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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빈궁을 그려낸 사회주의 작가, 백신애

[혁명을 꿈꾼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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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사회주의 여성작가로 알려진 강경애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한 명의 작가가 백신애다. 강경애는 전업 소설가였지만 백신애는 작품 활동만큼 사회주의 활동을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백신애(1908~1939)는 경북 영천의 부유한 가정에서 1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난 여성 사회주의자이자 작가다. 어릴 때 이름은 무잠(武簪), 호적에 기재된 이름은 무동(戊東)이다. 아버지 백내유는 정미소, 포목, 잡화 등의 장사로 부자가 된 소문난 상인이었다. 백씨네 돈이 마르면 영천의 돈도 다 마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가정에서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어머니 이내동은 양반 가정에서 태어나 봉건적인 교육을 받은 전통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백신애가 근대 교육을 받을 기회는 처음부터 봉쇄됐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교육관이 주요 원인이지만 오빠 백기호의 사회주의자 활동이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딸의 한학교육을 지지하고 일본어 읽기를 허락했지만, 조선어 출판물과 조선어 글쓰기는 정치적 이유로 금지했다.

따라서 백신애는 한문학자인 이모부로부터 집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했다. 이모부로부터 학문적 재능을 칭찬받았지만, 아버지의 봉건사상과 잔병치레로 인해 병약해진 몸은 일반 학교로의 진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학문적 욕망은 독서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신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정도 높았다. 백신애는 오빠가 읽은 소설 작품이나 고전 소설을 주로 탐독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오빠에게 영향을 받아 훗날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백신애

백신애는 1918년 영천공립보통학교와 경북도립사범학교 단기 강습과를 졸업하고 1924년 영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경북 ‘최초’의 여성 교사였다. 그리고 경산자인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영천청년동맹, 신간회 영천지회, 근우회 영천지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1926년이 되자 백신애는 서울로 이동해 활동 영역을 확장한다. 1월 5일, 조선여성동우회와 문화소년회 연합으로 개최했던 강연회에서 방정환과 함께 연단에 올랐다. 1월 10일에는 조선여성동우회에서 개최한 신년간친회에 참석했다. 또한 1월 21일 종로구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천여 명이 군집해 열린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개회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거침없는 행보로 다니던 학교에선 권고사직을 당했다. 권고사직이라 하지만 그냥 쫓겨났다고 하는 편이 맞다.

한편,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 1주년 기념식 직후부터 백신애의 활동은 더욱 위풍당당하게 전개됐고 그로 인해 인지도 역시 더욱 높아져 갔다. 1926년 3월 3일에 개최된 조선여성동우회 정기총회에서 정종명, 주세죽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조선여성동우회는 1924년 5월 창립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다. 이 지면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데, 1926년이면 조선여성동우회의 활동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따라서 그 시기 조선여성동우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것은 백신애의 역량을 보여주는 증표라 할 만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반년 뒤인 1926년 8월 14일 시흥군 노량진(鷺梁津)청년회가 개최한 남녀강연회에서 백신애는 ‘여성해방과 경제조건’이라는 제목의 연설에 나섰다. 8월 16일에는 종로구 파일청년회가 개최한 남녀정사(情死) 비판 강연회에서는 ‘정사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라는 과감한 논의를 펼치기도 했다. 10월에는 고향에서 영천청년동맹 활동을 이어가는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이후 백신애는 약 1년 정도 시베리아행 열차를 타고 사라진다. 백신애가 러시아에 가게 된 이유와 그곳에서의 행적이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녀의 역량을 고려하면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된 상부의 지시와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백신애의 자전적 소설에 러시아 여정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돼 게베우 극동본부 유치장에서 한 달 동안 지낸 후 추방됐다는 내용이 소설에 실려 있다. 실제론 가짜 여권을 구해 한동안 시베리아를 방랑하다가 1927년 상반기에 귀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간도나 러시아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조선 민족의 국경을 초월한 연대를 그린 작품이 〈꺼래이〉다.

‘꺼래이’란 ‘고려’의 러시아식 발음으로 일제의 폭압에 조국을 잃고 황량한 시베리아를 떠돌던 수많은 백성을 가리킨다. 당시 조선은 일본 은행의 산업 자금에 의한 고리대를 통해 궁핍화가 심화한 상태였다. 일본의 수탈 정책에 희생돼 농촌의 자작농 중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조선 민족의 이주는 대부분 이러한 상황에서 비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었으며, 〈꺼래이〉는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경계적 공간을 배경으로 조선인의 디아스포라 현상을 다뤘다.

〈꺼래이〉는 1934년 《신여성》에 처음으로 발표됐고, 1937년에 개작돼 《조선여류문학선집》에 게재됐다. 러시아 체험을 드러낸 또 다른 텍스트는 1939년 《국민신보》에 실린 일본어 수필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다. 다른 시기, 같은 경험에 대해 쓰고, 고치고, 회상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모험과 낭만이 아닌, 고난과 사상이 엿보인다. 전체적으로는 계급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백신애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7년 11월 경주, 영천, 영일, 영덕 등 4개 군의 연합 기자 단체인 ‘경동기자동맹’ 제3회 대회가 영천에서 결정될 때였다. 이때 그녀의 이름이 서기로 기재돼 있었다. 1928년 2월 1일 ‘영천청년동맹’대회에서 위원으로 활약했고, 2월 10일 신간회 영천지회 창립 1주년 행사의 준비위원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영천지역의 활동에 집중했다. 무엇보다 당시 신간회에 이어 좌우통일 여성단체였던 근우회에 깊이 관여했다. 근우회 영천지회 설립을 위한 임시의장직을 맡아 1928년 6월 2일에 근우회 영천지회 창립대회에서 직접 사회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7월 15일부터 3일에 걸쳐 근우회 임시 전국대회가 열릴 때, 정칠성,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집행위원 23인 중 한 명으로 등장했다.

1929년에는 박계화라는 이름으로 쓴 자전적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가 조선일보에 당선되면서 문학계에 등단했다.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한 ‘첫’ 여성작가가 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청년회 주최의 소인극 연습을 하다가 귀가가 늦어져 어머니와 갈등을 빚게 된다는 내용이다. 백신애가 고향인 영천에서부터 연극을 했고 일본에 가서도 연기 수업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 유학시철 영화 〈모던 마담〉 촬영 당시 모습 [출처: 백신애기념사업회]
실제 백신애는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 예술과에 다니면서 연극에 몰두하기도 했다. 일본에선 ‘조성희(照星姬)’라는 예명으로 배우 활동을 했는데, 1930년 일본 키네마 주식회사에서 제작한 〈모던 마담(モダンマダム)〉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녀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한때 식모, 세탁부, 여급 생활을 하면서 일본 유학을 지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귀국 후인 1933년 부모의 강력한 요구로 은행원 출신인 이근채와 결혼했고, 이후부터 왕성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이 결혼 후 발표됐는데, 대부분 가난한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이혼했고, 1939년 6월 32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는 작품 활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백신애는 1938년 오빠 백기호와 중국 상해를 다녀오기도 했는데 〈청도기행〉(1939)은 1938년 9월 23일부터 10월 15일까지의 20여 일간을 기록한 작품이다.

백신애의 또 다른 대표작 〈적빈〉은 〈꺼래이〉와 같은 해인 1934년에 발표됐다. 《개벽》 11월호에 실렸는데, 조선하층민의 빈궁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 〈채색교〉(1934) 가난한 농민들의 고통을 보여주고, 〈식인〉(1936)에서는 봉건사회의 배경에서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성을 묘사하고 있다. 〈정현수〉(1935)에서는 농촌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밝혀내고 있다.

이 밖에 여성의 왜곡된 정조 개념으로 연인과 헤어지게 되는 〈정조원〉(1936), 지식인 남성의 위선으로 배신당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다룬 〈광인일기〉(1938)도 있다. 조혼한 어린 아내가 옛 연인과 공모해 남편을 살해하는 〈소독부〉(1938)의 경우는 아주 광범위하게 가부장제와 여성문제로 문제의식을 좁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유고작인 〈아름다운 노을〉(1939)에서는 나이 어린 소년을 사랑하는 화가를 통해 여성의 애욕을 대담하게 서술하면서 여성의 능동성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억압을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백신애 작품 경향은 매우 다르다.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소설과 농촌을 배경으로 그곳의 하층민들을 묘사한 소설도 있지만, 가부장제와 가부장의 권력에 대한 백신애 특유의 낭만적 태도로 인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젠더적 관점에서는 양가적이고 모호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백신애는 러시아, 일본, 중국 등 당시의 세계사적 공간을 경험했고, 이를 작품에 녹여낸 색다른 경험의 작가이다. 백신애의 사회주의 활동은 매우 탁월했으며, 작품 세계는 ‘주변성’, ‘타자성’, ‘여성성’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2008년에는 영천 시민운동장 근처에 백신애 문학비가 건립됐다. 백신애가 태어난 영천 창구동에는 그녀의 출생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백신애 문학상을 해마다 개최하는데, 올해 2023년 4월 15일에 제16회를 맞이할 정도로 깊이 있는 문학상이 되었다. 경북 영천이 사회주의 작가인 백신애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남다르다.

〈참고문헌〉
- 노지승,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념과 혁명: 백신애 글쓰기와 삶에 대한 주석달기”, 《구보학보》 18집, 구보학회, 2018.
- 류진희, “백신애의 방랑과 기행-여성 사회주의자의 동북아시아 루트와 반제국 서사-”, 《사이間SAI》 제28호,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20.
- 부설화, 〈백신애와 정령 소설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 비교〉,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논문, 2022.
- 이자화, 〈한국현대소설에 나타난 가난서사 연구-1990~2000년대의 소설을 중심으로〉,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학위논문, 2018.
- 이진아, “신여성을 둘러싼 기표와 현실: 장혁주와 백신애”, 《정신문화연구》 제42권 제1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
- 홍혜원, “백신애 소설에 나타난 접경의 양상과 교차성”, 《구보학보》 24집, 구보학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