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타임즈 (http://www.peopletimes.net/) 새벼리라고 합니다. 강내희님의 글, 고맙게 읽었습니다. 외국어로 된 텍스트나 필름들은 원어 그대로 읽혀지는 게 올바르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원어대로 읽을 수 없는 내국인이 많으며, 그런 이유로 '번역'이나 '더빙'산업이 발전해 온 것 아닌가 합니다. 또한, 내국인의 편의를 위한 번역이나 더빙은 원작자의 고유한 '언어'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옮기는 이의 감성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제2의 창작'작업이라 부를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즉, 번역이나 더빙은 그 자체로 이미 제2의 창작행위라는 것이지요. 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번역자나 더빙작업자의 '문화적 수준'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쨋든, 강내희님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인 <다른 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불평등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도 대중매체의 책임이 크다>라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런 강내희님의 주장이 더빙 영화를 사례로 삼으면서, 마치 '외국의 경우는 안 그런데, 한국은 지극히 봉건적이다' 라는 것처럼 읽혀지는 게 제 독해력만의 문제일까요?
번역이나 더빙산업의 저열함을 지적한다거나 혹은 번역이나 더빙산업 종사자들의 후진 봉건의식을 지적하는 것과 <외국어에 없는 남녀 차별의 표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한국문화의 문제>라고 진단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강내희님의 윗 본글 주제의 기반이 되는 전제가 고약스럽군요. 외국어에는 없는 남녀차별의 표현이라니???
저의 이러 저러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불평등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대중매체의 책임>을 되묻는 강내희님의 메세지에 동의하기에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피플타임즈 미디어 비평>란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운 나날, 건필하시길.
말은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은 상대방에게 의사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나타내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하기에 '언어'라는 체계는 언제나 상호간의 구체적인 관계,즉 그 속에서의 '권력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말이 가진 권력은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말인데도 상호간의 위치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폭언이, 어떤 경우에는 성폭력이, 어떤 경우에는 아무렇지 않은 친근한 의사 표시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남성은 말을 놓고 여성은 말을 높이는 것, 한국 사회에서는 흔하디 흔한 현상입니다. 님은 여기서 나타나는 '권력', 그리고 이 권력을 재생산해내는 여성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셨습니다.
님도 써놓으셨듯이 언어 사용의 문제 역시 계급적, 인종적, 종족적, 성차적, 세대적 '차별'이 각인된 문화적 코드가 반영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용하는 데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님은 자신이 줄기차게 역설하신 내용에 위배되는 오류 몇 가지를 범하신 것 같습니다. 님이 쓰신 글의 범위에서 확대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몇 가지 지적하려 합니다.
님은 번역문화 나아가 삶 속에서 드러나는 대화 속에도 포함되어 있는 남성 중심적 권력, 번역자와 더빙작업자를 포괄하는 문화 산업 전반에 퍼져 있는 한국 사회의 여성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나마의 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서구 사회에 비하면, 가부장적 풍토를 쇄신시키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 내용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서구 사회의 모습이 ‘여성/남성이 동등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혁신하지 못하는 성평등 이데올로기는 서구사회나 한국 사회나 명확히 ‘존재’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어디까지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통용되고 있는가’, 즉 확산의 정도에 차이가 있겠지요. 그것을 가늠할 때, ‘언어 속에서 남성과 여성간의 불평등적 표현은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간의 성관계가 자유롭다’ 라는 현상들만이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남성 중심적 언어는 영어에도 나타납니다(man같은), 낙태와 피임으로부터 여성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물론 복지나 제도적 차원으로부터 배려를 받고 있는 서구 사회의 여성들은 한국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월등한 삶의 -물질적-조건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언어를 포함하는 사회적 관습이 바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님께서 고치셔야 할 가장 고질적인 언어 습관이 있습니다. 바로 '매춘'이라는 용어입니다. 매춘(賣春)은 성을 파는 의미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매춘이라는 행위 자체는 성을 파는 것 뿐만 아니라 사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을 사고 파는 행위인 '매매춘(賣買春)', 혹은 가장 명확한 표현인 ‘성매매(性賣買)’로 고쳐 사용해 주십시오.
또한 님도 언급하셨듯 가장 구체적인 삶의 관계 속에서 이런 대화 방식이 재생산되고 있다면, ‘주변 여성이 눈치 채기 어려웠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재서술이 필요한 듯 싶습니다. ‘눈치 채기 어려울 수도 있었겠으나’, 그들에겐 이미 자신의 경험 속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되어 온 일들일 것입니다.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여성들 자신이 그런 처지 속에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하는 무딘 존재로 일반화되게 읽힐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은 여성들이라면, 이미 느끼고 있는 문제입니다. ‘감수성’만 자극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여성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내는 언어 사용과 이를 지배하는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님도 토론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무엇보다 주변부에 있던 여성들, 그들에 대한 억압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수반되는 토론과정이 필요하며 이것이 여론화되고, 사회적 분위기로 장착되는 과정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날카로운 눈이십니다.
학교 다닐 적, 여성학 세미나 할 때 선후배들과 분개하며 나눴던 얘기로군요.. 간만에 들으니 반갑습니다..
몇 년 전에나, 지금이나,
참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인 것들이 많습니다..
피플타임즈 (http://www.peopletimes.net/) 새벼리라고 합니다. 강내희님의 글, 고맙게 읽었습니다. 외국어로 된 텍스트나 필름들은 원어 그대로 읽혀지는 게 올바르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원어대로 읽을 수 없는 내국인이 많으며, 그런 이유로 '번역'이나 '더빙'산업이 발전해 온 것 아닌가 합니다. 또한, 내국인의 편의를 위한 번역이나 더빙은 원작자의 고유한 '언어'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옮기는 이의 감성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제2의 창작'작업이라 부를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즉, 번역이나 더빙은 그 자체로 이미 제2의 창작행위라는 것이지요. 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번역자나 더빙작업자의 '문화적 수준'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쨋든, 강내희님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인 <다른 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불평등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도 대중매체의 책임이 크다>라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런 강내희님의 주장이 더빙 영화를 사례로 삼으면서, 마치 '외국의 경우는 안 그런데, 한국은 지극히 봉건적이다' 라는 것처럼 읽혀지는 게 제 독해력만의 문제일까요?
번역이나 더빙산업의 저열함을 지적한다거나 혹은 번역이나 더빙산업 종사자들의 후진 봉건의식을 지적하는 것과 <외국어에 없는 남녀 차별의 표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한국문화의 문제>라고 진단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강내희님의 윗 본글 주제의 기반이 되는 전제가 고약스럽군요. 외국어에는 없는 남녀차별의 표현이라니???
저의 이러 저러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불평등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대중매체의 책임>을 되묻는 강내희님의 메세지에 동의하기에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피플타임즈 미디어 비평>란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운 나날, 건필하시길.
윗글의 비판 지점에 동의하며...
몇 가지 더 남깁니다
말은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은 상대방에게 의사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나타내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하기에 '언어'라는 체계는 언제나 상호간의 구체적인 관계,즉 그 속에서의 '권력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말이 가진 권력은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말인데도 상호간의 위치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폭언이, 어떤 경우에는 성폭력이, 어떤 경우에는 아무렇지 않은 친근한 의사 표시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남성은 말을 놓고 여성은 말을 높이는 것, 한국 사회에서는 흔하디 흔한 현상입니다. 님은 여기서 나타나는 '권력', 그리고 이 권력을 재생산해내는 여성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셨습니다.
님도 써놓으셨듯이 언어 사용의 문제 역시 계급적, 인종적, 종족적, 성차적, 세대적 '차별'이 각인된 문화적 코드가 반영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용하는 데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님은 자신이 줄기차게 역설하신 내용에 위배되는 오류 몇 가지를 범하신 것 같습니다. 님이 쓰신 글의 범위에서 확대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몇 가지 지적하려 합니다.
님은 번역문화 나아가 삶 속에서 드러나는 대화 속에도 포함되어 있는 남성 중심적 권력, 번역자와 더빙작업자를 포괄하는 문화 산업 전반에 퍼져 있는 한국 사회의 여성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나마의 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서구 사회에 비하면, 가부장적 풍토를 쇄신시키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 내용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서구 사회의 모습이 ‘여성/남성이 동등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혁신하지 못하는 성평등 이데올로기는 서구사회나 한국 사회나 명확히 ‘존재’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어디까지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통용되고 있는가’, 즉 확산의 정도에 차이가 있겠지요. 그것을 가늠할 때, ‘언어 속에서 남성과 여성간의 불평등적 표현은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간의 성관계가 자유롭다’ 라는 현상들만이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남성 중심적 언어는 영어에도 나타납니다(man같은), 낙태와 피임으로부터 여성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물론 복지나 제도적 차원으로부터 배려를 받고 있는 서구 사회의 여성들은 한국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월등한 삶의 -물질적-조건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언어를 포함하는 사회적 관습이 바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님께서 고치셔야 할 가장 고질적인 언어 습관이 있습니다. 바로 '매춘'이라는 용어입니다. 매춘(賣春)은 성을 파는 의미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매춘이라는 행위 자체는 성을 파는 것 뿐만 아니라 사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을 사고 파는 행위인 '매매춘(賣買春)', 혹은 가장 명확한 표현인 ‘성매매(性賣買)’로 고쳐 사용해 주십시오.
또한 님도 언급하셨듯 가장 구체적인 삶의 관계 속에서 이런 대화 방식이 재생산되고 있다면, ‘주변 여성이 눈치 채기 어려웠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재서술이 필요한 듯 싶습니다. ‘눈치 채기 어려울 수도 있었겠으나’, 그들에겐 이미 자신의 경험 속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되어 온 일들일 것입니다.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여성들 자신이 그런 처지 속에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하는 무딘 존재로 일반화되게 읽힐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은 여성들이라면, 이미 느끼고 있는 문제입니다. ‘감수성’만 자극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여성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내는 언어 사용과 이를 지배하는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님도 토론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무엇보다 주변부에 있던 여성들, 그들에 대한 억압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수반되는 토론과정이 필요하며 이것이 여론화되고, 사회적 분위기로 장착되는 과정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몸 섞고 나서의 변화가 어디 말뿐 일까요. 다음번의 모든 행위가 그렇지요. 문제는 남여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차이라고 봐야 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