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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적은 남성인가?

[새책]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마리아 미즈 저, 최재인 역, 갈무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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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또는 여성)의 적은 남자이다.”라는 주장을 종종 접하게 된다. 여성이슈를 다룬 인터넷 뉴스의 댓글들을 살펴보면 여성은 남성의 적으로서 ‘김치년’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지칭되거나 ‘3일에 한 번씩 매를 맞아야 하는’(줄여서 ‘삼일한’) 짐승과도 같은 존재로 격하되기 일쑤이다.

얼핏 진지하지 않은 비난처럼 들리지만, 사실 일부 남성들을 중심으로 매우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는 이러한 언어표현들은 쉽게 제기되는 비판이다. 또한 페미니즘에 대한 가장 소박하지만 강력한 비판이기도 하다. 성별에 상관없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힘 있게 들릴 수 있는 이 주장은, 최근 몇몇 남성중심의 사회단체들이 제기했던 다음과 같은 비판들, 즉 ‘남성우월사회에서 여성우월사회로의 역전이 일어나고 있으며, 도리어 사회적 약자로서의 남성들이 출현하고 있다’라는 울분 섞인 문제제기들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다. 앞으로 이야기하게 될 마리아 미즈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에게 페미니스트란 언제나 ‘몹쓸 여자’이고, ‘남성을 증오하는 여성’이면서, ‘너무 멀리 가버린 여성’이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여성운동과 여성연구에 투신해 왔으며 현재는 독일에서 학생들에게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는 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미즈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서 이와 같은 오해를 교정하려고 한다. 미즈가 보기에 페미니스트의 적은 남성이 아니고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속에서 자본가들은 노동비용을 줄이는 방법으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해왔고, 역사적으로 이러한 과정이 거듭되면서 여성의 노동은 전혀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가정주부의 노동으로 치부되었다. 여기에서 발생한 체제 또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가 바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저자는 여성의 노동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고찰한다.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을 분리하는 성별노동분업으로 정의될 수 있는 현재의 노동개념은 암시적으로 머리와 손을 생산하는 신체로서 규정한다. 이에 반해 여성의 자궁이나 가슴은 순전히 동물적인 부분으로 전락한다. 남성의 일만이 인간적인 일이고, 여성의 일은 선천적인 자연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저자가 세운 이러한 구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체계,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체계이다. 저자는 평등한 공동체가 깨지고 착취관계가 생겨나게 된 원인을 이러한 가부장제의 고착화 과정에서 찾는다. 여성의 노동이 끝없는 자본축적을 위한 기반으로 작용하면서 여성은 점점 주변적인 존재가 되었고, 이미 격하되어버린 여성의 존재지위를 유지하고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기 위해 남성과 체제는 거침없는 폭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가부장제가 여성을 식민화하고 여성의 노동을 가정주부의 노동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폭력들을 동원해왔다고 분석한다. 전문직에 종사하던 중세 여성들은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고, 식민지 여성들은 임금노동자의 배열에서 배제되어 노예를 생산하거나, 주인의 성적욕망을 충족시키거나, 가사노동을 제공할 뿐인 임시 노동력으로 취급되었다. 여성은 생리를 하고 임신을 하므로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 바로 지배자들의 논리였다. 소위 문명화된 국가의 여성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숙녀로 길들여지고 가정주부화 됨으로써, 남편의 가치 있는 생산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정작 자신의 생산은 인정받지도 못한 채 매우 부자유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한편 미즈는, 자본주의적인 착취가 남성지배자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가정주부화의 국제화를 통하여 산업화된 국가의 여성이 제3세계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형태로도 일어나고 있음을 간파한다. 산업화된 국가의 여성은 자신의 가정 내에서 좋은 여성으로 남기 위해, 완벽한 살림꾼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동의 강도에 비해 지나치게 싼 가격으로 판매되는 제3세계 여성들이 생산한 물건들을 소비하게 되는 악순환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순환 속에서 한쪽의 여성이 착취된다는 것은 다른 한쪽의 여성이 또 다른 의미에서 질적으로 다른 노예화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제3세계 여성들의 불운한 삶은 산업화된 국가의 여성의 삶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의해 노예화되는 상황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미즈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의 파국적인 경제이기에, 그녀는 단 하나의 답은 될 수 없지만 하나의 방편은 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까지의 파국 경제가 언제나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구도를 만들어냈다면, 미즈의 대안 경제는 반대의 방향을 택한다. 즉 상당한 정도의 자급을 이루는 경제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을 이룰 수만 있다면 더는 성장 모델 속에서의 생산과 소비의 구분이 의미가 없으리라는 관점을 취하며, 여성이 담당했던 가사노동과 같은 무임금노동의 일부를 남성이 자발적으로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방의 과정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에, 여성해방, 또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균열을 위해서는 반드시 남성이 담당하는 역할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미즈는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대안 경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몇 가지 통계를 제시하여 완전한 자급경제가 가능함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을 쉽게 거둘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스스로 의식하는 지점에서 오히려 미즈는 페미니스트가 실현가능성에 대한 회의에서 기인하는 패배주의를 감수해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것부터, 할 수 있는 만큼만 차근차근 이룩해 가자는 용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의 예들은 부당한 방식으로 생산된 상품을 소비자 스스로 보이콧하는 일 등으로서 제시된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시도들이 실패에 머물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몇 가지 실천들로부터 과연 견고한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붕괴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저자의 견해 속에서 그러한 실행을 시도하는 주체는 결국 먼 곳에 있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주부의 모습으로, 직물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곱씹어 볼만 하다.

사실 이 책은 1986년에 독일에서 초판 발행되었고, 1998년에 한 차례 개정을 거쳤지만, 한국에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지금에야 번역되어 독자들 앞에 다가가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 속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강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페미니스트의 활동은 부르주아 페미니즘이라는 비판과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에 대한 질시어린 시선을 피해갈 수 없었다. 또한 페미니스트가 저항해야 할 대상으로 남성이 아닌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꼽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남성들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의 한국어판과의 만남은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돌연 지금, 여기에서 ‘너무 먼 곳으로 나아간 페미니스트’들이 다시 있어야만 할 자리를 되짚어 주고, 페미니즘 운동이 저항해야 할 명확한 대상으로 남성이 아닌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너무 적절한 순간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