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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평화와 세월호 진상규명은 한 몸

[기고] 강정평화대행진에 함께한 세월호 유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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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세월호 유가족이 함께했다. 7월 31일 저녁, 폭염 속의 4일차 행진을 마치고 중문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서진행진단에게 세월호 가족들이 말을 건넸다. 가족협의회 대외협력분과 일을 보는 재욱엄마는 416가족협의회를 대표해 공식적인 감사와 연대의 인사를 전했다. 세월호 가족들은 제주를 알기 위해 4.3 추모공원을 가장 먼저 들러 두 시간 동안이나 보고 배웠다고 했다. 역사를 외면하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했다.

성호엄마는 제주를 알려면 4.3을 알아야 한다며 4.3에서 세월호를 봤다고 했다. 아픈 역사를 외면한다면 아픈 사람들이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유가족들은 스스로 나서서 공부하고 배운다고 했다. 그리고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유민아빠는 문정현 신부님을 통해 강정에 인연이 깊다고 느낀다고 했다. 극한의 단식농성 중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고 세월호를 세계적으로 알린 데에는 문정현 신부님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했다.

‘제주에 이렇게 쉽게 오는 거였구나’하며 오는 순간부터 너무 아팠다던 시연엄마는 옆집 살던 엄마아빠들이 어쩌다 이렇게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 했다. 요새들어 돌아서는 시민들이 많다는 걸 느끼지만 잡지를 못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부끄럽게 살아왔기 때문에. 관심도 없고 잘 알지 못했던 참사들을 알게 됐고 4.3을 알게 되고선 정말 부끄러웠다고. 4.3추모공원을 두 시간동안 돌아보며 내가 관심없이 무지하게 살아서 내 아이가 이렇게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간담회 팀장인 시연엄마는 1주기 지나고서 간담회가 많이 안 들어온다며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들은 강사교육을 받고 계신다며 부르지 않아도 우리가 방방곡곡 찾아가겠다고 했다.

옆집 살던 말 못하는 아줌마였다고 자신을 소개한 준영 엄마는 아홉 명의 미수습자 이야기를 했다. 금요일에 수학여행에서 돌아오기로 했던 아이들을 생각하며 세월호의 조속하고 온전한 인양을 촉구하는 매주 금요일 피켓시위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으로 진실을 밝히고 미수습 가족들을 찾아야한다고 강조했다.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미수습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있는 노란티를 벗지 않으신다고 했다. 다른 옷이 진짜 많은데 이 옷만 입고 다니고 있고 심지어 잘 때도 입는다고 했다. 웃으며 밝게 행진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행복했다고 했다. 이제 질질 짜지 않고 웃으면서 끝까지 갈거라고 말하던 그녀는 270mm나 되는 준영이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다영아빠는 둘째 날부터 서진행진단에 결합해 함께 걸었다. 우리 아이들이 억울하게 갔기 때문에 이렇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있는데 국회로, 청와대로, 광화문으로, 온갖 일을 다 겪었는데 많은 국민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연대의 힘이 희망이라고 강조했다. 산방산에서 단체사진을 찍을 때 성호의 누나, 창현이의 누나가 아이들의 사진을 놓고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을 보았냐고 물었다.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무신경함이 부끄러웠다. 용산참사 가족들도 계시고 8월3일이면 강정 해군기지 반대투쟁 3000일 되는 날, 세월호는 500일이 다가오고, 대한민국은 모든 사람에게 아픔을 주고 있지만 연대의 힘은 엄청나다고 강조했다. 삼일동안 걸으면서 강정의 평화를 위한 싸움과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 싸움의 공통점에 대해 다영아빠는 이렇게 느꼈다 말했다.


첫째,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어떤 힘이 우리의 삶을 앗아갈 수 있다. 현실문제에 등을 돌리고 그저 열심히만 살아갈 때, 불의하고 탐욕에 가득찬 정권이 들어서면, 외세의 등을 업고 국민들의 평화와 안전을 외면하고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둘째, 강정, 세월호, 용산 피해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 세월호는 우리 삶에 닥칠 위험이란 생각으로 다가오지만 평화라는 문제는 막연하게만 느껴진다. 일상의 소박한 삶을 파괴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피해자들이 나서야 한다.

셋째, 씩씩한 행진에서 희망을 봤다.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을 보니 세월호 문제를 가지고 같이 싸운 사람들이었다. 강정, 용산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다. 네일내일 없이 우리 모두가 연대하고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행진을 모두 마친 8월 1일, 강정해군기지반대투쟁 3000일 문화제가 진행되는 강정천운동장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제나 당신에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더 커지고 맑아져 그대 좋은 벗 될 수 있도록~"하는 노래가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강정마을 미사천막에는 세월호 기억등이 걸려있다. 박재동 화백의 "잊지 않겠습니다" 그림글 연작으로 매일매일 교체되고 있다. 정해져있던 순서가 아니었다는데 우연히 8월 2일 3000일 미사 후 걸린 등에는 2학년 5반 오준영 학생의 이야기가 실렸다. 이제 울지 않고 싸우겠다던 준영엄마는 그 약속을 벌써 어길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다음날 팽목항 십자가 축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곧바로 진도로 향했다.


강정, 용산, 쌍차, 세월호 모든 투쟁의 현장에 함께 했던 문정현 신부님 옆에 누군가가 서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받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박래군.

제주는 맑은 날씨와 투명한 바다만큼이나 우리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송악산 옆 섯알오름에는 4.3희생자 백조일손의 묘가 있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의 예비검속으로 한데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희생된 이들이 132명에 달했다. 유가족들은 6년이나 지나서야 주검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뼈와 살이 뒤엉켜버린 주검들을 한데 모아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용산, 쌍차, 강정, 밀양의 희생자들이 그들을 닮았다. 그리고 304명을 한날한시에 삼켜버린 세월호가 그렇다. 그것은 그냥 큰 사고가 아니었다. 구조를 방기하고 진실을 은폐하고 유가족을 모욕하고 9명 미수습 희생자의 시신수습조차 책임회피한 정부 행태는 결국 이들을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제주에서 다시 만난 것이리라. 이미 상당부분 지어진 해군기지와 군 관사가 들어서버린 강정마을을 떠나며 뜨겁고 행복했던 대행진의 끝이 슬픈 여운을 남기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국가폭력과 이윤몰이배에 의해 죽임당한 이들 피해자들이 다시 각자의 싸움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정택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