”

그때 두 명이 같이 기계 밑에 들어갔는데, 소속된 현장 조직이 없는 그만 해고가 되었다. 그는 요즘 해고자로서 무엇을 해야 될까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는 화성공장 성폭력대책위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에 화성공장 여성의날 기획사업을 통해 여성노동자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그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자신을 깨닫고 도망쳤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남성중심적인 사업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고충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동우가 우리 동지 기아차지부 조합원인 이유

“최근 많은 집회 장소에서 윤주형 동지가 앞장서서 굉장히 많은 구호를 외쳤습니다. 제가 한번 외쳐볼 테니까 동지들 함께 따라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동우는 우리 동지 기아차지부 조합원이다!”

이상욱 씨가 구호 선창을 하자 청중들이 “이동우는 우리 동지 기아차지부 조합원이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 결사 투쟁!”을 외친다.

“방금 외친 이 구호가 윤주형 개인의 주문이 돼버렸습니다. 왜 주문이 됐을까? 그게 어떤 의미일까? 왜 계속해서 이동우 동지 이름을 팔면서 돌아다니고 있는지 그 얘기를 들어봐야 될 거 같애요. 소상히 밝혀주십시오.”

사회자 이상욱 씨가 다시 윤주형 씨에게 질문을 던진다. 2012년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함께 서울에서 평택까지 걸었던 ‘희망뚜벅이’에서 처음 투쟁사업장 노동자들 앞에 나타난 윤주형 씨는 ‘희망광장’과 ‘공동투쟁단’에서 늘 “이동우는 우리 동지 기아차지부 조합원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기아차 2·3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인 이동우 씨는 노동조합으로부터 1차 하청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합원 자격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신분보장기금과 법률 지원도 받지 못했다. 윤주형 씨는 그가 외치는 그 구호에 대외적인 의미와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속에 있는 윤주형 개인의 마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다.

“현장에서 함께 투쟁했던, 투쟁해야할 동지와 함께 가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의무이이자 의리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장 안에는 일하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조합에 가입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입을 하겠다고 하는데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죠. 저희들이 복직을 하기 위해서라도 이동우 동지의 조합원 인정문제, 2.3차 하청 노동자, 계약직의 조합원 가입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노동조합에게 이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의 철학과 관점을 대변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통합 주장이 사측에게 이로움을 주고 투쟁했던 노동자에게 상처를 주었다

윤주형 씨가 속 이야기를 시작한다. 윤주형 씨가 이 구호를 외치게 된 계기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는 1사 1노조 조직통합을 목전에 두고 기아자동차지부와 기존 비정규직 노동조합인 금속노조 경기지부 비정규직지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던 때이다.

“08년에 조직통합을 목전에 두고...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폭력적으로 흡수한 것이죠. 저는 현장에서 함께 그룹에 속해있던 동지들과 조직통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현장 조합원들을 조직하기 위해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나름대로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를 제외한 세분의 동지는 이러한 방식의 조직통합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2005년 6월에 설립된 금속노조 경기지부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이하 ‘비정규직지회’)는 사내하청 노조 최초로 대중파업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다. 2007년에는 한-미FTA 저지 파업과 이랜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도 라인을 멈추고 참여했으며, 식당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여 이들의 노동3권을 따내는 성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비정규직지회는 2007년 임단협과 관련하여 원청의 교섭 참가 등을 요구하며 기아차 화성공장 도장공장에서 9일간의 점거 파업을 진행했다. 나는 그 당시에 소렌토와 스펙트라, 세라토가 한 대도 생산되지 않는 적막하고 어두운 기아차 공장 안을 걸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이렇게 투쟁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 파업과 관련하여 당시 지회장과 부지회장이었던 김수억·이동우 씨는 대법원에서 각각 2년 6개월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여 2011년에 출소했다.

기아자동차지부는 “모든 노동자는 하나의 노조에 가입한다”는 금속노조의 ‘1사 1조직’ 규약에 따라 1사 1조직을 추진하여 2008년 조직통합을 한다. 하지만, 제19대 기아자동차지부(김상구 지부장)는 조직 통합 이전에 비정규직의 파업권 보장과 2.3차 하청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 등에 관해 비정규직지회와 의견 조율이 안 된 상태에서 2007년부터 기존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을 직가입 시키는 등 비정규직지회의 세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조직통합을 진행하여 비정규직지회의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윤주형 씨는 그 당시에 조직통합이 잘 되지 않으니까 정규직 노조에서 비정규직 지회 조합원들을 직가입으로 빼가고, 사측 관리자와 현장의 비조합원들을 내세워서 마치 조직통합이 대세인양 선전을 해댔다는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가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싸움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정규직 노동조합이 아무리 관료화 되고 말아먹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나의 목소리로 싸움을 하면 조직통합 이후에 얼마든지 싸움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조직통합 이후 2012년 오늘에 와서 그것을 바라보면 완전한 패착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직통합을 주장했던 윤주형의 의사와 무관하게 윤주형의 주장이 사측에게 큰 이로움을 주었고, 현장에서 투쟁했던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콘티에 짠 질문 중에는 ‘어떻게 복직할건가요?’ 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사실 복직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청사진과 실천계획들이 있다기보다는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동지들에게 그중에 제 옆에 있는 이동우 동지에게 죄를 씻는 마음으로 빚을 갚는 마음으로.....”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정세와 노동> 2013년 2월호에도 수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