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
역사의 기록이 전하는 팩트가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거나 반박이 되기도 하는 것은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일만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의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언제든지 역사는 새롭게 만들어 지기도 한다. 18대 대선은 유독 역사관이나 과거사 문제로 국민들로 하여금 역사공부를 다시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독재자의 딸이 여당의 대선 후보가 되고 참여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이 야당의 대선후보가 되어있는 구도 속에선 과거 권력의 아바타 대결이 어느 정도는 있을 수도 있겠다고 예견된 일이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 프레임을 내세워 이슈를 선점하던 사람이, 공익을 내세워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는 집요한 욕망 뒤에 철저하게 사익추구(아버지의 명예회복)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요즘은 다행이도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요새에 균열이 생겨 대선 판도가 마구 요동치고 있다. 그 시작점이 ‘누군가의 교과서 새로쓰기’의 욕망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소수파의 군주 광해, 그냥 권위주의적인 절대 권력의 왕일 뿐
사료 속에서 전해지는 광해군이 연산군 같은 부정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그냥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왕이 왕으로 전해지지 못하고 군으로 전락되어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뭔가 간단치 않은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왕으로 새로운 주목을 받은 건 노무현과 관련한 일들이 겹치는 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새로운 해석자와 만나는 대중이나 지지자의 욕망은 단견적이거나 단선적인 건 아니다. 노무현의 비극을 역사적인 사건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은 이해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노무현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사람들 가슴에 눈물을 남겼다.
기득권 권력에게 대항하다 실각하게 되는 비운의 개혁군주, 명에 대한 사대외교를 거부하고 중립외교로 자주, 백성을 위한 실리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대동법으로 민중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소수파의 군주이미지에 노무현 가치는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질서를 완성시켰고, 노동자, 민중을 위한 대통령이라기보다는 탄압한 대통령이었고 중립외교를 표방했지만 미국에 편중된 그간의 의식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민족공조를 깨뜨리는 대북특검을 수용해 통일 민심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광해가 악질 폭군이고 궁궐 토목공사로 민중을 착취한 삽질 왕이었다는 견해는 광해 왕을 광해군으로 전락시킨 반대파(승자의 관점)들의 악의적인 기록이니 새롭게 광해를 해석해보자는 생각은 한번 쯤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 입장에서는 광해 또한 그냥 권위주의적인 절대 권력의 왕이었을 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동법도 양반에게 더 유리한 세제개혁이었으니 백성을 위한 실제 정치를 제대로 했을지는 의문이 든다.
어쨌든 ‘광해의 새로쓰기 영화’라면 노무현을 떠올릴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노빠들은 그렇게도 말한다. 노무현, 문재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문재인이 광해, 왕이 된 남자처럼 그런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실은 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감독조차도 전혀 의도치 않은 일로, 지금의 대선 판에서 다른 신드롬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안철수 현상으로 읽혀진다. 실제적으로 사람들은 영화 광해를 보면서 안철수를 가장 많이 떠올렸다고 한다. 감독도 왜 그런지 모른다고 말했단다.
사람들은 왜 노무현이나 문재인보다 안철수를 떠올린 것일까? 그것은 두 사람의 광해가 나오는 설정 때문이다. 진짜 왕과 가짜 왕으로 한사람의 광해를 갈라놓는 설정은 그 안에 많은 프레임을 대입시키고 비교를 해보게 한다. 진짜 광해와 가짜 광해는 기득권 권력의 활력 없는 이미지 대 초짜 왕의 펄떡거리는 활력, 기득권의 사익추구와 민중을 위한 진정한 정치의 구도, 현실정치의 낡음과 미래정치의 새로운 구도 등 각자가 상상 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틀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왕이나 대통령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게 한다. 그 자연스런 무의식의 작용 속에서 떠오르는 친애하는 왕의 모습의 공통분모가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의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 문재인 후보는 9월 17일노동계와 경제단체 대표들 등을 초청해 ‘일자리 혁명을 만드는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며 일자리 간담회를 열고, 노사민정 일자리 대타협을 강조했다. |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개혁(해체)이 아니라 노동권 보장이다
대선 후보들이 제시하는 이슈들이 광해를 두 개로 갈라놓는 프레임에 겹쳐지면서 가짜 왕이 진짜 왕보다 더 올바른 왕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허균의 홍길동전 이미지를 안철수 현상이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안철수 현상은 스스로 또는 국민의 여망을 등에 업고 영화나 각종 미디어 매체, 현장에서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지금 새누리당의 안철수에 대한 공격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어넘길 것 같다. ‘정치 경험이 없다’, ‘정책이 유치하다’, ‘깨끗한 척 해도 할 짓은 다 했다’는 둥, 가짜 왕의 등극에 당황하는 기색들이 역력하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왕이든, 가짜 왕이든 진짜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유력 대선주자 모두 공약을 발표하고, 공약 속에 담겨진 정책은 대선을 앞둔 인기몰이용일 뿐, 그 이상의 진정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사회모순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구조적 접근이 없음으로 그들의 정치에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나같이 경제민주화를 내 세우고 있으며 그 내용은 재벌, 금융, 경제혁신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라고 주장하지만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일 뿐이다. 그 중 안철수는 구체적 과제로 노동혁신과 일자리 창출을 제시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서 비롯된 불안정노동에 대한 대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근본적 처방은 재벌에 대한 개혁을 말하기에 앞서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경제민주화 이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과 태도 없이 떠들어대는 경제민주화는 그들(자본)만의 리그에서 약간 룰을 바꿔본다는 의미이다.
앞으로 남은 대선 기간 안에 각 진영의 대선 주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듯한 드라마와 영화가 몇 편 기획되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다양한 정치색을 지닌 영화들 중, 박정희, 육영수에 대한 영화에 대한 영화도 예정되었다고 하니 그들의 능력은 돈으로 밀어붙이는 장점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우리는 이명박 정권하에서 시계가 거꾸로 가는듯한 현장을 여러 부문에서 목격하면서 시대의 반동을 살아왔다.
영화, 문화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권의 입맛에 맞춰 사찰을 하며 자유주의세력을 좌파로 낙인을 찍거나 해서 지원을 끊었고. 보수수구에게 지원한 영화나 그 사람들이 만든 영화는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아 스스로 자멸하는 꼴을 겪기도 했다.
반MB전선을 빗대, 영혼도 팔아넘기는 작태
김대중 노무현 10년의 신자유주의 정권은 노동자와 젊은이들의 패기를 잠식해 들어간 과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의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짓기를 마다하지 않아왔다.
그렇지만 마냥 신자유주의 노선에 노출된 개죽 신세로 전락하지 않은 부분은 문화 콘텐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새로움이 있어야 시장에선 상품으로 인정받아 살아남지만, 예술 작품은 시장의 원리보다 예술의식의 원리로 진보적인 경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영화 시장의 선진성과 예술의 원리가 만나 진화해온 것이 대중에게 지속적이고도 긍정적인 차원의 눈을 갖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시대의 반동’에 공감을 표시하는 사이, 가짜 진보정치에게 엄청난 명분을 부여했다. 반이명박 전선이 현재의 구호나 의제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에 대한 슬로건으로 재구성됨으로써 박근혜에 동조하지 않으면 어떤 정치적 행보도 허용되는 듯한 상상이 실천적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에 앞장서 왔고, 민주노동당 대표, 대변인을 하던 자들이 문재인 캠프에 몸을 담았다. 기자회견을 통해 “‘진보정치에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정권교체에 집중’하기 위해 참여했을 뿐, 입당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그들의 논리에서 진보정치의 천박성이 돋보인다.
진정한 정권교체는 한 번도 없었다
진보정치에 책임을 느낀다면 진보정치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하는 거 아닌가. 민주대연합과 정권교체의 주장들이 김영삼에서 김대중,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동했으나 노동자, 민중의 삶의 질에는 어떤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고 정착시켜 노동자, 민중을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었을 뿐이다. 지금 그들이 강조하는 정권교체는 이명박에서 문재인으로 권력이 바뀌어야 한다는 논리일 것이고 이렇게 바뀌는 상황을 진보의 가치라고 억지를 부릴지 모른다. 그러나 노동자 입장에서 봤을 때, 진보정치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 정권교체라고 하기 보다는 ‘권력이동’, ‘자리바꾸기’라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린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차이가 별반 없고, 노동자계급을 분할 통치하고 억압하는데 있어서 정책과 입장과 태도가 같은 집단끼리의 권력이 바뀌는 현상을 ‘정권교체’라고 강조하는 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진보정치의 출발은 '노동자, 민중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킨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으며, 진보정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무한한 투쟁을 통해 진보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변화의 합법칙성’에 따라 모순에 대해 투쟁하고 다수가 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확장시키기 위해 세상을 바꾸는 전략으로 싸워나가는 것이 진보정치의 가치이다. ‘노동자계급의 잃어버린 10년’ 속엔 노동자 민중의 처절한 삶의 몸부림이 그대로 담겨있다. 현장에서 쫓겨나 6-7년 동안 길거리에 내 팽개쳐진 노동자들, 24번째 죽음을 멈추고자 단식투쟁으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노동자들을 만들어 낸 세력이 누군지 애써 모른척하며 문재인 캠프로 당당히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썩어 허우적거리는 노동자 영혼이 감지된다.
진짜 왕이든, 가짜 왕이든 노동자의 왕이 아니며 진보정치의 대리인도 아니다. 가짜 왕에게 줄을 선다고 계급정치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는다. ‘정권교체를 위해’라는 주장은 17년 전 김문수의 ‘민정당’ 행과 맥을 같이하며 노동계급의 색체를 탈색하기 위한 유치한 변명일 뿐이다.
진보정치, 노동자계급 정치의 관점에서 한국정치사에 진정한 정권교체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민주대연합, 반MB, 의미 없는 정권교체라는 주장으로 개인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팔아먹지 말고 자신의 부패된 영혼을 노동자 영혼이라고 말하지 마라. 찬란한 노동자계급의 영혼을 썩은 영혼과 혼합하고 호도하는 것은 지배권력의 짓거리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