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대회장 밖에서 KT노조의 어용성을 규탄하는 집회를 하던 노동자들이 대의원대회장 둘레에서 어슬렁거리던,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세 사람을 KT 노무관리팀 과장이라며 밖으로 몰아내는 일이 일어났다.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가 연신 터질 때까지도 이날 이 사건은 단순히 KT노조의 어용 행태를 규탄하는 이벤트성 시위 정도 끝날 것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예상이었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그러나 3일 뒤 이 사건은 엄청난 일파만파를 일으키며 단숨에 민주노총 선거의 가장 큰 쟁점이자 민주노총 혁신의 핵심 의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KT노조가 나서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일부 깽판 세력의 폭력에 의해 무산되었다’며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이고 더 나아가 지재식 KT노조위원장이 ‘끌려나간 사람이 회사 쪽 노무관리팀 과장이 아니라 대의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KT노조 문제는 갑자기 민주노총 혁신의 핵심 의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노총의 중앙위원회는 이러한 KT노조의 주장만을 믿고 대의원대회 폭력무산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기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겨우 하루 만에 밝혀졌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장에 KT 노사협력팀 관리자 적어도 세 명이 사찰을 하고 있었으며, 그날 끌려나간 사람 세 명 가운데 둘은 KT 노사협력팀 과장이었고, 그자들과 같이 있던 KT대의원 한 명이 노사협력팀 직원으로 잘못 여겨져 밖으로 밀려나오게 된 것이 확인되었다. 도대체 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열리는 곳에 KT 노무관리팀 과장들이 그것도 세 명씩이나 나타났는가! 왜 KT노조원을 포함한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KT는 민주노총 의사 결정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펴며 들어가려는 걸 막으려 했을까!
알다시피 KT노조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던 노조다. 5만 명이 넘는 남한 최대 규모의 조직과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까지 노조조직이 굳게 자리 잡아 오던 진정한 의미의 전국 조직을 자랑하면서 놀랄 만한 투쟁의 위력을 보여주었던 노조이다. 우리 노동의 역사에서 한때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주범이었던 임금가이드라인 정책을 역사의 뒤안길로 묻어버리는데 앞장섰던 노조! 문민정부 출범을 계기로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신 노사관계’를 들먹거리며 거드름을 피우던 김영삼 정권의 반 노동자성을 단 한 방에 폭로한 ‘한통사태’의 주역이기도 했던 그 KT노조는 오늘날 민주노총이 노동자의 조직이냐 자본의 협조주의 세력이냐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말았다.
요즘 민주노총 선거는 사실상 KT에게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여전히 엄청난 쪽수를 자랑하는 KT노조는 민주노총의 그 어떤 투쟁 방침에도 참여하지 않는 반면 여러 선거에는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는 물론 지역의 대전본부, 경남본부 들에서도 이에 따른 문제가 벌써 일어난 바 있다. 그래서 심지어 지금 KT노조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민주노총 내일의 모습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KT노조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지금 KT노조는 자본에게 구성된 노무관리 기구에 불과하다. 명백한 보기로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KT노조 선거에서 지재식 집행부는 조합원의 97%의 투표에 참여해서 그 가운데 90%의 지지를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런데 겨우 그 선거가 있은 지 열흘 뒤에 치러진 ‘비정규법안 개악저지를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 찬반 투표’는 1%도 투표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하지 못했다. 투표를 하고 싶어도 투표를 할 곳이 없는 형편이었다.
KT노조 선거를 보면 KT노조의 본질을 알 수 있다. KT의 노조 선거는 노동자들이 하는 게 아니라 KT 노사협력팀 지휘 아래 전국의 과장, 부장 같은 관리자들이 하는 셈이다. KT노조는 423개 투표소 별로 분산투·개표를 하고 있다. 그 가운데 심지어 스무 명이 안 되는 투·개표소마저 있다. 이런 분산된 투·개표를 악용, KT 노사협력팀은 관리자들에게는 어김없이 이른바 득표 목표를 준다. 지난해 10월 선거에서는 그 목표가 90%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수 노조를 대비해서 ‘민주파’의 득표를 10%가 안 되게 낮춰야 한다는 게 본사 지침이었다고 한다. 이런 목표는 그대로 현실이 되어 지재식 위원장은 90%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무려 51개 투표소에서 퍼펙트, 곧 100% 지지가 나왔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지지의 비밀은 곧 밝혀졌다. 개표할 때 곳곳에서 부정투표 용지가 발견되었다. 기표란의 특정 구석에 표시된 사실상의 공개투표 용지가 무더기로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투표 부정행위와 관련된 제보는 선거 전부터 줄을 잇고 있었다. 과장, 부장 같은 관리자들이 면담을 하면서 지재식 후보 표가 90% 이상 나오지 않을 경우 우리 지점이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호소는 차라리 애교 정도로 넘길 수 있다고 치자. 면담 과정에서 ‘노사협력팀이 너는 민주후보 찍을 것으로 분류하고 있더라’하면서 기표란의 특정 구석에 기표하라는 지시를 하는 따위 자유당 선거를 생각나게 하는 엄청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 KT노동조합 선거 당시 발견된 부정투표용지 [출처: KT노동조합] |
이런 불법 선거를 걱정해서 시민단체가 나서서 선거 전부터 공개감시단을 구성해서 투·개표 참관을 요청했지만 KT노조는 이를 거부했다. 선거가 끝나고 KT 투표용지증거보존신청을 내놓고 있다. 이에 따라 법원 판사가 나서서 증거보존을 위한 확인절차를 진행시킨 바 무려 12,000장의 투표용지에서 문제가 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문제는 이렇게 노사가 짠 일들이 선거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KT노조 사무실에 조합원으로서 방문이라도 하려치면 어김없이 회사 경비원들이 나서서 출입을 가로막는다. 도대체 노조원의 노조 사무실 출입을 회사 경비원이 막는데도 팔짱만 끼고 있는 노조를 우리는 어용노조 아니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심지어 재야 어르신네들이 포함된 공개감시단의 항의 방문조차 경비원들이 막무가내로 막아 무산되었던 게 KT노조의 현실이다.
이렇듯 KT노조가 활발하게 자신의 어용적 행태를 드러낸 때는 민주노총의 위기가 심각해지는 때와 정확하게 맞물린다. 이제 KT 노사협력팀 직원은 KT노조 대의원대회가 아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까지 나타난다. KT노조는 민주노조 운동 판에서 조용히 소리 소문 없이, 투쟁을 피하고 노사가 짜는 어용 같은 행태만 보이고 있는 게 아니다. 이제는 자신감을 갖고 KT노조를 비판하는 세력들을 민주노총 파괴세력으로 규탄하며 막강한 표와 돈을 갖고 민주노총을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전, 경남 민주노총 선거에서도 KT대의원의 부정투표 시비와 함께 KT집행부가 사실상 민주노조 운동의 지도부가 나아갈 길을 결정했다. 이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모두가 KT노조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도 KT 문제를 중심으로 민주노총을 혁신하려는 움직임은, 표를 계산해야 하는 현실의 노동 관료들 때문에 거듭 좌절되어 왔다. 노사담합의 증거가 명확한데도 노사담합 선거 진상조사는 민주노총 규율위원회에 제소된 지 4개월이 넘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다. 이른바 잘 나가는 노동관료들 가운데 누구 하나 책임지며 이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요즘 여기저기서 민주노총의 위기니 노동운동의 위기니 하는 위기론이 최고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노동운동의 운동적 기풍 회복 없이 민주노총 혁신 없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 한가운데 KT노조가 있다. KT노조 문제는 단순히 단위사업장의 문제를 넘어 민주노조 운동 혁신의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KT노조의 목을 쳐서 민주노총의 혁신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민주노총이 KT노조화 되느냐의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이다.
어쩌면 KT노조가 민주노총의 리트머스 시험지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게 KT노조원일지 모른다. 내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참관하려고 휴가를 냈다가 결근 처리된 것을 딱하게 여긴 한 조합원이 나에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얘기를 물었다. 그 조합원이 볼 때 KT노조 간부들이 민주노총 판에서만큼은 찍소리도 못 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던 차에 나한테 그날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분위기를 전해 듣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민주노총에도 KT가 어용이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그럼 민주노총도 어용이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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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님은 KT노조 조합원이며, 이 글은 월간 작은책 4월호에 기고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