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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또 하나의 이야기

[새책] 내 안의 보루 (고진 저, 컬처앤스토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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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삶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존중은커녕 기억되지 않는 삶이 있습니다. 힘 있는 자, 가진 자에게 있어 삶은 역사로 표현됩니다. 역사는 단순히 지나온 시간에 대한 추억의 기록이 아닙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는 권력을 쥔 자들이 언제나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허물을 은폐하며 그럴듯하게 없는 것을 거짓으로 꾸며내어 화려하게 치장합니다. 분명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도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도리어 추앙받도록 교묘하게 왜곡합니다.

사실 역사란 그리 거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족적입니다. 그 흐름 속에 우리가 경험했던 것을 성찰하면 그것이 역사입니다. 지배자들은 역사를 거창하게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거창함이 휘두르는 폭력성에 늘 우리의 삶은 부정당하고 초라하다며 단정지어야만이 그들의 불의함이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는 자들에게 패배의식을 영원토록 고취시키기 위해 자신들만의 역사를 말하고 끊임없이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은 사람이 살아야 할 희망이 아니라 물질보다 못한 소모품 정도로만 여기는 인간성 상실을 정당화하는 기록입니다. 그러한 굴종의 역사를 거부하며 전혀 기억되지 않는 삶이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 희망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한 번쯤 고백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패배만을 기억하고 희망이 없음을 스스로 체념한다면 더욱 더 초라한 삶을 강요받는 잔인한 속성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상처 가득한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한다는 건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다시 들춰내는 일이기에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77일 옥쇄파업이 그럴 것입니다.

노동자들에게 일터는 삶입니다. 관념이 아닙니다. 살아야 할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입니다. 이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야만 했고 모순되게도 살아야 되는 그 순간의 선택을 늘 죽음을 불사한 항쟁을 해야 했습니다. 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기막힘과 절박함이 자신에게 처해진 척박한 삶에 거름이 되었음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은 쉽사리 말합니다.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하며 이죽거리면서 말입니다.

노동자로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겪어야 했던 삼중의 고통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마음이 내내 무거웠습니다. 탐욕스런 자본에 의해 일터에서 쫓겨난 자신의 처지, 그 처지를 짓밟고 있는 국가의 야만적인 폭력성, 철저히 고립시키고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냉소를 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소설의 실제 주인공인 한상균과 김혁이라는 두 인물의 삶을 통해 자연스레 또 다른 한 인물이 떠올랐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목수인 노동자였고 사람을 세상의 중심을 두고 희망을 이야기했던 예수 그를 기억해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노동자와 예수의 거론을 너무나 인위적이고 상투적인 비유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랬습니다.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희생하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온전히 투신한 이들이 있습니다. 존재 그 자체가 희망이 되고자 말입니다. 두 노동자와 예수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희망을 살고자 했던 희망이 되었던 이들을 냉혹하리만큼 그리 기억하지 않습니다. 소위 대중에게 있어 이들의 헌신은 당연했고 때론 비난을 온전히 감수해야 하는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한상균과 김혁이 그랬습니다. 선택에 있어서 자신의 안위가 아닌 절망스러울 만큼 빛이 보이지 않는 그 순간을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면서 빛이 되고자 했던 그들의 결연한 의지와 삶을 부정하는 건 결국 우리의 삶을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우리는 결코 다른 삶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변함이 없는 그저 그런 상투적이고 진부한 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변화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삶이라고 치부하며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련 맞게 어둔 밤하늘을 바라보며 밤잠을 설쳐가며 새벽을 맞이한 사람들에 의해서 입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궁금해집니다. 대체 이 미련한 사람들은 무엇을 희망했기에 남들이 평화롭게 잠을 청할 때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고독한 고민을 해왔을까? 그것은 이미 책의 제목처럼 내 안의 보루 때문이었습니다. 각자에게 있어 "내 안의 보루"는 희망이었습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세상의 희망, 모진 고초를 당해도 절대로 꺾을 수 없는 일하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소설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쌍차 해고노동자들의 실제 삶이었고 우리가 또렷이 기억해야 하는 삶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쌍차 해고노동자들이 겪었던 불의한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 불의한 사실을 거창하게 역사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정당화시킬지 모르는 불길함은 늘 현실로 존재했기에 결코 잊어서 안 되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를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희망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희망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잘나고 오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보잘것없지만 사람을 진정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진실하게 만들어져 가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 안의 보루" 그건 희망입니다. 자신만의 희망이 아닌 서로의 희망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한상균과 김혁처럼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뜨거운 경의와 무한한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