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노순택] |
양철지붕 두드리며
밤새 내리는 비
나도 누군가의 영혼을 밤새 두드리는
겨울 찬비가 될 수 있다면
하지만 난 아직도
세상의 음계에 맞춰
내 노래 조율하는 법을 몰라
내 노래는 내가 죽어도
내 목 밖에서 객처럼 서성일 것인가
밤새 내 영혼을 두드리는
하얀 비
- 졸시 <하얀 비> 전문
어려서부터 난 혀가 짧아 말을 잘 못하는 말더듬이였다.
두 살 무렵 중량천 다리 밑에서 부모님들이 풀빵 장사를 하며 살 때 심한 이질에 걸렸었다고 한다. 약 살 돈도 여의치 않았는데 주변 이웃들이 익모초를 달여 먹이면 낫는다고 했다 한다. 분량을 가늠하지 못해 양이 많았는데, 그 까닭으로 새의 것처럼 아직 연약한 혀가 굳어버렸다고 한다. 다섯 살 무렵부터야 간신히 입을 떼었다고 한다.
혀 짧은 소리는 사는 내내 놀림감이었다. 초교 시절부터 고교 시절, 그 이후까지 나는 말에 대한 공포를 가졌다. 순번대로 교과서를 읽히던 수업 시간, 내 차례가 돌아올수록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손과 발에 땀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책을 읽을 때면 선생도 아이들도 킥킥거리기 일쑤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손가락으로 혀를 길게 잡아 빼고는 한참을 있곤 했다. 혀를 최대한 내민 채 위아래 이빨로 콱 물고는 몇 시간을 있기도 했다. 혀가 조금만 길어지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몇 시간이고 큰 소리로 책을 읽으며 발음 교정 연습을 했다. 하지만 좋아지지 않았다. 나도 구슬 구르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우정을, 사랑을 속삭여보면 좋겠다는 꿈이 참 오래 갔다. 지금도 길거리를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혀를 굴리며 발음 연습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 ‘르, 르, 르, 르’ 발음이 가장 잘 안 되던 ‘리을’ 발음이었다.
이런 말에 대한 상처와 공포가 자연스레 글 쓰는 일로 나를 이끌었다. 글 쓰는 일은 다른 일이 아니었다. 다 말하지 못한 얘기를 소통하고 싶은 꿈에 다름 아니었다. 시인이 된 것은 어쩌면 이런 상처에 대한 반발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이 되고서도 말에 대한 갈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노래와 이 노래에 선율을 선사해주는 악기에 대한 선망이 컸다. 구성진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면 악기의 몸을 통해서라도 내 마음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 [사진: 노순택] |
그 중 가장 탐나는 악기가 통기타였다. 어차피 피아노나 또 어떤 값비싼 악기를 가지고 배울 만한 삶이 아니었다. 가끔 기타점 앞을 지날 때면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서 구경하곤 했다. 짝사랑하던 소녀를 골목 끝에 숨어 몰래 훔쳐보던 마음처럼 애틋했다. 꿈속에서 가끔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했다. 꿈속에서 그 노래는 나였다. 나는 사라지고 우두커니 그 노래와 기타만 남아도 좋겠다는 생각. 그 느낌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한없이 평온해지곤 했다.
딱 한 번 이 기타를 배우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착한 노동자 생활로 접어들었을 때다. 그때쯤 나는 비로소 사춘기의 까닭모를 위선과 위악, 격정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은 평범하고 정련된 삶을 가져보고 싶었다. 더 이상 나를 미워하지 않고, 위로해주고 싶기도 했다.
현장엔 늘 악다구니와 뻐센 말들이 오갔다. 종일 웅웅거리는 발전기 소리와 그라인더 소리 속에서 살다가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떨어졌다. 가끔 새벽녘 눈이 안 떠질 때도 있었다. 용접불꽃에 데인 눈에서 밤새 흐른 누런 고름이 눈꺼풀을 아교처럼 붙여놓고 있었다. 전날 노동의 흔적으로 손이 곱아 안 펴질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우리의 피땀 어린 노동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만 가던 공장을 보며 참 아름답다는 생각도 했다. 나의 삶도 주변 동료들의 삶도 그 노동의 결실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생산한 것들로부터도 소외를 경험해야 했다. 나의 노동과 그 노동의 결실은 정작 나의 것이 아니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뿌듯함보다는 왠지 모를 절망과 외로움이 더해갔다.
큰맘을 먹고 근처 기타 학원을 찾았다. 왠지 내가 오면 안 될 곳에 왔다는 자격지심에 가슴 두근거리며 몇 번이고 계단을 오르내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코드를 가르쳐주던 여성 강사를 잊지 못한다. 내게 노래를 가르쳐 준 첫 선생인 셈이었다. 잔업이 없는 날밖에 갈 수 없었지만 그 짧은 시간만큼은 행복했다. 여름이었는데 주로 가르쳐 주던 노래가 ‘해변으로 가요’였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연인들에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 거예요….”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아련해지곤 했다.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삶. 자격지심으로 누구도 쉽게 사랑할 수 없는 삶. 젊음의 대부분 날들을 어둔 마음의 골방에서 다 보내고 이젠 잔업과 철야에 매여 사는 삶이 슬펐다. 빳빳한 햇볕에 나도 이 습진 마음을 말릴 수 있다면, 달콤한 사랑으로 이 각진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나도 행복에 빠질 수 있을 텐데…. 평범한 노래 한 소절이었지만 난 눈물이라도 날 듯 그 노래의 선율에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오래 가질 못했다. 일자리를 찾아 충남 서산으로 떠나야 했다.
가끔 다시 어떤 그리움으로 기타점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곤 했다. 세월은 터널을 지나 온 기차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수십 개의 터널을 지나 기차는 오늘도 달리고 있다.
▲ [사진: 노순택] |
세월이 한참 흐른 후, 2008년.
나는 다시 그 노래와 기타를 찾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어쩌면 나를 다시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일은 더 이상 기타라는 하나의 외화된 형상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들려지는 선율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왜 나는 노래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나는 왜 기타를 갖고 싶었는가? 기타는, 노래는 나와 우리에게 어떤 삶의 의미인가? 하나의 노래가, 한 대의 기타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소중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고 싶었다. 왜 우리는 그 아름다운 노래들과 기타들을 잊고 살 수 밖에 없는가를 물어보고 싶었다. 어떤 노래가, 어떤 기타가 소중한 삶의 노래이며 기타인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근래 콜트·콜텍악기에서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가 불려지는 클럽은, 음악당은, 문화회관은 찾지 못하고, 그 악기를 만들던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선율과 고급스런 문화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시장바닥 옹기그릇처럼 질박하고 투박한 사람들이다. 한 눈이 약간 찌그러진 사람, 얼굴이 얽고 주근깨가 많은 사람, 손이 곱은 사람, 개구리처럼 한참 큰 입을 가진 사람, 산그늘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말 한마디 하는 게 수줍은 사람, 나무처럼 생기거나 낡은 터번의 후미 통풍구처럼 조금씩은 녹슬어 낡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전 세계에 유통되는 기타의 1/3을 만들어 왔으면서도 누구 하나 기타 한 대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창문 하나 없이 꽉꽉 닫아놓은 공장 안에서 쉴새없이 알을 까내야 하는 양계장의 닭들처럼 시름시름 병들어 가던 사람들이다. 기계톱에 손가락을 잘리고, 빼빠질과 연마질로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꽉 막힌 도장장에서 유기용제를 마시며 일하다 거개가 기관지염과 천식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래도 예쁜 자개 문양을 달고 전 세계로 나가는 기타들을 볼 때면 흐뭇해하던 노동자들이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여년 밤낮없이 기타만 만들던 사람들이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의 노동과 기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화폐로 환산해 콜트·콜텍 박영호 사장은 1200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모았다. 2006년 기준 한국부자 순위 120위란다. 그러고도 배가 덜 불러 박영호 사장은 1993년 인도네시아 공장과 1999년에는 중국 공장을 설립하고는 천천히 국내 생산 라인을 축소시켜 나갔다. 의도된 계획이었다. 2007년 4월에는 인천 콜트악기 노동자 56명을 정리해고 했고, 2007년 7월에는 대전 계룡시에 있는 콜텍악기를 위장폐업하고 남아 있던 67명 전원을 정리해고 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조정에 항의해 2007년 12월 콜트악기 노동자 이동호 씨가 분신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2008년 8월에는 인천 콜트악기마저 위장폐업하고 말았다. 갈 곳 잃은 이들이 문 닫힌 공장을 지키며 2년여에 걸쳐 싸우고 있다. 생계비 마련을 위해 기타 만들던 손으로 수세미 뜨개질을 하며 이 찬 겨울을 나고 있다.
▲ [사진: 노순택] |
2006년 노동조합을 처음 만들기 전까지는 아침 7시 30분까지 서로 경쟁하듯 나와 일하던 노동자들이었다. 2006년 노조가 만들어지고 12년 만에 가장 높은 임금인상이 되었는데 이 때 일당이 이만오천칠백 원으로 2006년 최저임금 시급보다 백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회사가 어렵다고 하니 그런 줄만 알고 일했던 사람들이다.
지난 10월 20일부터는 한 달여 동안 양화대교 북단 송전철탑에 올라 고공단식 농성도 해봤고, 며칠 전에는 새벽 4시에 본사 자물쇠를 끊고 점거농성을 들어갔다 곧바로 출동한 경찰특공대들에게 진압당해 전원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그렇게 이들이 끌려가는 동안에도 전 세계의 콜트·콜텍(cort)·박우드(parkwood)·알바네즈(Ibanez)·휀다(Fender) 기타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연대와 나눔을 속삭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고, 우리는 하나라고 호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어서인가? 이제 난 이런 모든 소외와 단절의 지점들이 끔찍이도 싫다. 모든 소외와 망각과 고통에 찬 얼굴들이 싫다. 말과 노래와 희망으로만이 아니라 우리는 정말 구체적으로 만나야 한다.
마침 콜트·콜텍과 연대하겠다는 문화예술인들이 있어 함께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1주일간의 콘서트>를 준비하게 되었다. 사진을 찍어 준 이, 영상을 만들어 주는 이, 홍보물을 디자인해 주는 이, 만화를 그려주는 이, 공간을 빌려주는 이들, 노래를 들려주겠다는 이들, 모두 스스로를 ‘문화예술노동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기타를 만들어 준 사람들을, 피아노를 만들어 준 사람들을, 공간을 지어준 사람들을, 먹을 것을 마련해 준 사람들을, 그런 우리 모두의 고귀한 노동을, 빼앗기지 않는 노동을, 누구도 소외받거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맞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런 노래를 불러보고 싶었다. 그런 노래의 몸을 만들어 준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었다. 맞다. 나는 나를 사랑해 주고 싶었다. 그런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배제 당한 채 살아와야 했던 나와, 또 다른 나들의 파편화된 마음을 하나로 기워보고 싶었다. 진정으로 껴안고 보고 싶었다. 이제 다시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게라도 말해보고 싶었다. 우린 언제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객이 되어 서성일 거냐고? 우린 언제까지 내가 만든 기타로부터, 내가 만든 공간으로부터, 내가 만든 결실로부터 오히려 소외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삶을 상식처럼 받아들여야 하냐고? 맞다.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짧은 1주일이지만 콜트·콜텍 악기에서 기타를 만들어 왔던 노동자들의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그 분들이 아, 내가 그간 만들어 왔던 게 이런 거였구나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콜트·콜텍 기타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1주일간의 콘서트
"당신에게 삶의 노래를 돌려주고 싶습니다!!"
- 일시 : 12월 9일(화)-12월 14일(일), 매일 19:30부터
* 매일 12:00-17:00, 전시 등
- 장소 : 홍대 앞 클럽 빵(02-6081-1089)
- 콘서트 입장료 : 1만원(1 Drink 포함, 후원기금으로 쓰입니다)
- 문의 : 문화연대(02-773-770, culturalaction.org)
- 후원계좌 / 하나은행 159-910119-60607(신유아)
- 블로그 : http://cortaction.tistory.com
* 노순택 사진전, 기타 제작 공정 전시, 영상 상영, 후원 벼룩시장, 시 낭독, 콘서트 등이 펼쳐집니다. 출연진 등은 블로그 등을 참조 바랍니다.
* 후원 입장 티켓으로 주류 및 안주 등을 드실 수 있습니다.
* 각종 송년 모임 장소로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