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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선수노조의 질긴 역사

[기고] 최동원 주도의 선수회에서 노조 결의까지... 야구노동자의 권리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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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선수협의회가 노조설립을 결의한 것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은 모양이다. 근로소득세와 4대 보험까지 들먹이며 ‘프로야구선수를 노동자로 봐야 하나’하는 논란이 이는가 하면, 구단 쪽에서는 케케묵은 ‘시기상조론’과 ‘적자 타령’을 다시 선보였다. 유명한 야구포털 사이트를 훑어보니 ‘노조결성이야 선수들의 권리니까 당연한 일’이라는 수준에서 이야기가 모아지는 듯싶어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따지고 보면 선수협의 노조결성 결의는 1988년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선수협의회 결성이 시도된 뒤 무려 21년 만의 일이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시절동안 ‘선수노조’가 본격화되지 못했던 것은 당연히 ‘탄압’ 때문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회' 결성을 주도했던 최동원. 결국 징벌성 트레이드로 롯데를 떠나 삼성에 다다른 그였지만, 롯데 팬들은 그를 '영원한 부산 사나이'로 기억하고 있다. [출처: 한국야구위원회]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공식적인 ‘선수협의회 결성’이 시도된 것은 두 차례다. 첫 번째 주동자(?)는 우완 파이어볼러 최동원이었다. 1988년 9월, 7개 프로야구단 소속 선수 140여명이 대전 유성온천 관광호텔에 모였다. 이들의 목적은 바로 ‘프로야구선수협의회’의 발족. 이날 총회에서 선수들은 최동원을 2년 임기의 회장으로 추대하고, 부회장으로 이광은(MBC), 서정환(해태), 계형철(OB) 선수를 각각 선출했다. 선수협의회는 선수 복지 증진과 회원 친목도모 등의 ‘소박한 목표’를 갖고 시작됐지만, 구단주들에게는 당연히 눈엣 가시였다.

선수협의회가 노조로 발전할 것을 우려한 각 구단주들은 곧바로 강경진압에 나섰다. 각 구단은 선수회 가입 선수와의 재계약 불가 및 ‘블랙리스트 등재’를 담합했다. 당시 선수회 소속 선수들이 대부분 팀의 주축선수였던 점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초강경 조치였다. ‘스타선수도 내치겠다는데, 우리라고...’ 하는 우려 속에 많은 선수들이 주춤하기 시작했고, 선수회는 발족 한 달여 만인 10월 사실상 와해됐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에서 끝까지 선수회 활동을 주장했던 김용철과 최동원은 결국 삼성 라이온즈의 장효조, 김시진 선수와 트레이드 된다. 팀에서 투타를 대표하던 선수였다는 점에서 충격이었지만, 구단주들은 ‘재발방지’를 위해서라도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다.

2000년 1월20일. KBO 이사회는 8개 구단 공동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참여자에게는 제재를 가할 것’임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이 같은 구단의 움직임은 19일과 20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입회 서명운동’ 때문이었다. ‘협의회는 곧 노조, 노조는 곧 구단 망하는 지름길’로 생각하는 야구 관계자들임을 보면 별 새삼스런 반응도 아니었다. 선수협의회는 1월 22일 새벽 1시 20분에 발기인 75명으로 창립총회를 강행했고, 이날 오전 8시 KBO는 선수협 참가 선수 전원 방출을 결의했다.

하지만 당시 선수협의회 사태는 88년 있었던 ‘선수회 결성 시도’ 때와는 양상이 다르게 진행됐다. 구단의 반응은 비슷했지만, 이를 둘러싼 여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구단의 대응은 구태의연했다. 재계약 불가방침과 선수협의회 소속 선수영입 불가 담합 등은 판에 박힌 듯 똑같이 발표됐으며, “선수협을 인정받으려면 배후세력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식의 ‘배후설’도 유포시켰다. 연봉지급은 중단됐고, 선수협 가입 확산을 막기 위해 선수들의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선수들을 지방에 격리시키는가 하면, 감독과 코치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선수 본인과 가족들까지 접촉하며 선수협의회 탈퇴를 종용했다. 협박과 회유, 감시와 방출이 시시각각 횡행했다.

그러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야구팬들은 ‘팬들의 선물’이란 지원단을 즉각 구성해 선수협 사무국 실무지원에 나서는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각종 법적 분쟁에 대비한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MBC는 100분 토론에서 선수협 문제를 큰 비중으로 다뤘으며, 이날 토론자로 나온 KBO 관계자의 ‘노조 비하발언’으로 민주노총이 KBO 항의방문에 나서고, 이를 계기로 선수협 지원 태세에 돌입하는 등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2000년 2월27일 ‘선수협의회 후원의 밤’이 성황리에 진행되며 승기가 넘어왔다. 결국 KBO는 2000년 3월15일 선수협 소속 선수들의 팀 복귀를 승인하고, ‘제도개선위원회 구성을 통한 논의’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협의회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고, 선수 권익보호 등을 위한 각종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자 KBO는 2000년 12월 20일 선수협의회 집행부 6명을 일시에 방출했다. 뒤이어 현대 주축 선수 13명이 “선수방출 철회하지 않을 경우 시즌을 보이콧 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같은 날 LG 트윈스 선수단 38명이 선수협의회에 전격 가입했다. 가입행렬은 타이거즈(15명), 와이번스(31명), 자이언츠(27명), 이글스(40명), 베어스(30명)로 확대됐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결국 선수협과 KBO, 각 구단은 2001년 1월 20일 ‘선수협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되 현 집행부 6인이 사퇴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어 ‘선수협 반대 기자회견’ 등을 주도하며 'KBO의 황견 의혹'을 받기도 했던 이호성 선수가 1월 26일 새 회장에 당선되며 ‘한겨울 밤의 꿈’은 또다시 잿빛으로 사라졌다.

이 외에도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화형식 사건(1983년)’이나 ‘OB베어스 윤동균 감독 퇴진투쟁(1994년)’ 등 크고 작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단체행동이 있었지만, ‘승리’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경험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여러 실패요인이 있었지만, 핵심적으론 ‘선수들의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오는 구단과 KBO에 맞설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조법상 단체교섭권도 없고, 계약규정이 구단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구성된 데다 선수들도 ‘사업자’로 분류돼 각종 재계약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애초 ‘지는 경기’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답은 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가질 수 있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뿐이다.

물론 선수노조 설립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일본에서도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메이저리그의 선수노조(MLBPA)는 1885년 처음 결성됐지만, 3차례에 걸쳐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하며 힘을 잃어오다가, 1966년 전미철강노동조합 출신인 마빈 밀러를 영입하며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5차례의 파업을 통해 지금의 위상을 갖출 수 있게 됐으며, 1994년에는 연봉상한제에 맞선 전면 파업으로 월드시리즈가 무산되기도 했다. 60여년 역사를 가진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1985년에야 선수노조가 등장했다.

선수협은 이번 총회에서 노조결성 이외에 △자유계약선수(FA) 제도 개선 △최저연봉 인상 △비활동기간 훈련 금지 등의 주요 요구안도 확정했다. 사실상 노예와 같은 처지인 야구선수의 처우를 개선하고, ‘건강하게 노동하고 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내용이다. 하지만 구단들은 선수협 총회 이후 요구안에 대한 화답에 앞서 “노조를 결성하면 8개 구단 중 4개가 철수할 수도 있다”는 협박부터 내놨다. 선수협이나 노조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기 보다는, 때려잡아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메이저리그(MLB) 사무국과 미프로야구선수노조(MLBPA)가 주기적으로 단체협약을 갱신하고, 지난해 12월 노사동수로 안전보건자문위원회(Safety and Health Advisory Committee)를 구성해 경기 중 배트 파손으로 인한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각종 합의에 이르렀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반응이다.

‘시기상조론’이 더 이상 힘을 쓰기 어려울 것이란 점은 구단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게다. 고개를 들기 시작한 ‘적자구조’ 역시 노조결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사용되기 어렵다. 수익여부가 노조결성을 좌우한다는 논리 자체가 모순일 뿐만 아니라, 한국 프로야구가 더 이상 터무니없는 수준의 적자구조에 머무르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야구단의 모기업들은 프로구단 운영으로 큰 규모의 세제해택을 받고 있으며, 올해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효과가 2,000억원이 넘는다는 보고도 있었다. 미국 프로야구단도 중계권료나 야구장 운영, 입장권 판매수익, 구단관련 상품권료 등으로 이익을 내고 있으며, ‘노조 때문에 수익이 감소한다’는 주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영이 어려운 구단을 위해서 연봉총액이 일정기준을 넘는 구단으로부터 초과비율에 따른 일정 금액을 ‘사치세’ 명목으로 리그 사무국에 납부토록 하는 제도도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사치세의 기준금액과 납부비율은 노사 합의로 결정된다. 메이저리그 노사는 지난 2006년 체결한 단체협약을 통해 22.5%~40%의 사치세를 부과하고 있다. 2008년 현재 기준금액은 1억5,500만 달러다. 이렇게 거둬진 사치세는 저수익 구단 보조와 노조원인 선수들의 복리후생, 미국-캐나다-푸에르토리코 등 드래프트 대상국가의 야구발전에 사용되고 있다. 세계 그 어느 나라를 가도 선수들의 천부인권을 볼모로 잡아야만 유지할 수 있다고 우겨대는 리그는 없다.

실제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의 노조결성 시점은 KBO와의 협상추이에 따라 좌우되겠지만, 노조로 한 발씩 접근할수록 정부와 구단의 탄압이 다시 기승을 부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현대건설 시절 사원체육대회에서 모자를 거꾸로 쓴 채 언더핸드 투구를 선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의 입에서 조만간 “청년실업자들이 늘고 있는 판에 프로야구선수가 무슨 노조냐”는 식의 어불성설을 다시 듣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노동자들’의 의지와 신념이 지속되는 한, 탄압이 거세질수록 ‘노동인권’을 소중이 여기는 이들의 지지와 연대도 함께 커질 것이다. 지겹다. 이익이 인권위에서 군림하는 이놈의 정부.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지난 2008년 10월22일 진보넷 블로그 "http://blog.jinbo.net/keeprun"에 실린 포스트를 다소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