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리도 어려운 문자 섞어 넣어가며 빙빙 에둘러 얘기하는거요.
시정의 범부에 불과한 내 눈엔
편집위원의 글 자체도
외설스럽다고 얘기하는 그 외설의 서사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소.
정말로 이런 더러운 구조와 고리를 부수고 잘라버리고 싶다면
이른바, 유식(?)하게 쓰는 이런 글버릇부터 고쳐야 할 것이오.
이득재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시원하군요. 이 사건은 황우석 사건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도덕적 감성지수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문제의 비중을 너무 낮게 취급하는 것 같군요. 실은 이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고, 또 그 때문에 결국은 진실에 대해 침묵하고, 그 침묵과 굴종이 하나의 체제로서, 그리고 법률적 합리성으로서, 사회적 관습으로서 지속되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튄다고 하며, 버릇이 없다고 하며, 무슨 자질이 없다고 하며, 반사회적이라고 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하고, 같이 술마시기 불편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신과 관행, 제도가 확립되면 어떤 사회도 밝고 건전하며 효율적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못되냐고 묻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단지 경제적인 요인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만연되어 있는 이 악령같은 권위주의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른바 <신성주의>죠.
그러나 김명호 교수님의 대응에는 약간의 문제 - 물론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 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교수님은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든 체제를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치나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행을 내포하고 살아간다는 점을 느끼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인내심이 생기죠. 그런 경험이 없으면, 분노가 세상을 불태울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혁명과 개혁의 차이은 이런 경험의 깊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명호 교수님은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방법을 사용했죠. 물론 그 방법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서울대 미대의 김민수 교수님은 10년동안 쫓겨난 대학의 연구실을 그냥 하염없이 지켰습니다. 석궁은 사용하지 않고, 그 별볼일 없는 재판과 말만 사용했습니다. 서울대의 권위주의, 신성한 교권주의는 10년동안 그가 제발 학교에서 조용히 나가주기를, 그래서 전기도 끊고, 물도 끊고 정말 유치한 수단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어서, 수위를 시켜 강제로 내쫒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서울대가 지킨 최소한의 양심과 품위였습니다. 그리고는 10년이 지났을 때, 더 이상 그가 혼자 식당에서 밥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없었죠. 그것은 양심이라기 보다, 밖에서 서울대를 어떻게 볼까 하는 그런 것에 대한 우려였습니다. 정운찬 총장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정운찬 총장이 단 코멘트는 서울대의 불편한 심정과 진심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선생은 교수사회의 관행에 따를 필요가 있다, 아마 그런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권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하는 말입니다. 지성과 양심, 용기를 존중해야 하는 대학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학>은 제도와 물질에서 엄청난 진보를 거듭하고 있지만, 정신은 정말 조악합니다. 사실 서울대는 김민수 교수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10년입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활동적이고 꿈많을 30대중반과 40대초를 김민수 교수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그 개인의 고통에 대한 진실한 사죄, 참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앞으로도 계속 교수하고 싶으면 잘 생각해야 할 걸! 이런 식의 충고를 했습니다. 참, 거만하고 부패했죠. 사실 김민수 교수 사건은 단지 그 개인이나 학과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 대학의 정신적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서울대로서는 당면한 급박한 문제였죠. 그 때 그 문제를 사법적인 문제로 적당히 해결하고 넘어가자, 그 다음 황우석 교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참 서울대 위기입니다.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둔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리의 불행에 대해, 김민수 교수가 던지는 메시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단히 어렵죠. 억울한 이 세상, 왜 신은 불로 심판하지 않는 것일까? 이 소돔같은 도시와 인간의 심장들, 왜 돌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것일까? 김민수 교수도 관악산 위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10년동안 마음속으로 흐느끼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정의롭지 않지만, 참을 데 까지는 참으면서, 하나씩 고쳐나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나 저로서도 이런 일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옥중에서 백인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서, 차라리 인종주의자들이 낫다. 너희 반인종주의 백인 친구들은 참으라고만 말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참으라고 하는 것이냐. 너희 백인친구들은 결국 우리 흑인들의 행동을 막는 아편같은 존재들이다. 아마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한국 대학의 미래? 없을 것 같습니다. 담합주의, 집단이기주의로 가득찬 곳이 대학입니다. 지식생산능력은 증발해 버렸고 교수들은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불씨만 남아 있는 곳, 그 곳이 대학입니다. 할 말 참으로 많지만, 이 숱한 커넥션들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불씨에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할텐데, 대학사회를 장악한 신자유주의,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하군요
뭘 그리도 어려운 문자 섞어 넣어가며 빙빙 에둘러 얘기하는거요.
시정의 범부에 불과한 내 눈엔
편집위원의 글 자체도
외설스럽다고 얘기하는 그 외설의 서사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소.
정말로 이런 더러운 구조와 고리를 부수고 잘라버리고 싶다면
이른바, 유식(?)하게 쓰는 이런 글버릇부터 고쳐야 할 것이오.
한 가지 더, 누릿꾼ㅡ>누리꾼, 절딴ㅡ>절단
어렵네요..
외설.. 자극적이네...
이득재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시원하군요. 이 사건은 황우석 사건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도덕적 감성지수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문제의 비중을 너무 낮게 취급하는 것 같군요. 실은 이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고, 또 그 때문에 결국은 진실에 대해 침묵하고, 그 침묵과 굴종이 하나의 체제로서, 그리고 법률적 합리성으로서, 사회적 관습으로서 지속되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튄다고 하며, 버릇이 없다고 하며, 무슨 자질이 없다고 하며, 반사회적이라고 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하고, 같이 술마시기 불편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신과 관행, 제도가 확립되면 어떤 사회도 밝고 건전하며 효율적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못되냐고 묻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단지 경제적인 요인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만연되어 있는 이 악령같은 권위주의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른바 <신성주의>죠.
그러나 김명호 교수님의 대응에는 약간의 문제 - 물론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 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교수님은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든 체제를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치나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행을 내포하고 살아간다는 점을 느끼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인내심이 생기죠. 그런 경험이 없으면, 분노가 세상을 불태울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혁명과 개혁의 차이은 이런 경험의 깊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명호 교수님은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방법을 사용했죠. 물론 그 방법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서울대 미대의 김민수 교수님은 10년동안 쫓겨난 대학의 연구실을 그냥 하염없이 지켰습니다. 석궁은 사용하지 않고, 그 별볼일 없는 재판과 말만 사용했습니다. 서울대의 권위주의, 신성한 교권주의는 10년동안 그가 제발 학교에서 조용히 나가주기를, 그래서 전기도 끊고, 물도 끊고 정말 유치한 수단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어서, 수위를 시켜 강제로 내쫒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서울대가 지킨 최소한의 양심과 품위였습니다. 그리고는 10년이 지났을 때, 더 이상 그가 혼자 식당에서 밥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없었죠. 그것은 양심이라기 보다, 밖에서 서울대를 어떻게 볼까 하는 그런 것에 대한 우려였습니다. 정운찬 총장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정운찬 총장이 단 코멘트는 서울대의 불편한 심정과 진심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선생은 교수사회의 관행에 따를 필요가 있다, 아마 그런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권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하는 말입니다. 지성과 양심, 용기를 존중해야 하는 대학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학>은 제도와 물질에서 엄청난 진보를 거듭하고 있지만, 정신은 정말 조악합니다. 사실 서울대는 김민수 교수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10년입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활동적이고 꿈많을 30대중반과 40대초를 김민수 교수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그 개인의 고통에 대한 진실한 사죄, 참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앞으로도 계속 교수하고 싶으면 잘 생각해야 할 걸! 이런 식의 충고를 했습니다. 참, 거만하고 부패했죠. 사실 김민수 교수 사건은 단지 그 개인이나 학과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 대학의 정신적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서울대로서는 당면한 급박한 문제였죠. 그 때 그 문제를 사법적인 문제로 적당히 해결하고 넘어가자, 그 다음 황우석 교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참 서울대 위기입니다.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둔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리의 불행에 대해, 김민수 교수가 던지는 메시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단히 어렵죠. 억울한 이 세상, 왜 신은 불로 심판하지 않는 것일까? 이 소돔같은 도시와 인간의 심장들, 왜 돌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것일까? 김민수 교수도 관악산 위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10년동안 마음속으로 흐느끼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정의롭지 않지만, 참을 데 까지는 참으면서, 하나씩 고쳐나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나 저로서도 이런 일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옥중에서 백인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서, 차라리 인종주의자들이 낫다. 너희 반인종주의 백인 친구들은 참으라고만 말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참으라고 하는 것이냐. 너희 백인친구들은 결국 우리 흑인들의 행동을 막는 아편같은 존재들이다. 아마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한국 대학의 미래? 없을 것 같습니다. 담합주의, 집단이기주의로 가득찬 곳이 대학입니다. 지식생산능력은 증발해 버렸고 교수들은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불씨만 남아 있는 곳, 그 곳이 대학입니다. 할 말 참으로 많지만, 이 숱한 커넥션들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불씨에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할텐데, 대학사회를 장악한 신자유주의,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하군요
테스트중입니다.
과연 판사의 권위가 깨져야만 올바른 사회가 되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판사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모든 권위가 다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회.. 그게 과연 기자님이 원하는 사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