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안간 로슈는 지난 달 25일 한국에서 ‘동정적 접근 프로그램(compassionate access programme)’을 시작한다고 통보했다. 푸제온을 무상으로 주겠다는 것이다. 4년이 넘도록 푸제온을 공급하지 않다가 무상공급을 하는 이유를 묻자 로슈는 지난 달 27일 “지금까지 한국에 푸제온이 필요하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작년 9월에 요구가 있었을 때 지속적일 수 없는 (보험)가격으로 한국정부에 판매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로슈는 보험약값에 동의 할 수 없다. 더 지속적일 수 있는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임시적 방법으로써 동정적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정했다”고 답했다.
푸제온은 기존의 에이즈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에게 필수적인 약이다. 2004년에 연간 1천800만 원으로 보험등재가 되었지만 로슈는 보험약가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지금까지 푸제온을 공급하지 않았다. 왜 로슈는 약값이 낮아서 이윤이 안 남는다고 하더니 무상으로 약을 주는 것일까?
공짜로는 뿌려도 싸게는 못줘
약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사례는 에이즈치료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노바티스는 2001년 4월 에 글리벡 시판허가 신청을 내면서 동정적 사용법(Expanded Access Program)을 통해 일부 백혈병환자에게 무상공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전 세계에 동일하게 글리벡 1알 당 2만5천 원 내외(월 300~750만 원)의 약값을 요구하였다. 2001년 11월 19일에 복지부가 1만7천862원(월 200~510만 원)으로 보험약가를 고시하자 바로 그해 11월 27일부터 글리벡 공급을 중단했다. 환자비상대책위원회가 항의를 해 12월 10일부터 공급이 재개되었지만, 독점의 위력을 보여준 셈이다.
노바티스는 2002년 3월 4일에 2만4천55원으로 약가재신청을 했다. 환자들은 약값인하, 보험적용확대 그리고 강제실시를 요구하며 1년 반이 넘도록 싸웠다. 특허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는 특허권자의 사익과 공공의 이익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특허제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치로 특허권자만 독점 생산할 수 있는 약을 제3자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했다. 복지부는 노바티스의 요구대로 선진7개국(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일본, 이탈리아)의 가격을 기준으로 약값을 결정하는 대신, 환자의 본인부담금을 30%에서 20%로 인하하고 20%중 10%를 노바티스가 부담하기로 합의했다. 노바티스는 동정적사용법을 통한 무상공급을 하다 중단함으로써 원하는 약값을 관철시켰다. 그럼 왜 노바티스는 약값의 10%를 인하하지 않고 환자들에게 직접 돌려주는 방식을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노바티스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글리벡을 어떻게 공급하고 있는지를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인도는 ‘세계의 약국’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개발도상국에 값싼 복제약을 공급해왔다. ‘세계의 약국’은 세계 각지의 환자들에게 희망이지만 초국적제약회사에게는 유일하게 생산할 수 있는 독점적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다. 노바티스가 글리벡을 출시하고 1년이 지날 무렵 인도의 제약회사들은 글리벡과 똑같은 성분을 만들게 되었다. 그 중 '낫코(Natco)'라는 제약회사는 한국의 환자들에게 글리벡과 똑같은 약 '비낫(Veenat)'을 1달러, 즉 글리벡의 1/20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공급하기도 했었다. 그러자 노바티스는 글리벡에 대한 독점판매권(Exclusive Marketing Right)을 신청하였다. 인도는 2016년까지 WTO TRIPS협정(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의 이행을 유예받은 국가들에 속하지만 미국의 끈질긴 압력 때문에 2005년부터 물질특허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1995년 이후에 해외에서 특허를 받은 약에 대해서도 독점판매권을 인정하도록 했다. 이런 변화의 첫 사례가 글리벡이다. 글리벡 특허는 1993년 스위스에서 출원된 것이기 때문에 독점판매권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바티스의 압력에 의해 2003년 11월 인도특허청은 이례적으로 글리벡에 대해 독점판매권을 부여해버렸다. 이는 글리벡의 복제약 생산중단명령에 해당하는 조치였다.
한편 노바티스는 ‘글리벡 국제 환자 후원 프로그램(GIPAP, The Glivec International Patient Assistance Program)’을 통해 무상으로 공급하고 있다. 지극히 가난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노바티스에 따르면 인도의 백혈병환자 중 99%가 노바티스의 무상공급프로그램을 통해 글리벡을 먹고 있다고 한다. 태국에서 2008년 1월에 글리벡에 대한 강제실시를 발동하여 인도에서 글리벡과 똑같은 약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태국정부가 전국민건강보험제도를 통해 글리벡을 공급하기에는 약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노바티스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노바티스는 태국에서 기존에 운영하던 GIPAP의 기준을 연간 가구 소득이 5천500만 원 이하일 경우로 바꿨다. 대부분의 태국 백혈병환자는 노바티스의 무상공급프로그램의 대상이 되었고, 태국정부는 글리벡 강제실시를 시행하지 않기로 했다.
공짜로 뿌려도 이윤은 늘어나
노바티스가 환자들에게 돈을 지원하거나 글리벡을 공짜로 뿌리더라도 약값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매출액을 보면 선명해진다. 2003년 1월 노바티스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글리벡이 출시된 지 1년 8개월간 매출액은 7억6천800만 달러였다. '글리벡 개발원가는 미국의 평균 신약 개발 비용 8억 달러에 준한다'(한계레21 제 393호. 2002년 1월 16일)는 노바티스의 주장에 대해 정말 할 말이 많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더라도 연구개발비 때문에 특허를 강화하고 약값을 비싸게 받아야 한다는 제약회사의 말은 거짓임이 분명하다. 글리벡과 똑같은 약 ‘비낫’이 글리벡 약값의 1/20도 안 되는 가격에 공급됐던 점이나 글리벡 1알의 생산 원가가 최대 760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1년 8개월 만에 노바티스가 주장한 연구개발비를 대부분 회수한 셈이다. 글리벡의 성장세가 매년 두 자리수 이상으로 유지되고 있어 노바티스를 세계의 제약회사들 중 톱 5 순위에서 빠지지 않도록 만든 일등공신이다. 2008년에도 전 세계 글리벡 매출액은 37억 달러로 전년대비 20% 증가했다. 글리벡을 공짜로 뿌리는데도 왜 매출액은 증가할까?
IMS Health에 따르면 2007년에 세계 의약품 매출 중 북미가 45.9%, 유럽 31.1%, 일본 9.4%,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가 8.85%, 라틴아메리카가 4.8%를 차지했다. 전 세계 의약품 시장에서 북미, 유럽, 일본이 86.4%를 차지한다. 애초부터 돈이 되지 않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사는 환자들은 노바티스에게 ‘고객’이 아니다. 초국적제약회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미국과 유럽에 제일 먼저 출시를 하면서 그 곳에서 팔릴 수 있는 최대의 가격으로 약값을 정하고, 그 가격을 다른 나라에 강요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글리벡이 ‘기적의 약’이기 때문이 아니다. 핵심적으로는 노바티스만이 글리벡을 생산, 판매할 수 있는 독점을 뒷받침해준 WTO TRIPS협정, 그리고 이를 적극 받아들인 각국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때문이다. 노바티스는 이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가난한 전 세계의 환자들 중 일부에게 무상공급을 하고 한국 환자들에게처럼 본인부담금을 지원함으로써 비싼 약값에 대한 환자들의 저항을 막았을 뿐 아니라 인도의 복제약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결국 세계의 환자들은 값싼 복제약이 아니라 20배나 비싼 노바티스의 글리벡을 먹게 되었다. 지극히 제한적인 노바티스의 동정적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못한 환자들은 죽어가고 있다. 게다가 글리벡 문제는 글리벡으로 끝나지 않는다. 글리벡은 백혈병 신약 가격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작년에 연간 4천만 원으로 결정된 백혈병치료제 스프라이셀에 대해 BMS사는 글리벡 약값을 기준으로 요구했었다. 초국적제약회사의 ‘동정적 프로그램(compassionate programme)’ 전혀 동정적이지 않다. ‘동정적 프로그램’은 독점가격을 유지하기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세계적 독점 유지 성공?
그럼 왜 로슈는 4년이 넘도록 환자의 생명을 무시하다 이제 와서 동정을 베푸는 것일까? 이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선 로슈가 “작년 9월에 요구가 있어서”라고 밝혔듯이 미국, 프랑스, 태국 등 세계 각지로 로슈에 대한 비난과 항의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로슈는 “의약품 공급에 관한 문제는 해당 국가 국민이 구매할 능력이 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며 약값을 올리지 않으면 공급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그래서 작년 9월부터 전 세계의 에이즈환자와 활동가들에게 건강할 ’권리‘를 구매력에 따라 ’자격‘으로 취급하는 로슈의 횡포를 알리고 ’로슈규탄 국제공동행동‘을 함께 하였다. 한국에서 푸제온을 필요로 하는 환자가 현재 100명 안팎이어서 간단히 무시할 참이었는데 항의가 한국을 벗어나 세계로 확산되자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푸제온 약값인하투쟁이 벌어졌다면 로슈는 더 재빠르게 수습해야했을 것이다. 환자, 보건의료, 인권단체의 끈질긴 투쟁과 국제적인 직접행동이 없었다면 로슈는 절대 푸제온을 무상공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강제실시의 확대와 특허의 효용에 대한 문제제기 때문이다. 그동안 로슈가 푸제온의 ‘생산과정이 복잡하여 고비용이 소요되며, 연간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어’ 푸제온의 약값을 비싸게 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해 왔다. 전 세계 4천만 명이 넘는 HIV감염인이 지금 당장 혹은 미래에 푸제온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생산과정이 복잡하여 연간생산량이 한정되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2004년에 코바이오텍(주)은 과학기술부의 21세기 프론티어 미생물유전체활용기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미생물학적 생산기술을 활용해 푸제온을 간편하게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로슈는 푸제온을 106공정의 화학합성법으로 만들고 있으나 코바이오텍(주)는 생산공정을 10여 번으로 줄이는 기술을 개발하여 푸제온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푸제온 생산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로슈가 갖고 있어서 세금으로 지원되어 개발된 이 기술은 활용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이처럼 특허는 푸제온을 싸게 공급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을 방해한다. 게다가 2007년과 2008년에 태국에서 6가지 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가 이뤄졌다. 태국정부의 강제실시 발동은 2001년 11월 WTO각료회의를 앞두고 TRIPS협정과 강제실시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논란과 대립이 있은 후 다시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WTO각료회의는 ‘TRIPS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 선언문’에 “각 회원국은 강제실시를 허여(許與)할 권리가 있고, 강제실시가 허여되는 조건을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줄곧 초국적제약회사들은 ‘강제실시는 예외적이고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태국정부가 강제실시를 발동하자 미국정부와 초국적제약회사가 선두에 서서 ‘불법’이라고 주장했고, 세계보건기구마저 맞장구를 쳤다. 갖은 압력에도 불구하고 태국정부가 강제실시를 확대해나감으로써 ‘특허권이 환자의 의약품접근권을 침해하고 있어 강제실시를 통해 건강권을 보호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 다시금 공식화된 셈이다.
1990년대에 초국적제약회사와 미국정부가 특허제도의 전 세계적 통일을 완성하여 독점이윤을 확실히 했다면 2000년대에는 ‘특허에 의한 살인’을 경험한 전 세계 민중의 저항과 그것을 무력화시키려는 초국적제약회사의 압력이 충돌했던 시기다. ‘특허에 의한 살인’에 맞서는 합법적 방법인 강제실시는 양자에게 초미의 관심사이다. 강제실시가 개발도상국을 넘어 한국같은 OECD가입국에서 ‘논란’이 된다면 그 파장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강제실시를 청구한지 2달이 지났다. 강제실시가 허여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4년이 넘도록 공급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점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로슈는 특허의 문제점과 강제실시에 대한 ‘논란’조차도 피하기 위해 조용히 무상공급을 선택했다.
셋째 복지부가 제약회사에게 한국 의약품 ‘시장’에 대한 신뢰를 주었기 때문이다. 약제비가 5년 만에 2배로 급격히 증가하자 복지부는 2006년에 약제비적정화방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약가협상력을 높여 약제비를 절감하겠다는 것이다. 다국적제약산업협회는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반대입장을 표명했었다. 작년 한해는 약제비적정화방안으로 약값을 통제할 수 있을지 가늠하는 시험대였다. 제약회사, 복지부, 환자들 간에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가운데 신약에 대한 약가협상이 줄줄이 결렬되고, 그 신약을 사용하지 못하는 환자들의 저항이 일어나자 약제비적정화방안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약값기준도 없이 제약회사가 부르는 약값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고, 제약회사가 공급거부를 해도 대책이 없는 제도라는 것. 그 비판의 정점에 푸제온 사건이 있었다.
복지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무엇일까? 리펀딩제도이다. 노바티스가 원하는 약값으로 보험약가를 결정해주고 환자본인부담의 일부를 노바티스가 제공했던 것과 같은 방식을 제도화하겠다는 것이다. 복지부는 제약회사들이 원하는 것이 전 세계 동일가격이므로 약값을 낮게 결정하면 공급을 거부할 것이기 때문에 리펀딩제도는 제약회사와 환자가 윈윈(win-win)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지부는 지난 해 12월부터 리펀딩제도를 도입하기위한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작년 12월 복지부 관계자는 로슈사장을 만나 리펀딩제도를 도입하면 푸제온을 공급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장 리펀딩제도가 시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복지부는 신약의 독점가격을 보장하겠다는 신뢰를 준 셈이다. 복지부는 제약회사가 원하는 대로 약값을 결정해주겠다고 하니 약가협상은 있으나마나한 것이 될 것이다. ‘한시적 무상공급’으로 언제든지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인지, 전 세계 환자들에게 의약품을 안정적으로 싸게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인지가 투쟁의 몫으로 남아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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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란 님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