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으로,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고위험 기술”1)
“독일에서 핵에너지 사용으로 3세대가 혜택을 받았지만 앞으로 약 3만 세대(世代)에 걸쳐 계속 핵폐기물의 영향을 받을 것”2)
— 독일 환경부 장관, 슈테피 렘케(Steffi Lemke)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사람의 매끄러운 일상이 무대 위에 오른다. 무대 주변은 암전. 스포트라이트는 잘 닦여진 바닥과 소품들의 표면을 반짝인다. 비명 지르는 이의 입은 ‘안전하게’ 틀어막아라. 무대 위로 난입하려는 자를 잡아 옭아매 ‘보호하라’. 극장 벽 너머 전쟁과 학살이 이뤄지고 있지만 오늘의 연극 역시 세련됐다. 어제와 같이. 다시, 반복. 또, 또다시 반복. 우리는 등과 등을 맞대어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할 운명에 빠졌다. 다른 장면을 바라보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등을 기대던 누군가 쓰러져 죽을 때, 나를 살아있게 했던 이의 존재를 체감한다. 뒤로 고꾸라지며. 여기 총구 없는 전쟁터에서는 사망자 수는 있지만 죽음은 없고, 손실은 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핵발전 문제를 접하며, 나야말로 자본가들이 운영하는 인생극장의 맹목적인 관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탈핵신문〉과 탈핵 운동가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일평생 사용한 전기 중 상당량이 핵발전소에서 만들어 낸 전기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전력계통도’를 살펴보면 국내 발전소의 위치와 송전선로가 수십 개의 별자리를 포개놓은 것처럼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내가 쓰고 있는 전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보라.) 다큐멘터리 영화 〈월성〉에 등장하는 방사능에 노출된 발전소 인근 주민의 이야기, 핵폐기물 처리 문제 그리고 체르노빌(1986년 4월 26일)과 후쿠시마(2011년 3월 11일) 핵발전소 폭발 사고는 우리가 어떤 위험과 곤경에 기대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가르쳐주고 있다.
80여만 명의 피폭자, 최대 1만 6천 명의 생명을 앗아간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고 37주기를 즈음한 때였다. 독일 환경부는 마침내 완전한 ‘탈핵’을 이뤘다고 선언하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독일 환경부 장관은 핵발전이 “궁극적으로 완전히 통제불가능한 위험(ultimately, the risks of nuclear power are uncontrollable)”임을 강조했다. 독일에 남아 있는 최후 세 개의 원자로, 남부의 이자르 2호기, 네카베스트하임 2호기, 북부의 엠스란트 핵발전소가 2023년 4월 15일부로 완전 폐쇄됐다. 독일 환경부 홈페이지 대문에는 폐쇄된 핵발전소를 배경으로 독일이 핵발전 시대를 종언했음을 알리는 문구가 걸려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사실이었다. 내가 마주해야 했던 가까운 현실은 독일의 탈핵 선언에도 아무런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었다.
올해 초, 경북 울진을 여행 삼아 찾았다. 처음 도착한 곳은 한울핵발전소와 인접해 있는 읍내였다. 고개만 돌리면 둥근 머리를 한 격납고가 해안가에 일렬로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식사를 위해 찾아간 음식점 대문에는 ‘탈원전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빛바랜 선전물이 대문에 붙어 있었다. 부정에 부정을 덧댄 문장을 보자 마음 한켠 모래알이 쓸리듯 아렸다. 식후 잠시 쉬러 들른 교육도서관에는 ‘한울원자력 발전소 기증’ 스티커가 붙은 책들이 곳곳에 꽂혀있었다.
그날 저녁, 국내에 유일하다는 자연용출 온천인 덕구온천에서 하루를 묵을 참이었다. 온천 입구 로비에는 2022년 울진-삼척 산불을 기억하기 위해 지역 작가들이 타고 남은 나무로 만든 목공예품을 팔고 있었다. 알고 보니 온천리조트를 사방으로 둘러싼 산등성이에도 산불이 났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읍내로 돌아가는 버스 차창 너머로 비로소 검게 탄 채로 서 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투명한 아침 햇살에 더욱 선명해진 참상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산불은 한울원자력발전소가 있는 부지 안으로까지 번졌다.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니 발전소 전기를 송전선로로 공급하거나, 공급받는 전기설비인 ‘스위치 야드’까지 인접해 외부 전원이 끊기는 일도 있었다. 핵발전소의 주 기기들은 외부 전원을 가져다 쓰기 때문에 외부전원을 끌어다주는 송전선로가 화재에 휩싸이면 핵발전소의 위험성은 그만큼 높아진다고 했다.3)
핵폐기물 처리 문제까지 생각하면 골치는 더 아파진다. 정부는 핵폐기물인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모두 핵발전소 부지 내에 보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경주 월성핵발전소 부지에 1992년부터 핵폐기물을 보관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조밀저장시설인 맥스터를 건설했고, 2023년 현재 정부는 이곳에 맥스터를 증설했다.) 인근 주민들은 핵발전소 위험에 더해 핵폐기물을 보관하는 데 따르는 위험까지 떠안게 될 위기에 처해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고압 송전선로를 타고 전해지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의 눈이 밝히고 있는 도심은 여느 때처럼 활기가 돈다. 공장의 기계는 24시간 멈출 줄 모른다.
국내에는 울진 외에도 부산 기장군, 울산 울주군, 경북 경주, 전남 영광에 총 25기의 핵발전소가 있다. 모두 해안 지역이며, 노령 인구가 대부분인 소도시이고 몇몇 도시는 ‘경계지역’들이다. 윤석열 정부는 핵발전소를 지원하고 확대하겠다는 기조로 일관하고 있다. 탄소중립을 위해,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 말이다.
핵발전과 자본주의는 닮았다
자본주의는 속임수에 능하다. 자본주의는 갖가지 ‘기술 혁명’과 편리성(효율성) 그리고 풍요로움을 내세우며 지구 공동체를 복속하려 든다. 살생 기술을 활용한 전쟁과 통제되지 않는 위험성, 노동자의 몸과 자연에 대한 수탈과 착취는 어쩔 수 없는 것이거나, 없는 일인 것처럼 꾸미면서 말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서 ‘에너지’를 빼앗아 갔다. 민영화된 국내 발전공기업은 우리에게서 에너지를 다 빼앗아 가놓고는 ‘당신이 우리의 에너지입니다’라고 공공연하게 사기 광고를 내고 있다. 파괴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생산해 놓고서는 민중들에게 전기를 팔아 이윤을 챙기고 있다. 정부는 공기업 적자 논리를 내세워 민중의 주머니를 털고, 에너지 기업은 공기업에 비싸게 에너지를 팔아 돈방석에 앉는다.
보다 근본적으로, 과학 기술과 문명의 외피를 입은 자본주의는 지구에 살아가는 민중들이 스스로 삶을 살아가도록 추동하는 힘을, 생태적이고 독립적인 에너지 체계를 파괴시켰다. 우리를 전기적 작용과 자기장으로 가득한 기계 더미 안에서 살도록 강요했다. 자본주의가 내포하는 식민주의란 대개 이런 방식 아니었나. 자본주의는 ‘문명화된 삶’으로 포장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삶의 양식을 우리의 내면과 생활 곳곳에 심어놓으려 했다.
몰이성의 극치인 핵발전을 논하기 전에, 먼저 전기 문명을 간략하게 비판해 보려 한다. 오늘날 문명화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전기’ 에너지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태양과 바람, 물과 땅의 힘을 전기적 작용 없이 이용할 줄 알았던 지혜를 전근대적인 고물로 취급한다. 반대로 전기를 이용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세련된 것으로 여긴다. 새로운 전자제품을 사용하고 전기 자동차를 타면 스스로 문명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게끔 만든다. 나는 ‘녹색’ 이름표를 단 활동가가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모두 재생에너지 발전 기계를 통해 전기화(電氣化)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뜨악한 적이 있었다. 우리의 내면은 전기가 부리는 마술에 현혹되고,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파괴됐다.
많은 이들과 비슷하게 나도 전자제품과 LED 전등 속에 파묻혀 살아간다. 이를 감안하면, 설득력이 없거나 퍽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 것 같다. 전기는 때로는 유용한 도구일 수는 있으나, 타자와 관계 맺고 연결성을 회복하기에 적합한 매개는 아니다. 도체로 이뤄진 길고 긴 전선은 전기를 나르는 것 외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전기는 그 자체로 납작하게 대상화한 에너지로서만 의미를 얻는다.
나아가 ‘반도체’는 전기 작용에 대한 인위적인 통제를 극대화한 발명품이다. (전기가 흐르는 도체를 사람이 조절하긴 어렵지만, 반도체는 불순물을 정교하게 주입함으로써 인공적인 조작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아는 전자제품에는 모두 반도체 기판이 들어가 있지만, 제품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전원 버튼을 누를 뿐. 그래서 문명화한 인간조차 전기와 전자제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애석하게도 고장 나면 스스로 고칠 수도 없다. 석탄을 때우든, 우라늄을 핵분열시키든, 태양전지를 이용하든, 풍력발전 터빈을 이용하든 간에 전기를 만들어야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양식을 두고 발달한 문명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핵발전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증폭될 수 있도록 해준 중요한 물리적 토대 중 하나다. 무한한 착취와 이윤 축적을 위해서는 중단 없는 에너지 공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밤낮 가리지 않는 우라늄의 연쇄적인 핵분열은 높은 효율을 가져다주었고, 전기 에너지를 만드는 데 가장 낮은 비용이 들었다. 핵발전은 신자유주의 시계(時計)를 돌리기에 알맞은 동력이었다. 한편 위험을 외부화하려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핵에너지 체제에서 극치에 다다랐다. 발전 과정과 발전 이후 폐기 단계에서의 방사능 유출이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나, 불행하게도 많은 국가의 수장들은 핵발전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망상에 빠져있다.
2022년 말, 핀란드 정부가 지하 450미터 깊이에 건설한 세계 첫 번째 핵 쓰레기통, 온칼로(핀란드 말로 ‘은신처’)의 존재는 우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반문명의 세계로 치닫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핀란드 정부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에 해당하는 ‘사용 후 핵연료’ 9천 톤을 지하 100층 규모의 시설에, 100년에 걸쳐 매립한 이후 완전히 격리할 계획이다. 최소 ‘10만 년’ 동안 그 어떠한 균열도 없이.4)
대안은 어디에.
윤석열 정부의 산업통상자원부와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는 핵발전이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으니 탄소중립에 꼭 필요한 대안적인 친환경 에너지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탄소중립’의 용례가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핵마피아들에게 내미는 대통령의 손은 24시간, 365일 공장을 가동하고 장시간 노동을 착취하도록 빗장을 여는 손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생산 양식을 더욱 강고히 하기 위해 정부는 노동자의 사회적 권력을 억압하고 있다. 자본의 자유를 위해 민중을 통제한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착취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는 원시(原始)와 현대를 나누고 한쪽에는 미개함을, 다른 한쪽에는 문명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이를 통해 선대로부터 지구의 데모스로서 가꿔온 공통감각에 분열을 일으킨다. 마치 노동하는 이가 자본가의 논리를 세례받아 노동자 계급이 아닌 자본가 계급을 온몸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생태계의 일원이자 여러 동물 중 한 종(種)인 인간은 지구의 데모스가 아닌 생태계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자본 권력의 편에 서서, 공멸로 치닫는 이 세계를 우울하게 맞이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진보냐 퇴보냐, 성장이냐 쇠락이냐, 풍요냐 빈곤이냐, 승자냐 패자냐 양자택일 선택지를 계고장처럼 들이밀며 자본주의 아닌 세계에 대한 상상에 공포를 퍼뜨린다. 우리의 대안은 자본주의라는 ‘격납고’에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과학기술’에 관해 논할 때면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이들마저 자기 검열의 덫에 빠진다. ‘내가 원시 사회로 가자고 주장하는 건 아닌데’ 하면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과학 기술의 발전 경로를 어떻게, 어디로 잡아끌고 있는지 폭로하고 저항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에너지를 극단적으로 집약시키는 방식으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과 효용을 독점하고 있다. 그 후과는 무엇인가? 방사성 폐기물과 기후 재난, 만성적인 산재 사망과 같은 통제불능의 위험과 평등하지 않은 기술, 삶을 무너뜨리고 존엄을 저버리도록 강요하는 기술만 즐비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이웃을 값싼 미세 노동(microwork) 공장에 가두고, 이웃의 라벨링 노동으로 구현되는 AI 챗봇과 대화하며 오락을 즐기는 지독한 기술혁명의 세계가 아닌가?
37년 전 원자력 발전소 폭파 사고 이후 체르노빌 이야기로 글을 마치려 한다. 짐작하듯 방사능으로 오염된 체르노빌 폭파 사고 현장에서 반경 30km 안쪽 지역은 출입 금지 구역이다. 지구상 가장 불행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금지령을 무시하고 고향의 작은 마을로 돌아가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복귀 거주자’라고 불렀다. 그들은 방사능에 오염된 땅에 작물을 기르고, 삶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떠난 땅은 다시 야생이 힘을 되찾고 있었다.5) 복귀 거주자의 존재는 ‘체르노빌이 비극의 상징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높은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 방사능 피폭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고향에서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갑작스러운 이주에 소스라치게 외로워서였을까?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떠났던 그 길을 다시 거슬러 돌아가는 걸음을 생각한다. 폐허가 된 고향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각주>
1) 독일 환경부 보도자료 “Germany brings era of nuclear power to an end”(2023.4.13.)
2) 〈탈핵신문〉 2023년 4월호 “독일 탈핵 예정대로 이번 달 완료”에서 재인용
3) 한겨레, “한울 원전 인근 산불은 진화됐지만,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2022.3.4.)
4)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용 후 핵연료의 방사선량이 자연 상태로 줄어드는 데 필요한 시간은 ‘최소 10만 년’이라고 한다. 단비뉴스에서 핵폐기물 처리 문제를 잘 다루었다. “미래 세대에게 ‘핵쓰레기통’을 물려줘도 되나”(2022.9.16.)
5) 마르셀 서루는 이들 복귀 거주자 중 한 여성을 취재한 내용을 모티브로 장편소설 『먼 북쪽』(2014, 사월의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