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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사회주의 경제개혁의 쟁점과 수리경제학파의 등장

[주례토론회] 1950년대 이후 소련의 주요 경제학적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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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요약

소련 수리경제학의 개척자들(넴치노프, 노보쥘로프, 칸토로비치)은 1920년대부터 자신의 학문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 각자의 학문적 배경은 모두 달랐으나 수리적 경향과 경제의 균형과 비례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1920년대의 보그다노프-부하린적 경향이나 신고전파 경제학의 러시아적 수용 내용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

또한 1930-40년대 소련 경제학계는 1920년대의 다양한 조류들을 모두 용인하기에는 어려운 분위기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 시기의 경제학 연구 주제들이 반드시 수리경제학의 발생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오스트로비챠노프와 스트루밀린을 중심으로 한 ‘주류 경제학계’는 수리경제학적 문제제기에 대해서 불편해했다. 하지만, 스트루밀린의 가격책정에 대한 문제제기나 1954년 『정치경제학 교과서』에서 제시한 소련의 국민경제관리 원칙들 내부에 이미 수리경제학적 문제설정이 개입할 여지가 존재했다. 실제로 1950년대 논쟁에서 주로 제기된 문제들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원칙들로 규정되어 있던 것들의 틀 내부에서 이뤄진 것이다.

경제통계 문제 연구에서 국민경제 대차대조표 구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던 넴치노프, 합판 공장의 최적자원 사용 문제 해법을 연구하다가 선형계획법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칸토로비치, 그리고 자본투자의 효율성을 측정하고 그것을 통해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한 노보쥘로프는 1920년대의 다양한 경제학적 조류의 유산과 신고전파적 이론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1930-40년대 제기된 경제 문제들을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설정에 따라 해결하려 했던 시도들이다. 물론 그들의 문제제기는 1950년대 초까지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이는 주류 학계가 가진 그들의 이론에 대한 거부감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할 만한 조직이 없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아직까지 경제학계의 중심부에서 그들의 주장을 펼 수 있는 연구소, 대학 및 매체 같은 매개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련 경제학계의 분위기는 1950년대 중반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전부터 개별적으로 진행되어오던 수리경제학 연구의 흐름이, 하나의 집단적 움직임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957년부터 1963년까지 벌어진 수리경제학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를 명확히 뒷받침한다. 이러한 변화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1945년, 즉 2차 대전 이후 소련에서 진행된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이라는 전반적 조건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건의 변화를 정확히 인지한 수리경제 연구자들의 신속한 조직적 움직임이었다. 이들은 당시 지도부부터 작업장 수준에 이르기까지 요구되고 있던 경제관리와 경제이론의 괴리문제 해결을 실용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이론적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론적 수단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경제 연구조직의 형성과 확장, 경제학 교육과정의 변화 및 주요 경제 매체들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이론적·조직적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57년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한 수리경제 연구소들은 바로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었고, 1963년에 일어난 학술원 경제학 분과 독립과 중앙수리경제연구소의 설립은 경제학계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또한 수많은 경제학 매체들에서 자신들의 이론적 입지를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수리경제학 전문 잡지들을 새로이 발간함으로써 경제학계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 실무자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했다. 이에 더해 그들은 학문 후속세대에 대한 확고한 입지를 확보하고 수리경제학 이론을 확장시키기 위해 기존 정치경제학 교육과정에 도전해서 새로운 수리경제학 교육과정의 도입을 성공시켰다.


소련의 수리경제학파가 이처럼 조직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론 외적 조건들 이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론적 타당성에 있었다. 만약 이 이론이 당시의 경제 상황 해결과 직결되는 문제들과 밀접한 연관이나 어떤 강점이 없었다면 당시까지도 상당했던 반감들을 물리치고 주도적인 경제학 이론의 지위로 올라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의 주요 경제학적 쟁점들과 이 논쟁 속에서 수리경제학파의 이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소련 경제학계의 주요 쟁점은 1) 가격책정의 과학적 기반, 2) 고정 자산, 자본 투자 및 신기술의 경제적 효율성, 3) 물적 자극과 생산의 수익성, 4) 경제 조사와 계획에 수학과 계산 기술의 도입 문제였다. 특히 1)-3)의 주제는 소련의 경제 관리체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같았고, 소련 전체 경제 논쟁사에서도 계속해서 쟁점이 되었으며,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논쟁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1. 가격 책정 문제(사회주의 하에서 가치론 논쟁)

20세기 소련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다른 복합 경제체계와 마찬가지로 가격은 경제활동에 대한 지침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경제에서 가격의 역할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나 랑게, 테일러, 러너가 자신들의 이론적 모델에서 그렸던 시장 사회주의 경제 모두와 달랐다. 소비에트 경제에서 가격은 생산, 자원 배분 및 소비를 규정하는 자율적 힘이 아니었고, 대신 가격은 중앙당국의 계획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의도된 다양한 도구들 중 하나로서 중앙당국이 조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가격의 역할 및 가격책정 문제를 놓고 소련 경제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수많은 논쟁들이 벌어져왔다. 서방에서의 사회주의 계산논쟁에서부터 소련 내부의 사회주의 가치론 논쟁, 가격책정 방식 논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논쟁은 지속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소련 경제학계에서 가격책정 문제는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였고, 이 문제에 대해 1956년 이후 생산재의 도매가격책정 원칙을 둘러싸고 소련 경제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 초기에 사회주의 하에서 가치법칙의 적용 문제와 가격책정 문제는 이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엥겔스 저서들에서 나타나는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때로는 상충하는 여러 가지 언급들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경제 관리의 문제들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대략적 언급만을 할 수밖에 없었던 마르크스-엥겔스 당대의 조건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기 전시공산주의 시기부터 이 문제는 경제를 운용하는 입장에 선 볼셰비키 정부에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소비에트 초창기에 사회주의 가치 논쟁은 결국 사회주의 가치법칙의 작용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전시공산주의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전시상황을 제외하고 현실적으로 경제 운용을 함에 있어서 가치와 가격 결정의 문제가 사라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하의 가치법칙은 스탈린이 제시한 원칙에 의해 강하게 규정되었고, 경제학자들에게 허용된 연구범위는 고용, 공장운영, 비용계산 등과 같은 매우 협소한 것들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1956년을 전후한 시기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20차 당 대회에서 미코얀과 수슬로프가 당시 소련 경제학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스탈린의 경제 원리들을 공격했고, 소련 경제학자들에게 경제학 법칙들을 수정하도록 촉구했다. 많은 경제 원리들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회주의 가치법칙과 가격책정의 문제였고, 이와 관련해서 1956년 12월에는 학술원 경제연구소에서 크론로드의 「가치법칙과 소련에서 가격 책정 문제에 관하여」라는 보고서를 논의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1957년 경제연구소에서 개최한 「가치법칙과 소련 국민경제에서 그것의 작용」에 대한 학술대회, 1958년 1월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과에서 「가치법칙과 사회주의에서 그 역할」에 대한 학술대회가 차례로 개최되었다. 그 이후로도 많은 저술들, 경제학 잡지들, 신문 및 학술대회에서 이 주제와 관련한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되었고, 1962년 말 300여명의 경제학자들이 참여한 대규모 학술대회가 개최되기에 이른다.

1-1. 소련의 기존 가격책정 구조

소련의 가격정책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산업도매가격은 상품이 국영 부문 내에서 이전되고 평가되는 가격을 말한다. 여기에는 제조업 소비재, 원자재, 중간재 및 기계 등의 생산재가 포함되고 조달기관들이 식품가공 기업들에 농업 생산품을 팔거나 유통기관들에 더 이상의 가공을 할 필요 없이 소매를 위해 판매하는 농업 생산품을 판매하는 가격이 포함된다.

소비에트 산업도매가격의 구성요소는 직간접 노동 비용, 원료(연료와 동력) 비용, 감가상각비, 그 외 다양한 간접비를 포함하는 계획된 평균 부문 생산원가와 이윤 마크업(profit mark-up)이었다. 우선 생산원가의 평가와 관련해서, 그 기준을 가장 선도적인 기업의 비용 평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산업 부문 전체 기업의 평균적인 능력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중앙 당국이 산업도매가를 책정함에 있어서 하부 단위에 통제와 평가를 부여할 수 있는 더욱 중요한 도구는 이윤 마크업과 거래세(turnover tax) 부분이었고 이와 관련한 논쟁이 훨씬 격렬했다. 이윤 마크업은 보통 원가의 5-10%로 책정되었고, 중요한 목적은 자원 배분이 아니라 국가 순수입의 원천이자 자본 축적을 위한 재정 당국의 통제 도구였다. 특히 중앙 당국이 자의적으로 부과할 수 있는 거래세를 국가적인 자본 축적의 원천으로 사용함으로써 생산재의 도매가격과 원가 사이의 차이와 소비재에서의 둘의 차이의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었다.

1-2. 소련의 가격책정 구조 개선에 대한 논쟁

이러한 기존 가격책정 원칙에 대해 당시에 제기되었던 이론적 입장들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 학파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중 전통파들은 기존의 가격책정 원칙에 근본적인 변화는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가계획위원회, 중앙통계국 및 국가 경제기관들의 주요 노선이 바로 이 전통파의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전통파들도 1950년대 중반 당시의 가격책정에 일부 문제가 있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가격 구조 전반의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재가 사용되는 특정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생산재 가격의 구조를 선택적으로 조정하는 정도만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통파의 입장에 대해 두 가지 근본적인 비판이 있었는데, 하나는 ‘동일비율 마크업’ 학파라 부를 수 있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기회비용’ 학파라 부를 수 있는 입장이다. 먼저, 동일비율 마크업 학파를 살펴보면, 이 입장의 대표자들은 국가계획위원회, 학술원 경제연구소, 중앙통계국 및 대학 등 실무 기관과 학계에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었고, 앞선 <표 1>에서 나타나듯이 스트루밀린, 말릐셰프, 소볼 등 당대에 상당히 영향력 있던 경제학자들이 이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일비율 마크업 학파는 전통파의 입장에 대해 산업도매가격 결정에 있어서 경험적이고 자의적이며 주관주의적인 가격 책정방식으로서 단일하고 일반적인 원칙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생산재와 소비재 모두에 적용 가능한 공식에 따라서 잉여생산물의 비례적 배분이 이뤄지는 것이 바로 가격책정의 객관적 기초라고 생각했다.

이 입장과는 다른 비판은 보통 서방 학계에서 ‘기회비용’ 학파(일반적으로 수리경제학파)라고 부르는 것이었는데, 노보쥘로프, 넴치노프, 칸토로비치가 이 입장의 대표자들이었다. 이들 또한 기본적으로 가격을 가치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지만, 이들의 가치 개념은 앞선 두 학파의 가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기회비용적 접근에 근거해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상대적 희소가격을 반영하고 자본과 지대 요금을 포함하는 효율 가격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투입-산출과 선형계획법에 의한 “최적” 계획 공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잠재가격(shadow prices)”이다.

물론 이들 모두 이런 최적의 잠재가격이 당시 상황에서 정확히 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수백만 가지의 경제적 관계에 대한 필요 자료들이 부족하고, 그러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자료들을 다룰 수 있는 정보처리 및 계산 능력이 아직은 미흡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리경제학자들 대부분이 수리경제연구소의 설립과 함께 최첨단 컴퓨터를 도입한 전자계산소의 설립을 강력히 추진했다.

(중략)

1-3. 논쟁의 결과

가치 결정 및 가격 책정 논쟁은 짧게는 1963년까지 길게는 1965년까지 지속되었다. 정부 정책의 변화로만 보면 1963년에 이 논쟁이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이론적 논쟁은 1965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즉, 전자와 관련해서 정책적으로 이 당시 논쟁을 검토한 후 1955년 산업도매가격 개정 이후 8년 만인 1963년에 개정된 산업도매가격 체계를 도입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이론적 논쟁은 끝나지 않았고 결국 산업도매가격 체계의 개정은 1966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1963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산업도매가격 개정은 1960년 당의 중공업 분야 일부분 가격체계와 운송부문 운임률 재조정 결의 이후 1961-1962년 사이 벌어진 논쟁의 결과였다. 개정 내용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산업도매가격 책정 체계의 기본 원칙들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다. 희소 가격이나 효율 가격 체계가 도입된 것도 아니었고, 자본 비용이나 지대가 체계적 방식으로 고려되는 방향도 아니었다. 다만, 중공업 분야에서 채굴·추출 분야의 원자재 가격을 대폭 상승시키고 가공 처리 분야 생산품의 가격은 하락시킴으로써 기존의 중공업 가격 구조를 변화시켰다. 또한, 이윤 마크업이 더해지는 원가 계산 역시 한계 비용 보다는 부문 평균 비용으로 계산되는 것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고정 자산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계산된 좀 더 현실적인 감가상각비가 실제 비용에 반영되도록 결정되었고, 채굴·추출 분야의 생산비에 지리적 산출 전망이 포함되도록 했다. 즉, 1963년 까지는 정책적으로만 보면 아직은 전통파의 입장이 고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자본 비용 입장과 기회비용 입장의 비판 중 원가 책정 원칙과 수준의 현실화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63년 이후로도 도매가격 개선을 위한 작업들은 계속되고, 1965년 개혁 이후 대대적인 도매가격 재설정이 이뤄지는데, 이때에는 동일비율마크업 학파 중 바아그와 기회비용 학파 중 가장 온건한 넴치노프의 입장이 상당부분 수렴되어서 받아들여졌다. 즉, 경제학계 내 가격책정 이론 논쟁 속에서 수리경제학파의 이론들 중 칸토로비치와 노보쥘로프의 기회비용 가격책정 이론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이론이 많은 영향을 주었고, 넴치노프의 절충적 이론과 바아그의 동일비율마크업 이론이 실제 가격책정 원칙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또한 1965년에 넴치노프, 노보쥘로프, 칸토로비치의 그간 업적을 인정해서 이들에게 레닌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것과 관련해서 전통파와 수리경제학파 및 그들의 지지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965년 1월 학술원 경제 분과 전체회의에서 칸토로비치, 넴치노프, 노보쥘로프에게 레닌훈장을 수여하는 것에 대해 토론하는데, 여기에서 이들 각각의 이론적 업적에 관한 격렬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스트루밀린, 오스트로비챠노프, 므스치슬라프스키, 카츠 등의 전통파들은 이들의 이론적 업적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고, 레닌훈장 수여논의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칸토로비치, 넴치노프, 노보쥘로프의 업적을 인정했다. 특히 이들의 업적 중 가격 책정에 관한 이론에 대해서 아간베갼, 루리예, 다다얀 등 중견·신진학자들 중 다수가 강하게 동조했다. 결국 학술원 경제분과와 학술원 간부회는 이들에 대한 레닌훈장 수여를 추천했는데, 이에 대해 오스트로비챠노프가 1965년 2월에 공산당 중앙위원회 최고회의 간부회에 훈장 수여 결정에 항의하는 투서를 보내는 등, 전통파 경제학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최종적으로 이 세 학자에 대한 훈장 수여 결정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단순히 상을 수여하느냐 마느냐의 단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1960년대 중반의 소련 경제학계의 주도권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느냐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2. 자본투자와 신기술의 경제적 효율성 평가 문제

가격 책정 문제와 더불어 1950년대 후반 소련 경제학계의 또 다른 쟁점은 자본투자와 신기술 도입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평가 문제였다.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자본투자의 목적은 고정기금의 확대를 통해서 생산 규모를 확장시키고 전체 국민생산의 증대로 인민의 후생 수준을 높이는 데에 있다. 이러한 고정기금의 확대에는 물론 신기술 도입 비용도 포함된다. 그리고 생산 증대는 대체로 투하된 자본량에 달려있고, 투하되는 자본량은 역으로 이전 시기에 생산된 국민소득과 계획으로 조절되는 축적-소비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자본투자 대비 순생산품의 산출 비율은 전체 경제의 생산성 증대 및 인민의 후생 증진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고 여겨졌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투자의 경제적 효율성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사회주의 경제의 계획 당국과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2-1. 논쟁의 재개와 심화(1958–1965)

(중략)
  1953년 논쟁에서 자본투자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각각의 입장


(중략)
  1956년 이후 자본투자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각각의 입장


2-2. 논쟁의 결과

이렇게 진행되고 있던 자본투자 효율성에 대한 경제학계의 논쟁은 1959년경에 이르면 일정 정도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 해에 학술원 학술평의회(의장 하차투로프)에서 「소비에트 과학의 문제들 - 소련 국민경제에 자본투자와 신기술 도입의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 보고서에서 자본투자 효율성과 신기술 도입 문제 연구를 위해 개별 상품들의 가치 크기 측정이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상 상품 개개의 가치크기를 정확히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치에 근접한 수준으로서 가격과 생사원가를 사용할 수 있음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거래세 등의 이유로 가격이 가치에서 어느 정도는 괴리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 괴리 정도를 최대한 정확히 측정하고, 경제적 효율성 계산에 정확한 가격을 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가 필수적임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 수학적 방법의 발전이 필수불가결함도 아울러 언급되었다. 또한 경제효율성 계산을 위한 기준으로 표준효율성계수와 표준회수기간계수, 자본-산출비율 및 건설기간 기준 등에 대한 연구를 더욱 심화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중략)

이 시기가 되면 논쟁의 주도권은 하차투로프를 중심으로 한 절충적 입장의 경제학자들과 바아그, 노보쥘로프, 칸토로비치 등 급진적 입장의 학자들에게 넘어간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3. 물질적 자극과 수익성 증진

마지막으로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바로 물적 자극과 생산 수익성에 대한 문제였다. 이는 1962년 학술원 경제학 분과가 분리·독립된 이후 분과의 4가지 중점 연구 주제 중 하나로 설정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것은 바로 개별 및 전체 기업의 수익성을 증대하기 위한 유인을 어떻게 제공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서 논한 자본투자와 신기술 도입의 경제적 효율성 문제와 가치 및 가격책정 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문제였고, 소련 경제 전체 메커니즘을 개혁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쟁점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회주의 경제에서 사적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개별 기업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경제적 유인들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를 논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논쟁과도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3-1. 논쟁의 시작과 쟁점

소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수익성 문제는 1930년대 1, 2차 5개년 계획의 시행을 통한 집산화 및 산업화 과정에서부터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 시기에 수익성 증진 노력은 노동 생산량과 생산성 증대 운동, 소위 스타하노프 운동이라 불리는 생산 증대 운동과 그 이후 성과 상여금 체계로 집약된다. 그 운동의 성격 및 성과는 논외로 할지라도 전후 복구 시기에 표면적으로는 이 스타하노프 운동으로 대표되는 노동 생산량과 생산성 증대 운동과 관련된 논의들이 주를 이뤘으며 생산현장에서 생산성 증대는 성과 상여금 체계가 적용되었다. 특히 각 생산 부문과 지역의 생산량 및 생산성 증대 운동 추진과 그 성과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의 경제학 문헌들에서 이 주제를 다루는 중심에 있었고, 대체로 높은 수익성의 경험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에서 일부 부문의 생산 수익성이 낮아지는 원인은 원자재 등 자원의 불합리한 지리적 배분이나 노동 및 원자재 등 자원의 사회적 예비(reserve)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부분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서 생산성 증대를 위한 새로운 방식의 도입을 요하는 문제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당시 경제학계와 계획 담당자들은 더 많은 잉여생산을 위한 생산성 향상은 고정·유동 기금을 최상으로 이용해서 내부의 생산 예비를 최대로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국가 예산 수입의 원천인 기업의 이윤을 늘리기 위해 개별 기업들의 수익성 제고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여러 방안들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1949년에서 1950년 사이에 기업 수익성 제고 문제에 대한 여러 보고서들이 발표되었고 내부 자원 동원과 축적 증대 문제에 대한 다수의 컨퍼런스와 회의들이 개최되었다. 그런데 이 회의들과 그 이후의 일부 경제학 저작들에서 기업 수익성 제고와 관련해서 기업의 독립채산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1949년에서 1950년 하리코프에서 열린 경제회의들은 기업의 독립채산 원칙 적용으로 기업의 투하 자원 절약과 수익성을 증대시킨 모범 사례 보고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주장은 하리코프 기술경제대학 교수였던 리베르만이 제시한 소련의 국민경제 지표로서 수익성 지표의 사용과 수익성 증진을 위한 기업의 독립채산 원칙 도입 및 강화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많은 비판에 직면했고, 무엇보다도 소련 전체 경제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당시 소련의 주류 경제학계는 기업 수익성과 관련된 문제의 원인을 대체로 사회적 자원의 낭비나 자원 예비의 미사용 문제로 국한시켰다.

3-2. 논쟁의 심화와 수리경제학적 문제제기

(중략)

먼저, 리베르만은 자신이 제기하고 있던 독립채산의 문제를 논하면서 소련 경제학계에서 지속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던 사회주의 생산에서 가치법칙과의 관련성을 거론했다. 독립채산을 위한 가치법칙의 적용이라는 문제는 바로 생산품의 도매가격 책정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고 이는 앞서 언급한 사회주의 경제에서 가치와 가격의 문제, 즉 가격책정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여기에서 리베르만은 구체적인 가격책정 원칙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기업의 실적 상승을 위한 독립채산 체계의 확립을 위해 가치법칙에 기반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수리경제학자들이 제기한 가격책정 원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기업의 실적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평가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베르만은 고용된 노동자들의 물질적 보상체계의 확립을 위해서라도 기업의 독립채산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가 과거 스타하노프식의 개별 노동력에 대한 의식적인 노동생산성 증대운동의 형태를 비판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생산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는 전체 노동과정에 대한 체계적 조정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물적 유인을 제고하는 체계가 확립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는 이를 위한 기업 관리에 대해서도 중앙집중화된 관리방식 내에서 기업의 주도권과 자율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리베르만의 문제제기들은 당시 소련 경제학계 내부적인 비판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헝가리 1956년 봉기와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일고 있던 ‘수정주의’ 운동에 대해 소련 당국이 강경 대응 기조로 나아가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당시 리베르만의 주장을 소련 중앙 학계와 당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던 루먄체프가 헝가리 봉기가 진압된 직후 《공산주의자》 편집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는 당 내에서 루먄체프가 1955년에 발표한 논문 중 하나에 대해 유고슬라비아의 수정주의적 조류를 긍정하고 있다는 공식적인 비판과 문제제기가 있은 직후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리베르만의 주장에 대한 학계의 진지한 논의는 1962년 까지 늦춰지게 되었다.

하지만 1956년 이후에 기업 수익성과 물적 유인(보상)에 대한 논의가 경제학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리베르만의 문제제기를 칸토로비치, 넴치노프, 노보쥘로프와 같은 수리경제학자들이 당시에 제기되고 있던 다른 수리경제학적인 쟁점들과 연관지어서 더욱 정교한 문제설정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는 다른 경제학적 쟁점들이 1957년 이후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수리경제학 연구 집단들이 만들어지고 이들의 공동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경제학적 쟁점들에 대한 토론이 1950년대 후반부터 활성화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5, 1956년 두 편의 논문이 중앙 학계에 소개된 지 약 3년 후인 1959년 《공산주의자》에 리베르만의 논문이 다시 게재되었다. 이 글은 1959년 1-2월에 개최된 소련 공산당 21차 당 대회에서 논의된 흐루쇼프의 보고에 대한 경제학적 검토의 일환이었다. 여기에서 대표적인 정통파 경제학자인 가토프스키는 사회주의 경제 하에서 물적 유인과 상품-화폐 관계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반복했다. 물적 유인의 제고를 위한 상여금 체계, 독립채산을 위한 상품-화폐 사용 등의 기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가토프스키와 같은 전통파들도 큰 틀에서 보면 수리경제학자나 다른 개혁파 경제학자들과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구체적 내용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가치결정과 가격책정 문제와 이를 바탕으로 한 물적 보상체계는 가토프스키와 수리경제학파들 사이에 커다란 쟁점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 이 문제에 대한 리베르만의 주장이 다시 제기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아마도 당시 수리경제연구소들을 총괄하고, 학술원 경제연구소와 경제학·철학·법학 분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넴치노프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넴치노프는 같은 학술지에서 국민경제 계획 발전을 위한 가격체계의 개선과 자본투자 효율성 계산에 있어서 경제 효율성 계수의 사용 문제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기존의 계획 달성과 관련한 경제적 문제들을 제기했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이 문제들이 리베르만이 제시한 계획 완수를 위한 물적 보상 체계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바로 이 논문들과 함께 리베르만의 글이 게재되었다. 논문의 주요 내용은 이전의 두 편의 논문에서 주장한 것들을 축약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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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시기까지 물적 유인과 수익성 문제를 중심으로 한 경제학적 논쟁은 크게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에 이 논쟁이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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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가 이렇게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관련 주제가 1955, 1956년 이후로 묻혀버린 것이 아니라 여러 수리경제학자들에 의해 부수적이긴 하지만 계속해서 상기되었고, 방법론적으로도 훨씬 정교화 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수리경제학자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1962년 4월에 넴치노프가 학술원 주최 계획의 과학적 원칙에 대한 회의에 리베르만을 직접 초청해서 그의 제안을 발표하게 했고, 같은 해 9월 리베르만의 글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촉발된 논쟁에서 넴치노프가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 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넴치노프는 이미 한참 전에 리베르만의 주장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1958년 학술원 사회과학 분과 이론 회의에서 농업에서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수익성 문제를 논하면서 화폐, 가격, 신용 그리고 독립채산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이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1961, 1962년 사이 경제 관리 담당자들과 당국자들이 당시 소련 경제에서 나타나고 있던 심각한 징후들을 포착하기 시작했던 것도 리베르만의 주장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그는 생산성 성장을 위한 당시의 물질적 자극(보상) 체계에 문제가 있음을 주장했고, 그것이 기업에 대한 기존 계획 지표의 문제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이 문제에 대한 유력한 해법으로 리베르만의 주장을 높게 평가했다. 1962년 4월 학술 위원회 보고는 넴치노프가 주도한 것으로서 여기에서 그는 리베르만의 의견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표시했을 뿐만 아니라, 리베르만의 주장을 중앙 학계와 경제 실무자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넴치노프는 물질적 자극과 생산 수익성 증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에서 리베르만의 입장과 거의 동일했다.
1962년 리베르만과 넴치노프의 글은 경제학계 뿐만 아니라 경제 관리 실무자들 사이에서 까지 커다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보게 될 개혁 추진 과정에서 기업 및 작업장 수준의 하부 경제 및 계획 실무자들에서부터 중앙 당국의 주요 관리자들에 이르기 까지 여기에서 언급된 리베르만과 넴치노프의 주장을 놓고 활발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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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논쟁은 훨씬 더 광범위한 부분에서 더욱 심화된다. 1963년 한 해 동안 공식 매체들에 기고되고 논의되었으나 출간되지 못한 글들이 약 2000여 건에 달했다. 여기에는 여러 지역, 여러 생산 단위들, 여러 연구 기관들의 연구자 및 실무자들의 제안, 건의, 주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4년에는 《공산주의자》와 《프라브다》 등 당 중앙의 잡지와 신문 등에만 총 17건의 기고문이 발표되었고, 그 이외 매체들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글들이 수없이 많이 게재되었다. 1962년과의 차이점은 리베르만의 입장에 대해 옹호하는 글들이 많아졌고, 그의 이론 자체에 있던 결함들을 교정하고 좀 더 정교화하려는 시도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우선, 넴치노프가 이전에 리베르만과 자신이 주장한 것들을 훨씬 정교화해서 발표했다. 그는 상명하달식의 일방적 계획과 평가 과정을 개선하는 문제를 더욱 구체화하면서 그 방안으로 쌍방향의 의무를 규정하는 계약서 체결을 제시했다. 비르만도 넴치노프와 마찬가지로 중앙집중적이고 일방향적인 자원 할당 체계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면서, 기업의 주도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트라펜지코프는 이전의 쓸모없는 행정적 계획 지표들을 대체하는 가장 중요 지표로서 이윤 지표의 선택을 강조했다. 행정·명령적 수단이 아닌 경제적 수단을 통해서 경제가 자동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하는 지표로서 이윤 지표의 채택이라는 주장은 레온티예프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외의 다른 학자들도 대체로 이윤 계획 지표의 도입 및 물적 유인 제공 체계의 조성과 관련한 주장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결국 이 논쟁은 1965년 경제개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게 되면서 1964, 1965년의 일련의 경제적 실험들의 기반이 되었다.

3-3. 논쟁의 결과

1962년부터 본격화된 물적 자극과 수익성 증대에 대한 경제학적 논쟁은 초기 3년간 소련 경제학계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많은 논쟁이 오갔다. 그 중에는 리베르만과 넴치노프의 주장에 대해 그들이 사용하는 이윤 지표가 부르주아적 이윤 개념이라는 비난에 가까운 입장도 있었다. 그러나 비판들 대부분도 사회주의 경제에서 기업의 물적 유인 제공을 위해 이윤 지표가 중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1964, 1965년 까지도 리베르만과 넴치노프의 주장에 대해서 여전히 많은 비판이 지속되었다. 이는 학술원 차원의 회의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회의들에서 이들의 입장에 동의하는 연구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고, 넴치노프가 리베르만의 테제를 정교화한 문제들에 대해서 일부분 긍정적 평가를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한 학술 위원회 위원장이 정통파의 대표자이자 수리경제학파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던 가토프스키이긴 하지만, 페도렌코, 디야첸코, 아간베갼과 같이 넴치노프와 리베르만의 주장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이들의 참여와 발표가 늘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주제에 대해서 1963년 이후 학술원 경제 연구소, 경제학 분과, 간부회 회의들을 거쳐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많은 정책적 제안들이 이뤄지는 과정이다.
이 건의안들 대부분은 가토프스키를 의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주도했다. 그러나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건의안들의 구체적 내용들은 리베르만과 넴치노프의 급진적 주장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63년부터 넴치노프가 더욱 구체화시킨 내용들은,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들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즉, 1962년의 리베르만의 제안 이후 논쟁과정을 거쳐서 1965년 경제개혁안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기업 수익성과 물적 유인 체계에 대한 문제의 실제 건의안 작성 집단은 가토프스키를 중심으로 한 연구 집단이었고, 여기에는 리베르만의 단순화한 제안을 훨씬 더 복합적으로 제시한 넴치노프의 기여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결론

소련 경제학계에서 가격책정, 자본투자와 신기술 도입의 경제적 효율성, 물질적 자극과 수익성 증대 문제는 항상 핵심 논쟁 주제였다. 이 주제들과 관련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1920년대부터 다양하게 제기되어 왔고,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논쟁은 지속되어 왔다. 여러 가지 원인들에 의해 경제학 논쟁이 극도로 제한되었던 1930년대와 1940년대에도 가치 결정, 투자 효율성 및 물적 자극 문제는 경제 계획의 핵심 문제였기 때문에, 관련 주제들에 대한 논의를 완전히 중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논의될 수 있는 주제의 범위와 내용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제한된 논쟁의 장에 195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1956/7년 이후 이전과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양상의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계기는 전후 경제의 양적 · 질적 성장과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해빙’이라는 정치적 조건 때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 측면에서 이 주제들에 대한 논의를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전환시킨 것은 수리경제학파의 문제제기와 이들의 연구방법론의 확장이었다.

각각의 경제학적 주제들에 대한 수리경제학파의 문제제기는 기존 소비에트 경제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가까웠다. 먼저, 가격책정 문제에 대한 수리경제학파의 주장은 기존 소련의 정통파 마르크스-레닌주의 경제학적 가치결정 이론에 대한 도전이자 현실의 가격책정 체계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이들은 정확하게 한계 개념과 기회비용 이론에 기반한 계획경제 하에서 미시 가격결정 원칙을 제시했다. 중심적인 이론가들 각각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생각은 유사했다. 그들은 개별 상품의 생산원가와 자본 요금(지대)를 반영하는 생산수단의 도매가격을 정확하게 책정하려 했고, 희소성을 반영하는 기회비용이 가격 책정의 기준이 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소련 경제학계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65년까지 수많은 논쟁이 진행되었다.

자본투자와 신기술 도입의 경제적 효율성 문제는 가격책정(가치결정) 이론의 연장선에 있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가장 효율적인 투자 대안과 기술 선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입 운용비용과 산출 효과를 비교·측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가 핵심 주제였다. 수리경제학자들이 제시한 것은 기본적으로 가격책정이론에서 제시했던 기회비용적인 이론을 투하 비용 대비 산출을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회수기간(효율성 계수)법은 수리경제학적 방안을 기존 경제학 이론과 절충한 것이었다. 부문 효율성 계수를 구하고 이를 자본투자 대안 및 기술 선택을 계획하는 데 사전적으로 적용하는데, 이 효율성 계수법의 이론적 기반이 바로 기회비용 이론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가격책정 논쟁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논쟁이 벌어졌고, 자본투자와 신기술 도입의 경제적 효율성 결정의 표준 방식이라는 절충적 개혁안을 만드는데 수리경제학파가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다.

물질적 자극과 수익성 증진 문제, 즉 노동자와 기업 및 생산 단위에 물적 유인을 제공함으로써 수익성을 증대하는 것도 과거에는 스타하노프식의 의지주의적 고취 및 동원 방식을 우위에 뒀다면, 이 논쟁이 진행되는 시기에는 계획 임무 수행에 노동자 및 기업 주제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를 할 수 있도록 최종 생산품이 실현된 이윤과 수익성(률) 크기가 성과 평가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수리경제학파와 리베르만의 중심 주장이었다. 소위 리베르만 논쟁은 수리경제학자들, 특히 넴치노프의 가세로 훨씬 구체적이고 복잡해졌고 1965년 개혁에서 기업의 실적 제고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론 논쟁이었다.

이 세 가지 쟁점은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론적 주제였고, 1950년대 후반 이후 논쟁은 수리경제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한계’, ‘기회비용’ 이론이 수리경제학 방법론과 결합하면서 이론적 타당성을 인정받아갔다. 분명히 이들의 이론적 기반에는 당시 소련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격렬하게 비판했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수학적 방법론은 단순히 수학을 경제학에 적용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소련 경제학의 이론 국면에서 일종의 전환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들을 비판하는 ‘천박한 부르주아 자본주의 경제학’이라는 수사가 정당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은 분명히 20세기 경제학에서 신고전파적 전환이라는 이론적 변형과 연관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생각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계획 경제 하에서 가치결정과 효율적 대안의 선택, 그리고 자발적인 경제활동의 참여와 실적 증진을 위한 물적 유인 제공 문제였다. 소련 경제 관리와 관련한 논쟁이 미시경제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사후적 조정이 아닌 사전 계획으로 모든 중요한 경제적 결정을 진행해야 하는 소련의 경제 관리 체계에서 당시 수리경제학파가 과학적 대안으로 찾은 것은 바로 이러한 미시적 기초의 형성이었다.
  • 고려대후배

    여기서 얼굴 뵙게 되네요!

    흥미로운 연구주제고,

    한국에서 불모지를 개척하시는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볼세비키

    소련은 자영업자계급 반혁명과 성과주의로 돌아선 중간계급 옐친때문에 망했다. 더이상 노동자국가가 아니다. 러시아공산당을 출현시킨 혁명적 노동운동도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역사 후퇴가 몰고온 노동자 생활고와 기업착취 재현으로 인한 민중의 생존권 후퇴에 대해서 어떤 인텔리겐차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경제수리학이 발전한들 망한 사회주의가 저절로 재건되는가? 무당파적 학문 추구와 사람을 사상하고 경제학 이론을 부르주아 권력층에게 갖다받치는 인텔리겐차의 관념론적 타협에 대해서 단호히 투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