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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전성시대, 새로운 실험대에 올라선 한국은행

[주례토론회] 한국은행, 누가 통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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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토론문]


중앙은행 전성시대

지난 4월 28일 통화정책 방향성을 짚어보는 정책세미나(한국경제학회, 금융연구원 주최)가 열렸다. 이 자리는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에 따른 세계경제동향을 진단하고 일본과 중국에 이어 우리나라의 경제상황과 한국은행이 취해야 할 통화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였다. 새로 취임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개회사가 있던 터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세월호 사건의 여파로 딱 부러지는 논쟁은 벌어지지 못했지만, 금리인상 시기를 둘러싼 민감한 쟁점들도 제기되었다. 이미 미국의 출구전략이 조금씩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이고, 이에 따라 여타 신흥국들의 금융시장이 산발적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통화정책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커다란 숙제를 하나씩 안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금리인상을 둘러싸고 선제적 대응론과 시기상조론이 맞서고 있다. 한편에선 ‘금리정상화’ 시대 맞아 한국은행이 적극적인 정책결정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 반면, 낮은 소비자물가상승률과 심각한 가계부채 문제를 들어 금리인상이 가져올 후폭풍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은행의 역할은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한 순간에 있다고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3월에 있었던 한국은행 신임총재의 인사청문회는 별 다른 쟁점 없이 지나갔다. ‘관치금융’과 ‘낙하산인사’로만 시야가 좁아진 야당에겐 한국은행 내부 출신의 신망 높은 전문가는 애초부터 상대할 마음이 없었던 싱거운(?)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역할과 기능을 볼 때, 한국은행 총재의 인사청문회는 그렇게 쉽게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세계 경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 미국 중앙은행을 진두지휘 했던 버냉키 전임 연준(Fed)의장이 제기되는 이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그가 취한 반공황 대책들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던 비전통적 방식들이었다. 중앙은행이 파생금융상품까지 사들이면서 신용위기를 잠재웠다는 사실은 그것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중앙은행이라는 존재의 역할을 새삼 되돌아보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재생산 구조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해 의미심장한 시각을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이번 주례토론회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미국 연준 역사에서 확립되어온 근대적 중앙은행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단초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중앙은행 독립성의 실체, “국가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다”

먼저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것이 바로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관념이다. 흔히 중앙은행의 독립성의 시작을 1951년 미국 연준과 재무부간 맺었던 ‘협정’에서 찾는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독립은 국가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국가기관 간의 운용 및 수단상의 독립을 의미했다. 그러면서 연준은 의회가 결정한 예산을 반영하여 국채매입을 시행하며, 경기 변동을 조절 관리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하도록 자신의 임무를 설정했다. 이것은 민의에 의해 선출된 권력인 의회의 간섭을 허용하고, 동시에 수동적인 자금 대부 역할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정책개입으로 금융안정을 도모할 것을 의미한다. 이로서 1913년 연준 설립 초기에 설정했었던 역할인 ‘상업 활동 장려’(진성어음주의)에서 벗어나 국가적 차원에서의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근대적인 형태의 중앙은행으로 변모했다.

또한 1946년 고용법, 1949년 더글라스 청문회에서 연준은 ‘고용의 극대화’, 즉 완전고용을 자신의 주요한 책무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1978년 험프리-호킨스법은 연준이 정기적으로 의회에 통화신용정책에 대해 보고하게끔 법으로 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업률 하한선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였다. 최근 언론에서 보듯, 버냉키 전 연준의장과 옐런 의장이 의회와 언론에서 양적완화정책의 축소 기준을 실업률 6.5%로 삼고 있다는 발언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이 발언들이 바로 연준의 책무가 의회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연준법 제10조 1항 ‘연준이사회 이사의 임명과 자질’에 관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중앙은행을 과연 누가 통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다. 이 법에서 연준의 책무를 수행하는 핵심주체인 ‘연준이사회’는 다양한 업종에 따른 이해계층과 지역적 분할을 대표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워싱턴의 ‘연준이사회’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연준지역은행 이사회’는 A, B, C 세 그룹으로 3명씩 나눠져 선출된다. A그룹 3명은 지역연준은행의 지분을 갖고 있는 은행 대표들로 구성되지만, B그룹 3명은 일반대중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선출된다. 농업, 상업, 서비스업, 노동자, 소비자를 대변하는 사람이 뽑힌다. 그리고 C그룹은 은행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로 선출되는데, 연준이사회에 의해 조각된다. 또한 연준은 3개의 자문위원회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이사회에 지역 경제에 관한 정보와 대출 조건 그리고 지역금융기관의 다양한 요구를 제기할 수 있다.

이렇게 연준이 복잡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지역별, 부문별, 산업별, 계층별 이해를 반영하고자 했던 설립이념 때문이다. 물론 이런 구조가 있더라도 주체들이 한쪽으로 편향되면 시스템의 위기를 사전적으로 예방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극단적인 기울어짐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주열 한국은행 신임총재의 3월 국회 인사청문회 발언 내용은 민주적 통제의 틀을 회피할 뿐만 아니라, 사실마저 왜곡하고 있다고 보인다. 청문회 당시, 정성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에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중소기업청 또는 중소기업중앙회, 봉급생활자 대표기관으로 한국노총 및 민주노총 등이 추천하는 인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부와 한국은행이 이 법안에 대해 ‘금통위원에 비전문가가 포함될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며 후보자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이주열 총재는 당시 ‘중립성’이라는 명목아래, 추천기관이나 특정 계층 및 부문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또한 대부분의 선진국의 경우 기관에 의한 추천제도를 채택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앞서 연준법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는 사실 왜곡이다. 연준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도록 공식적인 제도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주열 총재의 ‘중립성’, ‘전문성’에 대한 강조는 통화정책을 둘러싼 이해관계를 민주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회피하도록 만든다. 이는 금통위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효율적 운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대답했던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연준이 ‘중립성’과 ‘전문성’의 중요함을 알지 못해서 그런 복잡한 지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통화신용정책이 민생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민의를 반영하고 또한 정책을 설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을 볼 때,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기존의 ‘관치금융 VS 시장 자율성’ 이라는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중앙은행은 급할 때 자금을 공급하는 ‘국가의 단기적 돈줄’이고, 정부는 조세를 통해 그런 중앙은행의 지급능력을 보장해 주는 ‘국가의 장기적 돈줄’이다. 마치 이 둘은 한 지붕 아래 있는 같은 식구인 셈이다. 그래서 근대적 중앙은행이라는 것은 한 지붕 아래 있는 여러 식구들의 민주적 통제 속에서, 모든 식구들의 일자리와 안정적인 경제활동을 조절하는 ‘주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것이 관치금융의 폐해를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선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은행 독립성을 시장 자율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번지수를 한참이나 잘못 짚은 것이다.

하나만 보고 둘을 보지 못하는 ‘물가안정론’

이러한 관념적인 혼란들은 중앙은행의 목표를 둘러싸고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보통 물가안정이 중앙은행의 중요한 역할이라고만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처럼 미국의 연준은 명시적으로 ‘고용 극대화’를 자신의 책무로 상정했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 사태 이후, ‘금융안정’을 위한 중앙은행 조치들이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흔히 생각하는 바처럼 물가안정만을 중앙은행의 존립근거로 삼는다면, 중앙은행을 대체할 기관들은 많다. 외국으로부터 값싼 물건들을 많이 들여오거나 자원외교를 통해 안정적인 원자재를 공급받아도 물가안정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실제 2000년대 미국은 저금리 정책과 부동산 버블로 인해 통화량이 급격하게 늘어났지만 중국으로부터의 들어온 값싼 물건들로 인해 물가가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이런 간접적인 방법 이외도 법률이나 행정력으로 가격통제를 직접 실시해도 된다. 우리가 지난 80년대 경험했던 안정적인 물가는 행정력을 동원해 가격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가안정이라는 협소한 관점만으론 중앙은행의 실체를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다. 실제 중앙은행은 그 이상의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년 동안 양적완화를 시행중인 미국 연준의 비상조치들을 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최종대부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앙은행으로서 연준은 금융위기 국면에서 신용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제한적인 신용공급과 지급보증, 각종자산매입을 통한 화폐공급을 과감하게 단행했다.

이런 무제한적인 화폐공급을 보면서 처음엔 많은 이들이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우려했다. 하지만 연준이 취했던 ‘지준부리’(초과지급준비금에 대한 이자지급)는 은행들로 하여금 다시 중앙은행으로 돈을 환류시킬 수 있는 유인을 만들었다. 경제위기 국면에서 은행들은 담보능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이나 개인들에게 대출을 꺼릴 수밖에 없는데, 중앙은행이 초과지급준비금에 대해 이자를 준다고 하니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것이 이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한 것이다. 이로서 연준은 시중에 풀린 돈을 다시 거둬들이는 방식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애초부터 기우였다고 볼 수 있다. 헬리콥터에서 돈을 마구 뿌려대는 버냉키의 우스꽝스런 신문 만평들은, 본의 아니게 급격한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일종의 막대 구부리기 역할을 한 셈이다. 실제 평범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조차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상존하고 있다. 아직까지 잠재적 위기가 사라지지 않고 장기적 불황이 지속되고 있지만, 외견상만 보면 물가안정도 이루면서 금융안정이 관리되고 있다.

물론 이 엄청난 유동성과 금융안정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월가의 천문학적 이득과 불평등의 심화를 단순히 부작용만으로 치부할 순 없다. 여전히 돈이 부족한 많은 대중들은 고난의 세월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힘으로 억눌러 안정은 외견상 견고해 보여도, 새로운 불안정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조치들이 낳는 구조적 변화와 갈등에 주목하고, 다음 위기의 형태를 예측하는 것이다. 가령 현재 연준의 자산은 비상조치들로 인해 쓰레기 파생금융상품으로 가득 찬 상태인데, 이는 연준이 100년 가까이 유지해온 조세기반 화폐제도의 근간을 훼손하고 있다. 위기를 진정시켜 기존의 질서를 복원하고자 하는 정책개입이 그것이 목표로 설정하는 질서와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서 연준을 비롯한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자의든 타의든 새로운 실험대에 올라서고 있다.

한국은행이 하는 일, 외화자산관리 뿐?!

우리나라 한국은행도 이러한 금융안정화 조치에 자극을 받아 2011년에 한국은행법을 대폭 개정했다. 개정된 내용들은 대부분 금융위기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한 기능들을 강화하기 위한 법률이다. 대표적으로 한국은행의 자산매입 대상을 확대했다. 정부, 정부대행기관, 금융기관들과 대출 거래 및 채권매입을 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79조). 그리고 지급준비금에 대한 관리를 금융통화위원회가 신축적으로 폭넓게 다룰 수 있도록 개정했다(28조 2항, 58조, 63조).

이런 조치들에 근거해 한국은행은 지난 2월 주택금융공사 추가 출자와 한은 공개시장조작 대상증권(RP매매)에 주택금융공사의 주택저당증권(MBS)을 포함하겠다고 발표했다. 모기지유동화시장 활성화를 통해 가계부채의 구조개선을 촉진하고, 이를 토대로 금융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밝혔다. 이것은 한국은행이 사실상 금융기관 자산매입 프로그램과 추가출자 형식의 정부기관 자금 지원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정부정책에 동원할 우려가 있다면서 독립성 훼손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런데 독립성 훼손의 근거를 발권력 동원이라 비판하는 건, 중앙은행의 존립기반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이야 말로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근원적 힘인데, 이것이 정부정책에 동원되지 않는다면 어디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보니 중앙은행은 발권력을 자제하고 ‘물가안정’에만 힘쓰는 중립적 기관이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실제 한국은행의 외환시장개입과 공개시장조작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이 발권력을 바탕으로 모든 돈이 순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외환보유고가 3500억 달러만큼 있다고 하는데 우리 돈으로 370조 원 가량 된다. 이 이야기는 3500억 달러를 사들인 외환만큼 370조원의 원화가 한국은행으로부터 나와 금융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걸 의미한다. 이 370조원의 돈은 한국은행의 발권력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행은 이렇게 금융시장에 풀린 원화의 일부를 다시 흡수하기 위해 공개시장조작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한다. 현재 이 발행규모는 160조를 넘는다. 한국은행이 채권을 발행했으니 이 채권을 구매한 주체들은 원화를 한국은행에 주고 대신 이자를 받는 것이다. 다음 그림에서 보듯, 실제 한국은행 대차대조표에서 자산과 부채항목에 가장 큰 비중을 자치는 것이 각각 외국증권과 통화안정증권임을 알 수 있다.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ECOS, http://ecos.bok.or.kr

이와 같은 한국은행의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은의 역할은 사실상 외환관리가 전부가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와 비교해 보면, 앞서 논란이 된다고 알려진 한국은행의 MBS 매입은 논란꺼리가 될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그 이유는 한국은행의 외화자산 운용의 규모와 투자대상이 너무나도 압도적이고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은행 연차보고서, <외환보유액 운용현황과 최근이슈>, 한은금요강좌 2013.6.7. 재인용]

현재 한국은행의 외화자산 중에서 주식, 자산유동화채권(MBS, ABS), 회사채 등의 금융시장 동향에 민감한 위험자산도 약 40%에 이른다. 이런 금융상품들을 원화로 환산하면 대략 150조 원 가량 된다. 그리고 이런 외화자산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금리 및 환율 파생금융상품 거래가 필수적으로 뒤따른다. 사실상 한국은행은 350조 원 수준의 외화펀드를 운용하는 글로벌 기관투자자인 셈이다.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국민연금 400조 원 수준과 비교하면, 한국은행의 외화자산 규모가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글로벌 금융시장의 ‘큰 손’인 한국은행을 두고 ‘물가안정론’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건 한가한 소리일 뿐이다. 우리에게 물가안정보다 더 급박한 것은 한국은행의 엄청난 외화자산이 손실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돈이 모두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돈이기 때문이다. 경상수지 흑자를 위해 저임금에 혹사당한 노동자들의 몫이 엄연히 외화자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우린 잊어선 안 된다.

한국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작년 9월 경, 박근혜 정부가 취임 후 4개월 만에 한국은행으로부터 빌려 쓴 돈이 무려 67조나 된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한국은행 발권력 동원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시 이 사실을 폭로했던 박원석 의원의 진의는 정부의 무계획적인 재정운영을 지적하기 위함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정부대출금은 법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사항은 아니다. 정부가 세수가 부족하다고 손 놓고 자기할 일을 방치할 순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서 살펴본 바처럼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것이 정부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님을 볼 때, 박원석 의원의 지적은 의도하지 않게 한국은행의 역할을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세수가 줄어들어 당장 정부의 손발이 묶이게 되면, 당연히 한국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동원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금융시장에 비싼 이자를 물어 가면서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시 금융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세금으로 메우던가 아니면 더 많은 채권을 발행해 돈을 빌릴 수밖에 없다. 이처럼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의도하지 않게 정부의 금융시장 종속화를 강화시킨다. 물가안정이라는 병풍 뒤로 중앙은행이 숨는 순간 세금을 금융시장에 퍼주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중앙은행이 만들어진 애초의 목적 역시 정부를 돕기 위한 준재정활동에서 출발했다. 만약 일시적인 차입금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국채를 매입해 정부에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결정이 전문가들에 의해 밀실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에 의해 통제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어디에 얼마큼의 공공자금이 공급되어야 하는지 우리가 직접 확인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제 병풍 뒤에서 350조 원에 이르는 외화자산을 굴리고 있는 한국은행을 우리 앞에 끄집어내야 할 때다.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전문가 그룹의 병풍 뒤에 숨게만 놔둘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번 한국은행 신임총재의 인사청문회가 싱겁게 지나가 버린 것은 무척이나 아쉽다. 한국은행이 맞닥뜨린 새로운 실험대를 맞이하여 민주적 통제의 단초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지금, 한국은행을 돈 태우는 글로벌 투전판 무리들 속에서 서성거리게 만들지, 아니면 민의에 봉사하는 기관으로 만들지, 어느 때보다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있다. [토론문 끝]

* 토론문 정리 : 송명관(참세상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