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W. 쉼보르스카는 <시대의 아이들>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너와, 우리와, 너희의 모든 일들 / 낮과 밤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 이 모든 것이 정치적 / 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의 유전자에는 정치적인 과거가, 우리의 피부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우리의 눈동자에는 정치적인 양상이 담겨 있다.”
쉼보르스카의 생애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지만, 어떤 이들은 이 시가 정치의 절대적 영향력을 강조하고 누구나 거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기 위해 쓰인 게 아니라고 부언한다. 실제로 그녀는 나치 절멸 수용소, 스탈린 비판, 현대 문명 비판 등을 주제로 시를 쓰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정치로 환원하는 시대 속에서 쉽게 은폐되고 마는 ‘사소한 것들’의 의미를 발굴하기 위해 분투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치 바깥으로 내몰린 것들을 시어로 벼려내는 작업은 사실 그 자체로 철저히 정치적이다. 대사건이 동반하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무화(無化)되는 것들을 구원하려는 시도가 변방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역시 그래서다. 온화한 탈(post)-정치적 시어는 때로 직설적인 혁명 구호보다 더 불온하다. 모르긴 몰라도, 쉼보르스카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그러나 탈-정치를 표방하는 모든 시도가 이러한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어떤 탈-정치는 역사 바깥으로 내몰린 존재들의 정치를 원천 봉쇄하려 한다. 그러고 보면 탈-정치의 외피 속에서 기성 정치 시스템과 지배 이데올로기가 재생산되는 광경은 결코 낯선 게 아니다. 그 시도가 혁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세대를 넘어선 지배 구조의 지속은 혁신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혁신은 때로 가장 보수적이다.
최근 탈-정치와 노동운동의 혁신을 표방하는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이하 새노협)’가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MZ노조’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MZ가 아닌 조합원을 상당수 포함하는 노조가 계속 ‘MZ노조’로 호명되는 건, 아마 ‘이 세대의 혁신성’(?)이 대중들로 하여금 기성 노동운동의 ‘꼰대성’을 상기하게끔 해줄 것이라는, 수구 언론의 무책임하지만 효율적인 선전 전략이 반영된 것일 공산이 크다. 새노협 대표자들도 스스로를 ‘MZ노조’라 규정한 적이 없다 말하면서도, 자신들을 차별화하는 수단으로 ‘MZ성’을 자주 부각하고 있지 않은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흔히 오해되듯 이들의 ‘탈-정치성’이 단순히 ‘비-정치성’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 과잉에서 벗어나는 게 노조의 본질”이란 주장으로 유명세를 탄 송시영 새노협 부의장마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건 하나도 없다.”
그럼 이들의 탈-정치가 지향하는 정치란 도대체 무엇일까? 새노협은 ‘공정’의 기치 하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한다. 나아가 구성원 상당수가 결사 투쟁을 거부한다. 조합원들의 이익과 직결돼 있지 않은 운동에 대한 연대는 쓸모없으며, 이는 조합원들의 피로도를 높일 뿐이다. 그러니 건설노동자가 분신한 날에도 ‘낡은 광장’이 아니라 ‘핫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나도 무방하다. 한편, 사회운동의 요구가 무엇이건 자신들에게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앞장서 진압하는 게 ‘본질’을 지키는 노조의 임무다. 자기 직장이 ‘공공성의 이름으로’ 피해입지 않도록, 공공요금을 올리고 노인 무임승차를 폐지하며 지하철 요금을 인상해야 한다. ‘정치 구호 없는 노동조합’은 그렇게 기성 정치가 전통적으로 억눌러 온 목소리를 기성 정치의 문법에 따라 원천 차단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반(anti)-정치의 정치’다.
‘MZ노조’가 ‘힙’하게 반복하는 기성 정치의 문법들
새노협의 기조 중 정작 새로운 건 거의 없다. 폐쇄적 조합주의를 실천하는 종래의 ‘귀족노조(?)’가 적으로 선언되지만, 사실 이들이야말로 조합주의의 진정한 계승자다. ‘주 69시간 근무제 반대’를 제외하면 사측의 입장과 거의 동일한 요구만을 반복하는 새노협 대표자들도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 자체로 어용노조는 아닐지라도 종래 어용노조의 역할을 이미 일정 부분 떠맡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한편 이미 유효기간이 다한 것만 같은 기성 정치는 이 ‘낡은 노조의 변종’을 통해 자신들의 생명선을 연장할 근거를 마련 받고 있다.
수구 정치인들, 언론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새노협은 윤석열의 노동개악 드라이브와 이에 편승한 보수언론의 기성 노조에 대한 공격 없이는 지금만큼 성장할 수 없었다. 새노협 대표자 일부가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사측의 적’을 공격하는 데 올인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현재 새노협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가진 건 단연 서교공 ‘올바른노조’인데, 이들은 그러한 전술에 특히나 능하다. 마침 이들에게는 강성노조 외에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딱 좋은 적이 있다. 당장 그들의 노동 현장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지하철행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송시영 올바른노조 위원장은 언론을 통해 몇 차례나 전장연을 직접 저격했다. ‘공공성’과 ‘연대’를 표방한다는 민주노총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조차 전장연에 적절한 방식으로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속속 제기되고 있건만, 그에게는 이 소극적 태도마저 ‘정치 과잉’으로 평가된다. 올바른노조는 결국 이 정치 과잉 행태를 참지 못하고 지난 4월 20일 오랜 기간 기성 정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장애인단체와 함께 전장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올바른노조의 전장연 공격에서 특히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이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낡은 논리다. 송시영은 “전장연이 문재인 정권 때는 뭐 하다 이제 와서 정치쇼를 하냐”고 말한다. 민중 저항을 ‘거대 양당 정치’ 프레임에 집어넣어 그 의미를 깎아내리는 건 주지하다시피 기성 정치의 단골 수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을 구사할 때는 ‘유서 깊은 전통’에 따라 팩트 따윈 가볍게 무시해도 상관이 없다. 실제로 전장연이 ‘지하철행동’을 시작한 건 2021년 12월 문재인 정권 때다. 그때만 해도 각각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윤석열과 이재명의 지지율은 박빙이었으며, 누가 당선될 것인지를 예측하기도 힘들었다. 아울러 전장연의 지하철행동은 박원순의 서울시장 임기 때도 이뤄졌다. 당장 2018년 신길역 리프트 추락참사 때도 전장연은 서울시·서교공의 사과를 요구하며 ‘지하철행동’에 나서지 않았던가.
심지어 이들은 곧장 자신들의 실익이 걸린 문제에서도 실익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기성 정치의 논리를 답습한다. 송시영은 한 인터뷰에서 “그렇잖아도 인력이 부족한데, 전장연 시위가 벌어지면 인력이 몽땅 거기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한탄했다. 나아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휠체어용 발판을 무조건 가져오지 않으면 열차를 붙잡아 두겠다고 전장연에서 으름장을 놓았는데, 이것도 안타깝다. 직원들이 발판을 나를 만큼 인력에 여유가 없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승강장 틈 사이로 전동휠체어 바퀴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놀랍게도 그는 이미 서교공 노동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무엇인지를 은연중에 언급했다. ‘승강장 틈으로 휠체어 바퀴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근본’이라 묘사하긴 했지만, 사실 그의 말을 잘 따져보면 진짜 근본 문제가 ‘인력이 부족한 것’임은 금방 드러난다. 더군다나 승강장 틈으로 휠체어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말은 곧 ‘휠체어가 승강장 틈에 빠지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는 뜻인데, 정말로 “발판을 나를 만큼 인력에 여유가 없을 정도”라면 서교공의 인력 부족은 심각한 상황이다. 전장연의 ‘지하철행동’ 시 필요 이상의 인력이 과잉 진압을 위해 낭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이 정도로 ‘애초부터’ 인력이 부족한 게 문제라면 그는 ‘노조의 본질’에 맞게 대규모 인력 충원을 우선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최우선으로 맞서 싸울 상대는 서울시와 정부, 사측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오래전부터 구조조정, 인력 감축에 반발해 온 서울교통공사노조와 잠시라도 손을 잡는 게, 이들에게는 분명 ‘실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자신들이 ‘노조의 본질’이라 이야기한 ‘실익’보다 당장 눈앞의 적을 진압하는 게 더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 이들이 손잡을 수 있는 세력이란 구질서의 재생산을 가장 바라는 수구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1 안타깝게도 이 동맹은 벌써부터 서교공 노동자들을 자멸의 길로 이끌고 있다. 올바른노조가 전장연 ‘지하철행동’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오세훈과 입을 모아 ‘대중교통 정시성’이라는 해묵은 패러다임을 복고하려 하는 것은 어떠한가? 참고로 2016년 구의역 하청노동자 김군 참사 이후 서울시는 대중교통의 패러다임을 ‘정시성보다 안전성’으로 바꿨다. 이미 폐기된 낡은 성장주의 패러다임의 부활 시도가 인력이 부족해 고생하는 자신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올바른노조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긴 한 것인가? 멀지 않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콜센터 직고용 및 자회사 전환’에 억울해할 뿐, 거기서 어떠한 ‘계급적 실익’도 발견하지 못하는 노조가 이 정도 생각에 미칠 수 있을 리는 없어 보인다.
“MZ는 6.25도, 군사독재나 민주화도 겪지 않아 이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송시영의 말이 가진 허구성은 올바른노조의 행보를 통해 매 순간 입증되고 있다. MZ의 독특함을 아무리 강조해 봐야 MZ 역시 6.25와 군사독재, 민주화, 그리고 성장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새로운 세대성을 걸고 아무리 혁신을 외친다고 해봐야 낡은 정치와 손을 잡고 기성 이데올로기를 답습할 뿐이라면, 그것은 그저 낡은 역사를 다르게 반복하는 것과 같다. 조끼 대신 후드티를 입는다고, 그들이 자부하듯 기존 노조들보다 ‘힙’하고 수평적인 회의체를 꾸린다고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
예견된 ‘탈-정치적 반-정치 노조’, 이제는 ‘노조의 본질’을 되찾길 바란다
새노협의 힘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조합원은 어느덧 8,000명(5월 기준)을 넘어섰고, 올바른노조는 서교공 산업안전보건위원회 노동자대표 선거에서 양대노총 단일 후보에게 승리했다. 어떤 이들은 새노협을 이명박 정권 때의 ‘국민노총’처럼 곧 사라져 버릴 일시적인 반동으로 평가하지만, 이미 사회적 영향력을 상당 부분 획득한 반-정치 운동에 대한 섣부른 과소평가는 이후 벌어질 더 큰 재앙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서교공 노동자들의 전장연 회원들에 대한 폭력은 점점 강도가 세지고 있다. 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올바른노조는 ‘자신들이야말로 사회적 약자’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세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동조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설령 새노협이 금세 몰락하더라도, 새로운 세대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 탈-정치적 반-정치의 물결은 언제든 또 다른 형태로 재출현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이런 성격의 움직임은 새노협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 이화여대 시위를 추동한 공정 이데올로기와 ‘학생증 검사’까지 불사한 ‘순수한 당사자주의’, ‘정치 발언 금지’, ‘운동권 배척’은 어땠는가? 노동자와 사회운동의 깃발과 구호를 애써 배제해 가며 20년을 이어온 촛불 시민들은 어떠했는가?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전혀 무관심하거나 아예 강경 진압을 요구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없었나? 그러고 보면 올바른노조가 자신들을 ‘일베’로 모는 것에 반발하는 것은 정당하다. 올바른노조와 유사한 행태는 ‘일베’ 안에서만 발생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은 스스로가 ‘상식’적이며, ‘민주적’이라 믿고 있는 시민들, 심지어 극우 세력을 혐오하는 ‘세련’된 시민들이 주체가 돼 만들어 온 움직임들이다.
송시영은 말한다. 전장연의 요구에 대해 서교공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지하철 노동현장에서 장애인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장애인을 ‘배려’,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 자체가 실은 기성세대의 낡은 장애관이다―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그러니 다른 곳에 가서 시위를 하라고. 전장연의 요구 중 하나가 그간 벌어진 지하철 리프트 참사들에 대한 책임 있는 사과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얼핏 봐도 사실이 아니다. 지하철행동의 탈시설 요구에 서울시가 맹폭을 가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나아가 ‘지하철행동’은 장애인들을 당연한 것처럼 배제하고서 작동해 온 이 문명 전체에 대한 저항이다. ‘지하철행동’의 요구들은 사회적 자원의 분배권 문제와 직결돼 있으며, 이는 곧 민주주의의 주체인 우리들 모두의 문제다. 마침 지하철은 이 배제의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전장연의 요구뿐 아니라, 모든 민중 저항의 요구들은 이 사회 모든 장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당신들이 요구를 당장 해결할 권한이 없다고 해서, 당신들에게, 나아가 이 낡아빠진 사회 시스템에 매일 같이 복무하는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아무리 외쳐봐야 들으려 하지 않는 권력의 본거지에서, 기성의 상식에 맞게 합리적 대화를 시도한다 한들 아무런 변화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그들이 가장 절박할 때, ‘낡은 상식’의 ‘힙’한 반복은 결코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이 합리성, 상식의 이름으로 당신들이 손잡은 수구 세력이 아니라, 당신들이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믿고 있는 들, 심지어 당신들이 적이라 믿고서 앞장서 진압에 나서고 있는 사회운동과의 ‘연대’뿐이다. 새노협을 포함해 ‘혁신’의 이름으로 연대를 거부하는 모든 움직임이 더는 자멸의 길을 택하지 않기를 바란다. ‘MZ노조’(정말로 그런 게 있다면)가 조속히 자신들의 ‘실익’을, 그러므로 ‘노조의 본질’을 되찾기를 기원한다.
<각주>
(1) 유준환 새노협 의장과 박재민 코레일네트웍스본사 일반직노조 위원장은 노동자 실익이 걸려 있는 문제에서 양대노총과 손을 잡는 게 가능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적어도 송시영 부의장은 언론을 통해 강성노조 비판에 심히 열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