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
서울 핵안보정상회의가 지난 3월 26, 27일 열렸다. 정부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은 정상들이 모인 회의’라고 선전하지만 실상 그 회의가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성과를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지금이 쌍팔년도인가?
대신 회의장 주변은 높이 2m, 길이 1570m의 담장형 펜스로 차단되었고, 주변 도로에는 높이 2.2m, 길이 1882m의 철제 펜스까지 설치되었다. 말이 ‘자발적인 차량운행 2부제’이지 심히 쌍팔년도 올림픽 때를 생각나게 하는 요란스러움에, 외국 정상들을 볼 수 있는 주택과 아파트 등지에 옥상 이용을 자제하고 창문을 열지 말라는 공문을 보내는 뻔뻔함까지 추가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핵안보정상회의가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전부터 회의장 주변의 노점상은 철거되었고, 강남경찰서는 핵안보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노숙자풍’의 사람들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치안대책을 내놓아 많은 이들의 질타를 받았다.
핵테러를 막고, 핵물질을 안전하게 관리해 인류의 평화적인 생존을 보장하겠다는 핵안보정상회의가 실상 그 생존을 보장받아야 할 사람들의 생존권, 기본적인 권리를 짓밟는 역설. 그것은 핵안보정상회의가 내놓은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핵안보가 무엇이길래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핵 테러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테러리스트가 납치한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아니라 핵발전소에 충돌한다면, 혹은 핵물질을 싣고 민간인 거주 지역으로 돌진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도 힘든 만큼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공포가 자랐다. 때문에 애초 핵 연료봉이나 핵폐기물의 안전한 이동과 관리라는 내용으로 출발한 ‘핵안보’라는 개념이, 핵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나 핵물질의 탈취에 대응하는 문제로 변하게 된다.
결국 핵안보정상회의가 말하는 핵안보는 ‘핵테러로부터의 안보’를 의미한다. 즉 테러 집단이 핵무기나 핵물질을 확보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막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핵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핵물질을 최소화하고 핵시설의 안전을 강화하는 것이 핵안보정상회의가 말하는 핵안보의 중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소문 난 잔치, 먹을 것 없다더니
정부는 이번 핵안보정상회의가 2010년 워싱턴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 말해왔다. 그러나 그리 호들갑을 떨면서 진행한 정상회의의 결과를 보면, 이렇게 많은 정상들이 모여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수준이다.
정부는 현재 전 세계에는 12만 개가 넘는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과 우라늄이 산재해 있다면서, 이러한 물질을 줄이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번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정상성명(서울 코뮤니케)을 보자.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고농축우라늄을 최소화하기 위한 계획을 2013년 말까지 자발적으로 제시하도록 권고하고 있을 뿐, 어떠한 강제조치도 없다. 워싱턴 정상회의에서 언급된 수준과 별다를 바 없다.
또한 서울 코뮤니케에서는 ‘개정 핵물질방호협약’을 2014년까지 발효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핵물질 관리에 관해서 유일하게 법적 강제력을 지니는 핵물질방호협약은 2005년에 협약 적용 대상을 핵시설 전반으로 확대하는 개정안이 채택되었지만, 현재 협약 당사국인 145개국 중 55개 나라만이 비준한 상태로, 발효를 위한 97개국 비준동의에 훨씬 못 미친다.
이명박 대통령은 순진한 건가, 거짓말쟁이인가
핵안보정상회의가 끝나고 열린 의장 기자회견에서 개별 국가들이 핵물질을 감축하는 실질적인 방안을 준비하고 있는지,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절차나 강제방안이 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명박 대통령은 ‘감축은 강제로 하게 되면 속일 수가 있다’며,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사람들은 감독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더불어 ‘이번 회의에 모인 정상들이 핵테러의 위협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말자고 굳세게 다짐했다’면서 세계 정상들의 선한 의지를 강조했다.
지금껏 핵무기 감축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선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인가. 전 인류를 수십 번 멸망시킬 핵무기가 아직도 존재하고, 공공연하게 핵무기 선제공격이 거론되는 현실은 그들의 선한 의지와는 무관한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정말로 각국의 ‘선한 의지’를 믿는다면 그건 순진한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핵안보정상회의의 성과를 부풀리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핵안보정상회의가 실제 노리는 것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
첫째는 핵테러 방지를 위한 대응책 마련이다. 이번 회의에서 미국은 2012년 말 ‘핵안보에 관한 국제 규제자 회의’를 처음으로 개최하겠다고 밝혔고, 프랑스는 2012년 중에 UN 안보리 결의안 1540호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안보리 결의안 1540호는 모든 회원국이 핵무기 확산 방지와 수출 통제를 위한 법률 마련과 집행을 의무화하고 있다. 때문에 결의안 1540호는 국제법적 근거가 없어 이른바 ‘깡패짓’이라 비판받아 왔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를 우회적으로 정당화한다. 핵테러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테러의 빌미를 제공하는 핵물질의 제거가 아니라 군사적 대응을 우선시하고, 결국 이를 통해 군사력 증강과 투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핵발전을 확대하는 노력이다. 이번 핵안보정상회의에서는 부대 행사로 ‘핵산업계 회의’(원자력 인더스트리 서밋)가 3월 23일에 열렸다. 핵 산업계 수장들 200여 명이 모인 이 회의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발전소 안전과 핵안보를 주요 의제로 다뤘다. 지금도 진행 중인 후쿠시마 사고의 참상에서 알 수 있듯 핵발전소의 안전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나 이들이 논의하는 것은 안전 조치를 강화해 핵발전 확대의 근거로 삼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핵안보정상회의 홍보책자를 펴내면서 이번 정상회의가 ‘후쿠시마 사고로 추락한 원전 산업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탈핵의 흐름을 거슬러 핵발전을 확대하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또한 핵산업계회의 다음 날에는 참가자들이 한국의 핵발전 시설을 시찰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정부가 이번 회의를 통해 원전 세일즈에 열을 올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라지만, 총선과 다른 사안들에 가려 핵안보정상회의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또한 세계 반핵운동 진영은 핵안보정상회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일부는 핵테러를 예방하는 것은 좋은 것 아니냐며 핵안보라는 프레임을 수용했다.
그러나 핵안보정상회의는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퍼져나가고 있는 세계적인 탈핵 흐름에 대한 정부와 핵 산업계의 반격이다. 또한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들이 핵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테러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패권 정책을 유지, 강화하려는 술책이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저들의 반격을 막아내고 탈핵의 흐름을 확대할 수 있는가, 또한 핵무기 감축과 폐기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라는 부정할 수 없는 핵발전의 위험을 저들은 핵테러의 가능성으로 뒤덮어 탈핵의 흐름을 꺾으려 하고 있다. 핵테러를 없애기 위해 테러의 빌미가 되는 핵물질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 증강과 다른 나라에 대한 압박을 정당화해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핵안보정상회의가 끝났지만 우리가 핵안보정상회의의 함의와 목적을 되새겨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흐름은 더욱 거세질 것이고, 한국의 민중운동 진영은 이러한 흐름을 똑똑히 지켜보면서 함께 대응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