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한미FTA에 대한 전 민중적 항쟁을 준비하는 이 시점, 전세계에서 자유무역협정(FTA), 특히 미국과의 FTA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 급격히 확산하고 있다. 몇 개월 전 태국에서 미국과 태국 간 FTA에 반대하는 1만 명이 시위를 하면서 태국 탁신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환멸을 표출하는가 하면, 말레이시아에서도 미국과의 FTA 반대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다. 페루와 엘살바도르에서는 미국과의 FTA에 반대하기 위해 목숨을 잃어가며 저항하고 있으며, 코스타리카에서도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 반대 투쟁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작년 11월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에서 개최된 미주정상회담 때 베네수엘라 차베즈, 아르헨티나 키르치네르 등 좌파 대통령은 공식적 정상회담 자리에서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신랄하게 비판하자 미국 부시 대통령은 회의가 끝나지도 않은 채 황급히 귀국하였으며, 회의장 밖에서는 수만 명의 남미지역 노동자 민중들이 ‘FTAA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제국주의 반대’를 외치며 투쟁했다. 그것으로 다시 부활을 꾀하고 있던 FTAA 협상은 사실상 완전히 붕괴됐다.
[출처: 샌프란시스코 인디미디어] |
그러나 아직 완전한 승리를 외치기엔 이르다. ‘미국의 앞마당’이라 불리던 남미에서 부시가 망신당하고 FTAA 협상이 중단되긴 했지만, 진정한 대안이 만들어지고 실천되기 전까지는 망령이 계속 맴돌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초국적자본의 이해관계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끝까지 관철시키기 위해 여러 우회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남미 국가들과 양자간 또는 소지역 FTA를 추진하거나, 플랜콜롬비아와 같은 ‘대테러’ 군사작전을 한층 강화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에서는 CIA가 계속 공작을 펼치고 있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세부원칙’인 ‘북미 안보 및 번영을 위한 파트너쉽 (Security and Prosperity Partnership of North America)' 등을 내놓고 있다. 그래서 미주대륙 민중들은 작년 투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속에서 초국적자본의 새로운 기획에 맞서 투쟁을 지속하고 동시에 새로운 사회, 새로운 대륙을 만들어나가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과 정세 속에서 ‘FTAA와 자유무역 반대 투쟁에 관한 5차 미주대륙 회합 (V Encuentro Continental de Lucha Contra el ALCA y Libro Commercio)’이 지난 4월 12일부터 15일까지 쿠바 아바나에서 개최됐다.
‘FTAA와 자유무역 반대 투쟁에 관한 미주대륙 회합’은 미주사회동맹(HSA)이 소집하고 ‘FTAA 반대 대륙 캠페인’이 주관하는 일종의 전략회의이자 포럼으로, 매년 이맘 때 쿠바에서 개최된다. 미주대륙 전역에서 수백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함께 정세분석을 하고, 그 해 주요 투쟁에 대한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작년 4차 회합에서는 같은 해 11월 마르델플라타 투쟁을 결의하고 실천방안을 논의했다.
600여명이 모인 올해 5차 회합에서는 마르델프라타 승리 이후 계획을 수립하고, 자유무역을 통한 자본의 대륙통합을 넘어 민중적 대륙 통합을 만들어나간다는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아 대안(ALBA)’을 구체화하겠다는 과제를 안고 시작했다.
4일 간의 회의는 외채, 군사주의, 여성 등 각 부문별로 전략과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총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의제와 결의사항이 있었다.
하나는 소위 ‘NAFTA 플러스’ 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이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13년 된 NAFTA는 FTAA를 비롯해 전세계 FTA의 모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소위 ‘자유무역’ 체제의 반민중성을 극명히 드러내주는 핵심 ‘사례’인 만큼, ‘NAFTA 플러스’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이다.
최근 미 대통령 부시, 멕시코 대통령 빈센테 폭스와 캐나다 총리 스티븐 하퍼는 작년 3월, NAFTA의 세부원칙으로서 ‘북미 안보 및 번영을 위한 파트너쉽 (Security and Prosperity Partnership of North America)'을 제안했다. 이 파트너쉽은 역내 초국적 자본이 어떻게 생산성을 더욱 향상하고 생산비용을 절감할 것인가 등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피력하고 있으며, 나아가 에너지와 물류, 생화학테러 등에 대한 공동 정책을 수립할 것을 주문한다. 나아가 세 국가 간 공동 안보 정책으로 수립함으로써 사실상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지원을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게다가 NAFTA의 ’세부원칙‘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사수렴 과정도 국회 비준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둘째, 최근에 당선된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가 차베즈의 ALBA를 보완하기 위한 ‘민중무역협정(Tratado de Commercio entre los Pueblo; TCP)’을 제안했다. ALBA는 남미대륙의 ‘민중적 통합’에 관한 보다 총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경제 분야 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적 교류와 협력, 일국적 분배구조의 변혁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민중무역협정은 그야말로 대안적인 ‘무역협정’인 것이다.
아직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기본 방향으로는 △무역과 투자는 그 자체로서 목표가 아니라 민중과 개발을 위한 수단이며 △해외투자자와 초국적 자본에는 제약을 가해야 하며 △민중이 스스로 식량과 농업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공공서비스는 시장화될 수 없으며 △소규모 생산자와 협동조합을 양성하고 이들을 보호해야 하며 △체결 국가 간 차이를 감안하고 공동체적 원칙 하에 상호원조를 위한 무역을 한다는 것이다.
이미 ALBA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교환(베네수엘라 석유와 쿠바 의사, 베네수엘라 석유와 볼리비아 콩 등)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지, 실제로 ‘대안적’ 무역협정이 될 수 있을지, 진보적 요소를 약간 가미한 새로운 케인즈주의 정책으로 귀결될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FTAA 반대’를 넘어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로서 주목할 만하다.
셋째, 미주대륙의 민중적 통합 즉 ALBA를 더욱 진척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제시되었다. 회합 참가자들은 단순히 몇몇 정부들만의 대안이 되지 않도록 각 국 대중운동이 ALBA를 구체화하고 실행하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면서, 앞서 언급한 ‘민중무역협정’과 ALBA, 또한 미주사회동맹이 2003년도에 내놓은 ‘미주대륙을 위한 대안’을 엮어내고 보완하기 위한 작업을 지속하기로 했다.
당면한 FTA 체결과 WTO, 미국의 각종 군사 작전에 대해 대중 투쟁을 지속하는 한편, 오는 9월 볼리비아에서 ‘민중적 통합을 위한 사회 회담’을 개최하여 사회운동들이 주체가 되어 대륙 수준의 ‘대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또한, 이번 5차 회합에서 ‘세계판사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조직이 발의되었는데, 남미지역 법조인들의 네트워크로 FTAA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ALBA와 민중무역협정에 관한 법적 자문과 검증을 해나가기로 했다.
아울러, 4월 15일에 채택된 결의문은 외채 거부 투쟁을 지속할 것, 성차별주의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에 맞서 싸울 것, 교육민주화와 공교육 수호 투쟁을 벌이는 학생들과 함께 할 것, 지적재산권에 반대하며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농민 및 원주민과 함께 할 것, 공공서비스 특히 물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할 것, 지식체계의 변화와 이데올로기적․문화적 투쟁을 중요하게 여기고 진행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아울러 오는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이하여 미국 이민법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연대행동을 벌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내년 5월 3일부터 5일까지 쿠바 아바나에서 ‘FTAA와 자유무역 반대 투쟁에 관한 6차 미주대륙 회합’을 개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