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박근혜와 이데올로기의 고속도로

[양규헌 칼럼] 허무와 좌절, 그 속에서 희망을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여론조작 당하는 노동자 민중

대선 전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여론조사가 밥 먹듯이 나오고 정치평론가란 사람들이 대선여론(종편에 출현해 종횡무진 얼굴을 내민 한 정치평론가는 200만 표차로 박근혜가 이긴다고 말했었다)을 확신을 갖고 말하는 이유의 근거가 무엇일까? 정치공학이란 게 있다고 들었지만 그것이 과학적인 잣대가 늘 먹히는 이공분야는 아니지 않는가. 즉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더군다나 이성과 감성과 오성과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이미 발견해낸 인간이라는 종족들의 사고는 간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여론조사는 개뻥으로 생각하기로 했었다.

혹시나 거대한 힘들이 여론조작(여론조작 당하는 인간을 설정하는 것도 기분 더럽게 나쁘다)을 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밑밥을 까는 행위라면 거대 모순의 끝자락 한 꺼풀이라도 물고 늘어질 심산으로 꼭 투표는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어쨌거나 내가 지지하던 노동자 후보가 대통령이 될 리 만무했지만 투표용지에 빨간 도장을 꾸욱 눌렀다. 그리고 칸을 세보며 혹시 다른 칸에 찍히진 않았는지 경계선에 걸쳐지지 않았는지 인주가 묻어나 무효표가 되진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자동인형처럼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었다. 내 이름이 기입되지 않는 저 투표용지가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어디일까.


중간에 누군가가 투표함을 바꿔치기 해도 내 이름이 없으니 확인해 볼 방법이 없는 거 아닌가. 갑자기 왜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려오는 걸까? 투표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평소의 신념대로라면 개의치 않았을 일인데 가슴엔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한 표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 절차가 가져온 행사가 자신들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할 것이다. 선출된 자가 악당이든, 머릿속이 텅 빈 깡통이든, 투표로 뽑힌 대통령의 권력행사에 복종할 것이다. 자신들이 주권자임에도 위임된 사람에게 저항할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일 것이다. 권력을 위임받은 자는 늘 주권자에게 감시를 당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보편적 인식임에도 불구하고 감시하기 보다는 사찰이라는 잣대로 우리가 감시당하고 있는 모순은 어찌할까.

그렇게 투표는 마감되었고, 대선은 원하지 않는 결과로 끝이 났다. 그리고 우리 사회 지역구도와 보수의식구조에 대한 의문점이 다 풀렸다. 그것은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새삼스런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야권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여권후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예측하는 여론조사는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 여러 번 회자했던 그 정보를 그냥 흘렸던 건 정권교체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였을 것이고 역사가 반동세력을 심판해주어 작은 정책의 변화나마 바랐던 마음이 컸던 탓일 것이다. 보수표로 응집되었던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원망이 가득 해져 네티즌들이 시작한 ‘노인 무임승차 반대 청원운동’에도 내심 마음이 쏠리는 얄팍한 감정이 스쳐가기도 했었다.

계급투표로 몰아간 선거 전략의 승리

여러 곳에서 진단하는 야권실패 원인은 이후 대안을 제시해주지는 못하는 사후 처방전일 뿐이다. 대표적인 것이 보수 언론 편향과 종편 때문에 졌다는 생각에 대안 언론 운동이 기민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48% 안에서의 유통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48%(나꼼수가 천만 다운로드라니 그 기준으로 보면 민주당 지지세력은 대충 천만으로 볼 수 있고 나머지 460만은 범진보나 안철수표 그리고 열심히 전화 돌려 설득한 표도 좀 섞여있다)는 민주진보세력의 견고한 콘크리트 지지층이 아니다. 그래서 새누리당 처럼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서서히 발전시켜나가는 작업에 도움은 되겠지만 전 국민을 향한 공정방송으로 자리 잡기에는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한계가 너무 많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방송이란 자본의 방송이기 때문에 경쟁력도 한참 못 미칠 것이다.

콘텐츠로 승부를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본의 헤게모니와 그것에 결합된 자본주의 민중을 너무 순진하게 보는 것이다. 어쨌든 모든 재능과 다수의 노력을 투자해도 영상이 진화된 팟캐스트 방송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언론과 방송의 해직기자가 해고노동자로 싸워나가는 길밖에 없는데 그것마저도 계급성의 부재와 동력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이 이명박근혜의 언론장악을 말하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얘길 하냐고 오히려 핀잔을 들어야하는 현실이니 양식을 가진 언론노동자들만 피로해지는 상황이다. 이처럼 편향언론, 지역주의, 50대 보수표, 종북 이정희, 세대 전쟁, 민주당 리더십부재, 친노 패권주의, 부실한 야권 단일화 등 여러 가지 실패의 진단이 나오고 일부분 맞기도 하겠지만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분석엔 못 미치지 않나 생각한다. 그것은 새누리당의 승리 요인을 분석해 보면 그것의 근본 요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분단이 상수인 한국사회의 헤게모니는 자본

위에 열거한 이유를 잘 보면 거의 대부분 보수 세력이 주도한 이데올로기와 정세에 관계가 있다. 민주당 리더십 부재조차도 그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우리나라 보수 세력의 헤게모니란 반공이데올로기와 박정희 성장신화가 그 토대이다. 그것은 경상도지방과 조선일보를 비롯한 90%이상 보수신문들과 종편을 비롯한 새로운 미디어지형의 변화와 포털의 필터링(국가기관이 댓글알바를 동원하기도 한다)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보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제국에 접어 든 형국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엄지족이니 하며 스마트폰 혁명을 부르짖던 것이 이제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인터넷도 이젠 여론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할 만큼 조작을 많이 하고 댓글알바가 너무 많아 건강한 여론 형성을 방해한다.

새누리당이 매일 종북이니 빨갱이니 들먹이니 무지 낡은 포지션을 우려먹는 것 같지만 분단이 상수인 우리나라에선 보수세력의 헤게모니에 엄연한 힘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것에 포섭되는 사람들이 아직도 과반수를 차지한다. 그들의 주권행사가 보수정권을 만들어내는 헤게모니주도 세력인 것이다. 새누리당은 북한이 지상에 존재하고 통일 무드가 조성되지 않는 한 그 카드를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다. 새누리당이 시체당이 된다 해도 스스로 기득권을 챙겨주는 자본과 경상도와 조선일보가 있는 한 변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유구한 우리의 근현대가 자랑스럽게 구축해온 토대가 아닌가. 산업화를 위해 일본이 철도를 놓아주고, 박정희가 고속도로를 깔았다고 말하듯이 우리나라 보수 세력은 영구집권을 위해 지금도 이데올로기 고속도로를 매순간 치밀하고 집요하게 깔고 있다. 대통합을 외치는 당선인이 민생을 외치면서도 극우막말 논객과 뉴라이트 인사를 인수위의 중심에 두는 것을 보라. 무능한 민주당이나 안일한 진보당이 아무리 소리쳐도 박근혜는 꿈쩍하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그의 인사스타일에 관여하지 말고 민주당이나 진보당들은 자신의 리더십을 재발명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압사당한 민주주의라도 일으켜 세우는데 정신을 다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50~60년 전에 위력을 발휘한 반공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죽지 않고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를 살렸다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민생을 외치니 정말 민간희생을 막고 경제가 막 무럭무럭 성장할 것을 사람들은 절실히 믿고 싶어서 표를 주었을 지도 모르겠다. 놀라운 것은 이미 낡은 냉전사고식 이데올로기로도 자본주의 체제의 인민을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뼛속깊이 알고 있는 그 계급주의적 사고였다는 것이다.


외신들도 독재자의 딸로 명명하긴 하지만 그녀가 왜 선거의 여왕이 되었는지는 신기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첩에 적어놓은 것 외에 논리적인 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가 정치철학도 없어 보이고 내용 없는 말을 반복하거나 말이 장황하다는 등의 특징을 외신기자들까지도 다 알고 있었는데 이런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는 게 놀라웠을 것이다. 이렇게 부실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은 멘붕이 문제가 아니라 부정투표라고 선언하고 투표결과를 뒤집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구조적으로 모든 시스템이 여권에 유리한 구도로 짜여 있어 부정한 투표였단 의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 승리의 확실한 지점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과학적인 통찰과 그것으로 인한 계급투표 선거전략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박근혜가 얻은 보수표는 반공이데올로기(경상도지역, 세대를 넘는 보수표)에 더한 자본가 계급에 기반한 계급투표였다. 지역투표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계급투표를 하는 곳은 강남을 비롯한 부자들이 사는 동네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계급투표를 하긴 하는데 자기계급의 이익에 어긋나는 투표를 함으로서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주는 불안정노동자와 소외계층과 빈민 일부가 있으며 이들도 보수표로 흡수된다. 미국도 공화당을 지지하는 세력이 부자와 빈민의 연합이라니 동양의 미국인 한국이 그걸 따라가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정도 포석이라면 박근혜가 당연히 이기고도 남는 게임이 아닌가. 기본 천만을 가져가는 경상도 인구와, 벌어지는 양극화로 인한 빈곤의 잉여 인간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부자 인척해야 긍지가 살아나는 자본긍지의 나라 강남 사람들. 그래서 나온 선거 전략이 빨간 목도리, 태극기, 가계부채 민생, 돈 순환 경제민주화, 선별적 복지 등이었고 그것은 보수표를 흡수하기에 충분한 미끼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계급 일부가 자본가계급의 정치에 합류하는 현상은 우리들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어설픈 진보프레임

상황이 이러했는데. 과거사, 민주주의 역진화나 정권교체를 부르짖은 민주당과 진보당은 노란 깃발과 바람개비만 흔들어 댄 꼴이었다. 거기에 처절한 계급적인식이나 뼈아픈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은 보이지 않았다. 자유주의 집단정도가 모여 한마당 축제를 벌인 듯한 느낌이었다. 민주당에 빌붙은 진보당과 노동운동 출신들은 투쟁하는 노동자와 연대하여 싸우지도 않았고, 민주당은 독재와 싸워 얻은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전리품정도로만 인식하며 스스로가 진보가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명박이 민간독재라고 인식한 국민이 과반수도 안 되는데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니 먹힐 리 만무했다. 절실한 민주주의 회복 외침은 친노 폐족의 프레임에 갇혀 민주주의 세력(민주화는 민주당 정권만이 이룩한 게 아니다)은 무능한 수권세력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보수 세력과 그들이 짠 프레임에 걸려 방어하는 선거전을 치렀다는 것은 힘이 약해서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의 신분이 어설픈 진보로 갈무리하는 과정이 서툴렀고 뚜렷한 계급적 이미지조차도 상실했기 때문에 치열함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자신의 계급적 기반에서 치열하게 대처했는데 야권과 문재인은 자신의 계급적 기반에 서는 전략과 헤게모니를 구축하지 못했다. 물론 문재인은 안철수를 밀어낸 세력들의 헤게모니가 있긴 있었다. 노사모를 통해 구축이 된 세력으로서 일종의 극성스런 팬덤 문화 그룹인데 그들은 똘똘 뭉쳐있긴 하지만 계급성을 갖고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굳이 계급성을 분석한다면 민주당 역시도 자본가계급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자의든 타의든 진보의 딱지를 붙였으니 따지고 보면 진보도 보수도 아닌 어정쩡한 구도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다. 즉 박근혜의 헤게모니가 50년 걸려서 만들어진 거라면 노사모의 헤게모니는 10년이다. 무엇이 더 견고하겠는가. 박근혜 콘크리트 지지율은 그 헤게모니를 유지해온 세월의 시간이라고 보면 노사모는 아직 턱도 없는 것이며 계급적 입장도, 설득력도 없는 진보를 우기고 있다. 객관적으로 뒤쳐진 지지율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전략이 없었고 오로지 정권교체만을 주장한 게 주요전략으로 보여 진다. 정권교체는 문재인의 집권을 표현한 것인데 여론에서 밀리는 지지율이 정세에 변화를 가져올 기획이 없는데 반전한다는 건 요행이 아닐까.

이글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처음엔 인간의 개인 심리는 오묘해서 정치공학이라는 잣대로 쉽게 재단이 되는 게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치적 심리는 개인 심리가 아니고 계급적인 심리이며 계급심리는 정치가 만들어내기도 하고 또 주권을 행사해서 새로운 정치를 창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경상도를 만들기도 하고 경상도가 조선일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낸 것은 미디어이기도 하고 소외된 민심의 소리이기도 하며 기성정치에 환멸을 느낀 자들의 기성정치 불신의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안철수가 자본가계급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투쟁은 노동자 민중의 정치학교인 동시에 우리의 희망이다

박근혜 방식을 선호하진 않지만 저인망식 만남과 교류는 노동자계급정치의 핵심일 수 있다. 박근혜가 유세방식을 통해 숱한 사람을 만나 자신의 계급적 입장을 당당하게 주장하듯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노동자 민중은 투쟁의 공간을 벗어나 만나고 토론할 여유를 찾기 어렵다. 때문에 자본주의 모순이 대립하는 투쟁현장을 통해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과 함께 연대하며 노동자계급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고, 결의를 모아 함께 투쟁하는 과정이 노동자계급 정치에 대한 내일을 열어가는 출발일 것이다. 이번 대선을 통해 김소연 선투본이 투쟁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노동자계급의 정치력을 복원하려면 정세의 역동성에 신뢰를 가져야하고, 퇴조정세를 고양정세로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투쟁의 격화가 필연이기에 노동자계급은 투쟁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투쟁을 통한 노동자연대, 민중연대와 투쟁공간을 매개로 하는 방식이 아니면 자본과 권력이 쳐 놓은 그물망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고 새로운 민중권력을 만들어내는 헤게모니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은, 정세에 파열구를 내지 않고 급격한 정세변화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역과 현장으로부터의 투쟁이 확장되지 않는다면 변혁 또한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며 민주노총의 배타적지지로 빚어지는 대리정치가 만연하는 이상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자유주의자들의 안주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권력은 늘 노동자계급의 주위를 배회하지만 붙잡는 위력이 미약하여 잡지 못할 뿐이다. 시선을 지상에 둔 채 천국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벤야민의 천사처럼 혁명의 순간은 아주 옛날부터 우리 곁에 충만해 있었다. 쓸쓸한 얼굴을 지상에 향한 채 몸은 저 멀리 날아가는 변혁을 속수무책으로 보지만 않으려면 작게라도 모여서 투쟁을 기획하고 대오를 확장하여 결의를 모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노동자, 민중권력을 향한, 반자본주의를 향한, 새로운 사회를 열어 가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을 건설해야한다. 노동자의 계급적 투쟁으로 현 정세를 돌파하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했던 모든 동지들이 새로운 결단으로 계급정당건설이라는 목표로 힘찬 새해를 맞이하자.
  • 진실

    이번 대선 부정선거 입니다.
    부정선거는 과학적으로 개표의 정의가 개표소에 의하지 않습니다.
    개표방송은 조작입니다.
    선관위보다 21시 박근혜가 30만표 앞선 개표방송(SBS) 입니다.그렇다면 출구조사를 같이했던 방송3사는 국민의 민주주의 적입니다.
    국민들은 방송3사의 출구조사와 개표방송으로 울고 웃는일이 발생했죠

    많은 투개표에서 참관인 보다 1명의 참관인이 깨어 있었던 점,그리고 지금 그분이 불법의 민주주의 적들 서초구 선관위에 온갖 압박을 받고 있답니다.

  • 보스코프스키

    분단이 상수라? 이건 한국일보의 강준만 칼럼에서도 오히려 보수에게만 유리하지 않은 작용이라고 지적했는데 오히려 강준만 같은 자유파보다 못한 지적을 하시다니 실망입니다. 도리어 상수 - 이건 결정론적인 냄새가 있어 거부합니다만! - 라면 중층적인 대외 의존구조때문이 아닐까요?
    가령 다수의 식량의 의존율이 높다든가 하는 것 말이죠.

  • 보스코프스키

    강준만이 예전 한국일보에서 언급한 어구는 아래와 같습니다. 동어반복이긴 합니다만 이 정도는 일독하신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요? 어차피 대외 의존과 대내 편중현상을 소멸을 포함해서 감소케 하기 위한 주의의 진지전을 요하는 것은 절실한 당연한 사실인데 왜 이미 밝혀 놓고도 같은 이야기는 계속 나오니 참 궁금하군요.
    하긴 '가난한 자는 왜 ... '도 이미 가난한 자들의 표는 투표장 밖 - 이번대선도 1/4가까이는 여기에도 해당 - 에서 사장당하는 구조 폭로도 있었는데 이것도 별 반영을 안 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남북 정상회담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치솟은 게 잘 말해주듯이, 남북분단은 꼭 보수의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하자.

    출처 원문 - 한국일보 기사 가난한 자는 왜 ... 입니다. ...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10/h2007101618004924390.htm

    http://blog.aladin.co.kr/mramor/1633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