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현대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 모습 |
“아파트 베란다에 서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라며 파업을 했는데 해고의 고통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올해 초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윤 모 조합원은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복직과 정규직화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해고와 생계의 고통이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정확히 1년 전인 2010년 11월 15일.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법원 판결에 따라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하며 25일간 공장 점거파업을 벌였다.
김밥 한 줄로 하루를 버텨야 했고, 비닐 이불 한 장으로 추위를 막으면서도 정규직화에 대한 열망으로 행복했던 25일, 울산을 넘어 전국을 뒤흔들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어느새 1년이 됐다. 행복했던 기억은 아스라해졌고, 잔인한 현실은 선명했다.
행복한 기억은 아스라이, 잔인한 현실은 선명히
현대차 자본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파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울산, 아산, 전주공장에서 104명을 해고하고, 1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징계했으며, 수 백 명의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월급 통장을 압류했다.
지난 달 금속노조 비정규투쟁본부가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충격적이었다. 해고 이후 정신건강이 해고 전보다 악화되었다는 응답이 92.7%에 이르렀다. 해고로 인해 가정이 파탄 나고 이혼 직전으로 내몰린 조합원들이 적지 않았다.
장기간의 해고는 가정을 뿌리째 흔들어놓았고, 생계의 고통으로 인한 우울증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회사의 탄압보다, 정규직 노조의 외면보다 더 고통스런 일은 비정규직노조의 분열이었다. 연달아 터진 조합비 유용 사건은 비정규직 도덕성에 큰 상처를 남겼고, 조합원들의 불신의 골은 깊어갔다. 넘어진 조합원들은 남은 힘이라도 모아 정규직에게 연대를 호소하고, 회사와 맞서 싸우기보다 서로를 비난하는데 몰두했다.
희망의 깃발은 멀어지고, 절망과 좌절의 짙은 그림자가 공장을 어둡게 드리웠다.
현대차 순이익 매년 사상 최대 경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압한 현대차는 승승장구했다. 현대자동차의 올해 순이익은 7조 9천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지난 해 순이익 5조4,413억 원에 비해 45% 이상 늘어나는 것이며, 세계 경제위기가 휘몰아친 2008년 순이익 8,578억에 비교했을 때 무려 920% 증가하는 것이다.
또 현대차그룹은 올해 상반기 상장 계열사 순이익이 9조1679억 원으로 부동의 1위였던 삼성그룹(8조1036억 원)을 앞질렀다.
현대차그룹의 막대한 순이익은 정규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내하청 노동자와 부품사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다. 이명박 정권은 법인세 감면, 고환율정책, 폐차지원금으로 국민의 세금을 퍼부어 재벌의 배를 더욱 불렸다.
올해 예상되는 현대차 순이익의 단 1.6%면 사내하청 노동자 1만여 명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 있고, 실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청년들에 대한 신규 채용을 통해 안정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현대차 자본은 ‘꿩 먹고 알 먹기’이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사내하청 비정규직 사용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등 주요 계열사에서 정규직은 관리자이고, 생산현장은 모두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정규직 0명 공장’을 늘려가고 있다.
노동부는 불법 인신매매의 공범
“자동차 업종이 사상최대 이익을 내면서도 고용인원 증가는 거의 없다. 장시간 근로를 줄이는 대신 부족한 인원은 사내하도급의 우수한 인재를 고용하거나 청년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면 노·사·정이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지난 10일 이채필 고용노동부장관이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그는 지난 9월 29일 울산을 방문해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정규직이라는 대법원과 충남지노위 판결에 대해 “지켜지는 것이 좋고, 법적 다툼의 여지가 있더라도 판결은 가급적이면 존중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판결마저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자신의 배를 더욱 불리고 있는 재벌들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확산되고,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 여론이 높아지자, 노동부가 뒤늦게 현대차 자본을 견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현대차 불법파견’의 가장 큰 책임자다. 지난 해 7월 22일 대법원 판결 이후 불법파견 사업장 폐쇄, 특별근로감독 실시, 노동조합 공동조사 요구를 모두 거부했고, 불법파견을 축소,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지난 9월 18일 금속노조가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업체 노무관리자의 수첩을 입수해 현대차 원청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사용자라는 사실과 불법파견의 증거들이 현대차에 의해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증거 은폐에 대해 현대차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했지만 노동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10년 넘게 불법 인신매매가 이뤄지고 있고, 대법원에서 불법이라고 판결하고, 불법을 은폐하고 있는데도, 노동부와 검찰은 이를 방치하고 있는 공범인 것이다.
체제를 위협하는 비정규직
최근 국회입법조사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 임금 등에 대한 추이를 분석한 보고서를 발행해 지난 10여 년 동안 비정규직 남용 현상이 개선되지 않아 사내하청 규제 등 비정규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권고했다.
정부와 정치권은 재벌의 탐욕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에 놀라 경쟁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제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적 문제이자, 정권과 체제를 위협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파견대상을 확대하고, 사람장사를 대기업까지 허용하려고 하고 있으며, 한나라당은 파견업체에 정규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은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아도 되는 파견법 개악안을 제출해 ‘한번 비정규직은 평생 비정규직’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재벌의 탐욕으로 절규하고 있는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금 정부와 정치권을 분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대법원에서도 정규직이라고 판결했는데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해 이명박 정부와 정치권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