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은 허구라? 그런가? 유수한 학자들의 그런 경험적 연구가 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라고 하고 싶지만 왠지 찝찝. 동물들은 자신의 애기를 어느 순간까지 애지중지 한다. 인간도 동물인데. 그런 것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인 변형과 발전이 있을 수 있지만. 모성이 허구라는 것과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종이 계속 살아남은 것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이라고는 좀 생각하기 힘듦.공동체적으로 육아를 하지 않는 문제점과 모성 자체의 부정이 혼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답은 어렵습니다만.
태아는 엄마의 감정을 고대로 느낍니다. 아무래도 케빈의 엄마는 케빈이 태아일때부터 그 아이를 사랑하는 감정없이 케어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임신을 해서 그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사랑은 본능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의무적으로라도 해줘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한 인간을 탄생시키는 위대한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로 케빈이 그런 결말을 초래한대에 대한 그의 엄마의 책임은 응당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영화가 좋았던 건, 모성은 신화라는 식의 어설픈 이념으로 에바를 옹호하기에 급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반대야 말할 것도 없고.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수 없는 것. 그게 잘못인가? 처음부터 케빈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 에바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타인과의 긴밀한 유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갓 태어난 존재라면. 케빈이 결핍을 느끼며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을 그저 집착일 뿐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에바가 케빈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건, 단지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모성성의 강제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에바와 케빈은 서로 너무나 잘 이해하면서도,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욕망의 불일치, 부딪힘 속에 어쩔 수 없는 힘듦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저런 부족하고도 불만족스런 시도를 교환하며.
그러나 머리는 좋아도 아직 어렸던 케빈은, 에바와는 달리, 결국 자신의 불행을 무기화하여 타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더 이상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선을 넘을 때까지.
구원의 기회는 있었다. 케빈이 아플 때, 엄마-자식이라는 당위적 관계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보편적 연민과 사랑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에바는 케빈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줄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선 처음으로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용기가 필요한 사랑이 아니라, 익숙한 불행과 권력의 관계를 케빈이 다시 선택하면서, 짧았던 사랑의 관계는 끝이 난다.
모성은 허구라? 그런가? 유수한 학자들의 그런 경험적 연구가 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라고 하고 싶지만 왠지 찝찝. 동물들은 자신의 애기를 어느 순간까지 애지중지 한다. 인간도 동물인데. 그런 것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인 변형과 발전이 있을 수 있지만. 모성이 허구라는 것과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종이 계속 살아남은 것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이라고는 좀 생각하기 힘듦.공동체적으로 육아를 하지 않는 문제점과 모성 자체의 부정이 혼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답은 어렵습니다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기대하겠습니다.
태아는 엄마의 감정을 고대로 느낍니다. 아무래도 케빈의 엄마는 케빈이 태아일때부터 그 아이를 사랑하는 감정없이 케어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임신을 해서 그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사랑은 본능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의무적으로라도 해줘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한 인간을 탄생시키는 위대한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로 케빈이 그런 결말을 초래한대에 대한 그의 엄마의 책임은 응당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영화가 좋았던 건, 모성은 신화라는 식의 어설픈 이념으로 에바를 옹호하기에 급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반대야 말할 것도 없고.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수 없는 것. 그게 잘못인가? 처음부터 케빈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 에바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타인과의 긴밀한 유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갓 태어난 존재라면. 케빈이 결핍을 느끼며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을 그저 집착일 뿐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에바가 케빈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건, 단지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모성성의 강제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에바와 케빈은 서로 너무나 잘 이해하면서도,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욕망의 불일치, 부딪힘 속에 어쩔 수 없는 힘듦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저런 부족하고도 불만족스런 시도를 교환하며.
그러나 머리는 좋아도 아직 어렸던 케빈은, 에바와는 달리, 결국 자신의 불행을 무기화하여 타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더 이상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선을 넘을 때까지.
구원의 기회는 있었다. 케빈이 아플 때, 엄마-자식이라는 당위적 관계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보편적 연민과 사랑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에바는 케빈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줄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선 처음으로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용기가 필요한 사랑이 아니라, 익숙한 불행과 권력의 관계를 케빈이 다시 선택하면서, 짧았던 사랑의 관계는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