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평론은 “세계 경제 위기와 이명박정권의 출범은 오늘날 ‘자본 지배’에 대한 적대성을 더욱 명백하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번 특집에 실린 모든 글은 ‘신자유주의와 자본’이 오늘날 삶의 파괴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범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진보평론은 “이러한 동의가 어쩌면 다양화되어 있는 운동들이 만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인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40호에서 고정갑희는 그래서 “맑스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이 함께 작동한다면 이론과 현장 운동의 지형이 달라질 것”이라고 고정갑희는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동의지점이 있음에도 ‘연대’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각 입장이나 활동 공간에 따른 시각의 편차가 근본적으로 존재하며 비판의 지점 또한 상이하기 때문이다. 고정갑희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진보와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적색에 대해 ‘자본주의에서 가부장제로’를, 녹색에 대해 ‘인간주의에서 가부장제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적색’은 생산중심에 빠져 있으며 ‘녹색’은 ‘인류의 보편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종 내부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가부장제의 문제를 중심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구하며 ‘생산과 생산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성관계-성노동-성장치’에 따른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획을 선보인다.
반면 홍성태는 “사회운동의 생태적 전환과 연대”에서 “자연은 노동자와 자본가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맑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생태적 전환은 환경운동의 특수한 과제가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의 보편적 과제”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고정갑희에 의해, ‘인류의 보편적 이해관계’를 강조한다고 비판받고 있다. 특히, 그는 “토건국가는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병”이라고 하면서 “신자유주의나 한미FTA보다 토건국가가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훨씬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운동은 토건국가의 개혁을 가장 핵심적인 연대의 목표로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토건국가와 학벌주의’를 개혁하고 ‘생태복지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녹색개혁론은 “시장과 국가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다고 서영표에 의해 비판되고 있다.
이처럼 적·녹·보라의 연대는 결코 쉽지 않은 쟁점들을 가지고 있다. 녹·보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것은 ‘적(赤)’이다. 고정갑희는 ‘적’에 대해 만약 가부장제를 문제화하면 본인들 스스로 너무나 괴로운 그 어떤 것에 직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보며 ‘상품생산’에 중심이 있다고 맑스주의적 사고를 비판한다.
마찬가지로 홍성태도 “노동운동을 핵심으로 하는 좌파-진보 전체가 사실상 토건국가와 학벌사회의 문제에 거의 완전히 무심하다.”고 하면서 “그들은 신자유주의가 만악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며, 그 저지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상호간의 비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비판은 기본적으로 노동, 생태, 노동에 대한 자기비판을 동반하고 있다. ‘적색’의 입장에서 연대를 모색하는 박영균은 계급환원적이고 생산중심적인 전통 맑스주의를 비판하고 노동과 자본은 이미 제도 안에서 협상 파트너로 존재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자본의 한계지점으로 ‘자연’과 ‘노동’에 주목하고 반자본적 공통성에 근거한 적·녹·보라의 연대를 주장한다. 특히, 그는 여기서 생산중심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메커니즘에서 제기되는 생산-소비(재생산)의 이원화와 ‘정서노동의 상품화’, ‘그린의 상품화’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광일은 진보신당이 내걸었던 4대 가치가 구체화되지 못하고 단순한 구호에 머무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인민민주주의 전통의 재구성, 코뮌주의, 역사적 사회주의의 배타적이지 않은 전유”를 제기하고 있다. 아울러 “재생산의 공간으로서 지역”에 주목하면서 “진보의 재구성”과 연대의 문제가 “단지 기존 정당정치세력들 사이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정당정치뿐만 아니라 그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운동정치의 재편을 포괄하는”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좌파정당의 구성”과 관련해서도 선 정당 건설 후, 다양한 사회운동들과 논의를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자기비판과 연대의 모색은 서영표의 글에서도 전개되고 있다. 서영표는 사회주의와 녹색담론의 관계를 4가지 유형, “실용적 녹색정치 담론, 녹색개혁론, 방어적 생태마르크스주의, 비판적 생태마르크스주의”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 담론이 가진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비환원론적 유물론을 통한 생태사회주의 재구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비환원론적 유물론은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로부터의 비판에 근거하여 구성되는 생태적 사회주의로서, 급진적 민주주의와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의 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적·녹·보라조차도 동일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홍성태의 글과 서영표의 글은 동일한 녹색을 공유하지만 서로 틀리며 이광일과 김원의 글은 노동에 주목하지만 강조점은 다르다.
김원은 “사회운동이나 대중운동을 동원하는 정당이 아닌 대중의 구체적인 삶의 공간인 지역에 터한 ‘사회운동을 위한 정당’ 혹은 ‘운동을 위한 정당’으로의 방향 전환”을 주장한다. 이 점에서 이광일과 김원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광일은 새로운 정당 구성과 ‘민중의 집’과 같은 프로그램에 강조점이 있는 반면 김원은 “‘당 운동의 상대화’ 내지, 운동을 지도하는 정당의 역할 조정”을 이야기하면서 “정당운동, 사회운동, 지역 주민운동 등을 포괄하는 ‘대안적인 노조 모델’”을 강조한다.
엄은희는 주류 환경운동과는 다른 한 살림에 주목하면서 한살림은 “가치나 이념 지향에서 산업주의와의 단절을 선언”했으며 “주류 환경운동 조직이 개발사업 반대나 정책 로비에 집중하는 반면 한살림은 공동체 건설이나 교육 문제, 농산물 직거래 등의 일상의 변화를 추구”했다고 평가하면서 “풀뿌리 실험과 생태공동체”, “생협과 윤리적 소비”, 그리고 “녹-적 연대에 의한 지역에 뿌리 내리기”에 주목하고 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세는 “딱딱한 껍질 속에서 단단히 움츠린 채 고립된 개개인의 마음과 공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에 주목하는 논의도 있다. 김경희는 지난 10간의 국가페미니즘을 분석하는 글에서 다른 어떤 논자들보다도 구체적인 역사를 들어 여성운동과 정치운동의 관계를 고민한다. 그녀는 지난 10년간의 국가페미니즘이 “많은 성과를 낳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흐름의 의도하지 않은 용인 속”에서 “여성운동과 정부”가 “내부의 동맹세력”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여성운동이 “여성의 차이를 가르는 주요 축인 계급과 젠더 이슈를 운동에 담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젠더와 계급의 교차성을 풀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차이를 의제화하는 과제”가 동시적 문제임을 주장한다.
이처럼 적/녹/보라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적 내부, 녹 내부, 보라 내부에도 차이가 있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을 특권화하고 노동자는 마치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여성을 특권화하고, 생태는 자연을 특권화한다. 녹적보라 내부의 차이들에 주목하고 ‘적/녹/보라’의 어느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 균열 속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면 아마도 소통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며 연대의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보평론 특집은 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