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저녁 7시 대구시민센터에서 열린 <진보정당 15년의 평가> 토론회 사회를 맡은 대구진보포럼의 박종하(녹색당) 씨의 말이다.
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지금 야권단일화는 단골 메뉴다. 후보가 여럿 출마했지만 진보정당 후보가 낄 자리는 많지 않아 보인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 10명 배출,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 등 진보정당은 그간 많은 질곡을 겪었다. 대구진보포럼은 민주노동당을 비롯해 진보정당운동에 몸담았던 이들이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와 역할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대구진보포럼을 기획한 양희(진보정의당)씨는 “당 이름은 달라도 대구지역에서만이라도 공통점을 찾아가면 진보정당의 역할이 있지 않겠나. 무엇인가 정해놓고 시작하기보다 열어놓고 토론을 하고 받아들이겠다”며 토론회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대구진보포럼은 15년의 과정을 진보정당운동 밖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자 3인의 ‘강연자’를 초청했다.
[출처: 뉴스민] |
백창욱, “회개하지 않는 진보정당. 현장과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첫 번째 강연자로 백창욱 대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대표가 나섰다. 백창욱 대표는 현장을 놓지 않는 진보정당,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진보정당을 강조했다.
백창욱 대표는 “진보정당의 역할은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되려 시민을 무시하기 때문에 진보정당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며 “주민을 매수해 토론 한 번 없이 박수라는 만장일치로 해군기지를 유치하도록 한 강정 싸움에 주목해야 한다”며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백창욱 대표는 “평화와 민주주의에 맞서 싸우는 강정마을을 보면서 새누리당이 뻔뻔하게 나쁜 당이라면 민주당은 얍삽하게 나쁜 당”이라고 지적하며 “거리에 나가서 민주당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다 선거철만 되면 제1야당 프리미엄을 누린다. 현장을 무시하는 정당이 존재 가치가 있는가. 하지만 진보정당도 다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어 “3월 5일 구럼비 발파 들어가고 강정 사업단 앞에 민주당, 진보정당 사람이 결합해 현장공사가 진행되지 못하게 막았다. 그런데 총선 끝나고 나니 완벽하게 빠져 나가더라. 100명만 있으면 막을 수 있다. 진보정당이 그 몫을 해야 하는데 통진당 사태 터지고 나니 실천해야 할 일에 신경을 못 쓰더라”고 말했다.
대구새민족교회 목사인 백창욱 대표는 기존 체제를 극복하고자 한 예수운동을 예로 들며 진보정당의 ‘회개’를 강조했다.
백창욱 대표는 “통진당이 참여당이랑 합당한 가장 큰 이유는 외연확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의회진출이 해결책이라면 끝까지 사수를 하던지, 아니면 당을 해체하고 기층으로 하방을 하던지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도 당 만드는 작업만 하고 있다”며 “진보정당도 보수정당처럼 당권 싸움만 하고 있다. 초기 예수운동처럼 회개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또 “2008년 분당, 올해 통진당 사태 봤을 때 대구지역과 무관하다. 투표조작 진원지도 아니고. 그런데 분열이 일어나면 똑같이 일어난다. 중앙의 어느 세력과 커넥션 내지는 카르텔만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백창욱 목사는 “진보정치판도 속 시원히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답은 현장에 있다. 인민을 섬기고 대상화하지 말라”는 일침을 가하며 강연을 마무리 지었다.
이득재, “중앙권력 획득에만 목을 맸다. 지방사회주의 실험 필요”
이어 민중행동 공동대표인 이득재(대구가톨릭대 러시아어과) 교수가 진보정당운동을 비판했다. 발표에 앞서 그는 ‘진보’와 ‘좌파’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득재 교수는 “1997년 국민승리21로 등장한 진보정당은 2012년 대선 시기에 기존 정당과 무관한 안철수가 등장하면서 그 존재감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상태”라고 분석하며 “83년 전두환 정권의 유화조치 발표 이후 시작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진보정당 운동은 위기가 아니라 소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 위기를 지적하며 “2013~14년을 지나면서 신자유주의적 금융팽창 국면으로 2013년을 변곡점으로 세계대공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며 “국내외의 체제 변화와 세계사적인 변화를 염두에 두고 진보운동의 제3 순환, 진보진영과 좌파진영의 이념과 운동이 장기적으로 배치되어야한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이득재 교수는 “영화 <돼지의 왕>을 보면 ‘돼지는 끊임없이 먹으면서 자기 살을 불리려고 한다. 그런데 그 살이 자기 살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진보정당의 살은 노동자민중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의석수를 늘리거나 당원수를 늘리는 비대화 작업이 운동을 질곡시켰다. 진보정당과 민주노총이 현장에 없다면 아무 필요가 없다. 노동자를 나눠 먹기 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진보정당의 역사를 평가했다.
이득재 교수의 비판과 진단은 앞선 백창욱 대표와 궤를 같이했다. 그 내용은 현장과 더불어 중앙에 종속되지 않는 지역의 중요성 강조였다.
이득재 교수는 “중앙권력 획득에만 목 맬 것이 아니라 대구지역의 지자체라는 권력을 잡기 위한 사회운동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80년대 현장으로 하방운동에 들어갔듯이 하방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면서 “지방사회주의를 실험한 영국의 ‘런던 코뮌’ 모델을 진보정당을 꿈꾸던 이들이 실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득재 교수는 “10년을 다시 내다보고 진지를 구축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진보정당이 지자체부터 변화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나가고 노동운동이 정치에 종속당하지 않은 채 제 역할을 해 나가는 운동의 분업과 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금수, “진보정당 성과 있다. 연대연합과 독자정치 유연성 필요”
앞선 두 강연자가 현장실천을 강조했다면 세 번째 강연자로 나선 강금수 체인지대구 팀장은 개혁진영과의 연대연합과 진보정당의 독자실천 사이의 유연성을 진보정당운동의 과제로 꼽았다.
강금수 팀장은 “지금 무상급식과 무상의료 같은 복지의제는 과거 진보정당이 만들었던 것이다. 정작 그 주도세력은 소외됐지만 진보의제를 선도한 성과가 있었다”며 진보정당운동의 유의미성을 밝히면서 “하지만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분열은 패권주의의 문제였다. 진보정치에 합리적 민주주의가 빠져있었다”고 비판했다.
강금수 팀장은 “유시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했을 때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찼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개혁세력을 양심고백시키고 진보정당에 품은 것도 진보정치의 성과였다”며 “한국사회는 보수, 자유주의, 진보 진영이 삼분해야 한다. 2012년에 기회가 왔다. 민주연립정부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통진당 사태를 겪으며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강금수 팀장은 “앞서 의석수 늘리기를 비판했지만, 대의정치에 뛰어든 이상 의석수 늘리기는 중요하다. 이를 위해 현장의 고통과 연대해야 한다. 필요할 때 타협하고 유연함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정치”라고 강조하며 “선거정치와 무관하게 자기 정치를 할 수는 없다. 진보정당운동이 일정한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 고립시키는 근본주의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는 “독자성이 나쁜 것이 아니라 연대연합과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민주당과 새누리당 차이보다 민주당과 진보정당 차이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며 “진보정당은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그 정도라면 연합정치에 대한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강금수 팀장은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며 진보정당이 여론에 민감하고 책임정치를 할 자세가 부족했다고 본다. 이로 인해 진보정치가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 재등장하기까지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졌다”며 “대중의 현재적 삶을 조금만이라도 바꾸고자 한다면 정권교체 해야 한다. 정권교체 요구를 무시해선 안 된다. 진보정치는 유연성과 독자성을 갖춘 심상정 후보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보정치의 쟁점들
강연이 끝난 후 참석자들의 자유로운 토론이 이어졌다.
통진당 사태의 후유증으로 이들을 지나치게 배제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강금수 팀장은 “통진당 문제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물리적 폭력사태가 없었다고 해도 진행 과정 전체가 폭력이었다. 이것을 지켜본 대중의 신뢰회복은 쉽지 않다. 반성과 변화 모습을 보이고 국민이 인정해 나가기 전까지는 진보정치에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양희 씨도 “폭력이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용납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표를 얻고자 인정받는 사람들한테 용납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배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했다. 더 많은 선택을 받으면 진보정당으로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대연합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오갔다. 민주당과의 연대연합을 주요하게 둔다면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말에 강신우(진보정의당) 씨는 “연대연합은 한쪽에 권력을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분점하는 것이다. 무상의료, 무상급식이 2004년 있었고 지금 강제하고 있다. 이처럼 경제민주화 운동, 경제적 토대에 대한 문제에서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강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득재 교수는 “지역의 수성주민광장 같은 풀뿌리 조직이 상당히 많아져야 한다. 자본주의 진영은 조직이 많은데, 진보와 좌파는 조직이 없다. 그것과 맞설 수 있는 결사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강금수 팀장은 “정치의 과잉으로 운동이 약화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시민운동을 하며 느낀 건 반복적으로 외치다가 정치에 반영이 안 되면 조금 더 과격한 전투가 나타났다가 힘을 잃어버리더라. 지금 현재 국면은 정치가 강화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사회운동과 현장만 집중하라고 하는 것인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토론회는 백창욱 대표의 “화려한 미사여구와 담론이 넘쳐나지만, 현장의 투쟁과 목소리는 여전하다. 그곳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됐다.
대구진보포럼은 이번 토론회를 시작으로 당적과 무관하게 대구지역 진보운동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는 이원준, 김성년 진보정의당 대구시당 공동위원장, 이형석 녹색당 대구시당 공동운영위원장, 정용태 대구주거연합 대표, 김헌주 경산이주노동자센터 소장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기사제휴=뉴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