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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아닌 역동적이고 투쟁적인 공유지

[새책] 동물혼(맛떼오 파스퀴넬리 저, 서창현 역, 갈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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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집을 표방하는 이 책, <동물혼>(Animal Spirits)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시작한다. “무엇이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구성하는가?” 저자의 말을 계속 따라가보자. 이 책은 ‘동물혼이 어떻게 오늘날의 다중 개념에 속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긍정적으로 자극하는지 탐색한다.’ 정리하면, 동물혼이 다중이며, 동물혼이 공통적인 것(공유지)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열쇳말이라 할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은 무엇이며, 동물혼은 또 무엇인가?


마이클 하트는 사적인 것을 자본주의에, 공적인 것을 사회주의에, 그리고 공통적인 것을 코뮤니즘에 연결시킨다. 이때 공통적인 것이란 인간의 삶을 유지함에 있어 말 그대로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그러니까 우리가 서 있는 이 지구를 포함하여, 물, 공기, 삼림 등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뿐 아니라 언어, 아이디어 같이 인간 노동의 산물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어떤 (비)물질적 사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위의 사적인 것-공적인 것-공통적인 것의 세 항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공통적인 것은 대상과의 어떤 관계로서, ‘소유될 수 없는 것으로 전제된 사용가치에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접근하는 형태의 점유관계’를 가리킨다. 이는 사적 소유도 공적 소유도 아닌 소유 자체를 지양하는 관계이며, 공유지에 대한 자율적인 생산/관리를 뜻한다. 이러한 공통적인 것은 하트에게 있어, 자본 안에서 자본에 대항하여 자본 너머를 상상하는 주요한 개념이다. 저자인 맛떼오 파스퀴넬리의 입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책의 독특한 지점은 그것을 생산하는 동물혼에 대한 이야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동물혼인가? 이 책에서 동물혼으로 옮겨진 animal spirits은 저자가 처음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경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적 충동”을 ‘animal spirits’라 불렀고(국내에서는 보통 ‘야성적 충동’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다스려져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개념을 전용하여 다중의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그는 animal spirits를 통제되어야 하는 부정적인 힘이 아니라 역사를 추동하는 살아 있는 힘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왜? 그것은 문화 영역 자체가 인간의 자연적인 공격성의 확장, 다시 말해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공격성, 악은 혁신과 혁명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동물혼이란 다중의 근원적인 창조력을 의미한다. ‘동물몸은 다중들의 생산적 엔진이다.’

그러나 새로운 공유지를 둘러싼 지배적이고 추상적인 담론들, “지난 10년 동안 미디어 문화, 예술비평, 급진적 행동주의 그리고 학계를 지배해 왔던 분리의 하위종교”들은 비물질적인 것과 탈동물적인 것에만 강조점을 둔다. 또한 ‘창조적 공유지’로 대표되는 새로운 공유지에서 ‘창조성’은 선하고 순결하며 갈등이나 마찰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창조도시, 창조산업, 창조경제...... 무언가 새로운 것이 ― 잘 보이지 않지만 ― , 새로운 경제 ―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 를 이루어 우리의 앞날을 밝혀줄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공통적인 것은 ‘오직 노동, 고통, 위험, 갈등을 통해서만 구성된다’. 착취와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공유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인간 역시 인간이란 종으로서 하나의 동물이라는 너무나도 간단한 사실을 상기해보면, 공통적인 것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실재의 물리적인 힘들과 공통적인 것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인 경제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 책의 각 장은 이 분리의 하위종교들이 감추고 있는 세 가지 영역에서의 분리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첫째가 디지털 네트워크와 자유문화, 둘째가 문화산업과 ‘창조도시’, 마지막이 전쟁 테러리즘과 인터넷 포르노의 미디어스케이프이다. 이 세 영역은 세 가지 형태의 공유지와 함께하는데, 이 공유지에는 세 가지 개념적 야수들이 늘 따라다니며 기생하고 있다. 디지털 공유지의 기업적 기생체, ‘창조도시’ 이면의 젠트리피케이션 히드라, 전쟁 포르노의 미디어스케이프를 지배하는 권력과 욕망의 머리 둘 달린 독수리가 그것이다.


이들이 기생체인 이유는 생산과정 외부에서 이윤을 착취, 아니 수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회관계망 서비스들은 사람들의 집합 자체가 생산하는 부를 갉아먹고, 젠트리피케이션 히드라는 사람들이 집합적으로 생산한 문화자본을 지대를 통해 착취한다. 이러한 기생적인 착취양식은 비물질노동이 지배적으로 되고 있는 현대 인지자본주의의 주요한 축적방식이다. 저자가 여기서 강조하는 부문은 “모든 비물질적인 공간들에는 그 공간들에 대한 물질적 기생체들이 있다”는 점이다. “모든 공유된 음악 파일들은 아이팟으로 귀결된다.” 저자는 신경제를 겨냥하는 정치적 행동주의가 언제나 허구적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물질적인 경제기반시설은 문제 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컴퓨터 화면 속의 캐릭터가 되지 않는 이상 물질적 기반을 버릴 수는 없다. 그건 인간이란 동물이 벗어날 수 없는 자체의 물질성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기존의 신경제를 겨냥한 정치적 행동주의는 물질적인 경제 기반시설은 결코 문제 삼지 않았다. 즉 이들은 컴퓨터 속 캐릭터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같은 디지털 공유지가 허울뿐인 공유지라고 비판한다. 그것이 가치창출의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물질적 생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공유지는 허구적 공유지, 즉 생산의 물질적 토대로부터 분리된 관념적인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공유지를 관념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담론들에 맞서 저자가 제시하는 동물혼은 ‘인류의 양가적이고 갈등적인 본능을 인정한다. 그 결과 이 개념은 비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생산의 삶형태적 무의식 ― 과학기술 이면에 흐르는 잉여/초과 에너지의 생리학, 자본주의 축적의 새로운 인지적이고 리비도적인 양식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본능적이고 ‘불합리한’ 힘들 ― 을 드러낸다.’ 자유 소프트웨어, 위키피디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집단지성의 성과는 명백하지만, 동시에 웹 사용자들의 일상적인 ‘자유노동’은 새로운 미디어 기업에 의해 착취당한다. 이러한 집단지성의 양가적 측면들 ― 때로는 새로운 공유지를 구성하면서도 때로는 자본과 공존하는 ― 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인지적 생산의 정치적 공간이 (단순히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경쟁적임을 강조한다. 인지적 생산물은 플로리다가 말하는 ‘창조계급’처럼 ‘아름다운 창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의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생산이 창조적이고 인지적이 된다면, 또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이 된다면, 무엇이 갈등의 새로운 좌표이며 형태들인가?” 여기서 저자는 비물질 내전이라는 시나리오를 도입한다. 내전이라는 용어를 선택해야 하는 까닭은 “인지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이 명확한 계급의식이나 계급구성을 갖지 않으며 동일한 미디어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비물질 내전은 지식공유와 디지털 공유지라는 그 모든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인지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갈등들을 나타낸다. ...... 비물질 내전은, 디지털에 대한 목가적인 이상향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지식 경제에 대한 손쉬운 찬양에 앞서, 문화 생산 영역이 인정해야 하는 조건이다. ...... 비물질 내전에 직면한다는 것은, 집단적인 지식 생산의 어떠한 정치적 조직화도 ...... 지식 생산의 어두운 측면들을 인식하고 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 공통적인 것에 대한 오직 강력하고 생산적인 정의만이 이렇게 출현하는 주체성들의 윤곽을 그리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 대의代議에 기초한 정치학을 전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공통적인 자원의 생산에서 재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물질 내전의 거울 속에는 공통적인 것의 기획이 존재한다.

요약해보면 저자가 동물혼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창조적 공유지, 지식공유, 또래공동생산(peer production) 등과 같이 갈등 없고 아름다운 협력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은 일들이 실제로는 힘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곳에는 언제나 물질적 기생체들이 살고 있다는 것, 이러한 지식생산의 어두운 측면들을 인식해야 새로운 정치적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인지적 공유지에 대한 낭만적 상상 ― 여기에서 잉여가치와 착취의 문제는 고결하게 삭제된다 ― 이 아닌 역동적이고 투쟁적인 정의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