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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자본과 언어(크리스티안 마라찌 저, 서창현 역, 갈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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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사회의 건설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자극을 창출할 것이다. 착취 사회에서, 노동 본능은 생산적 행동으로 정향된다. 반대로 삶의 본능 그 자체는 삶의 통합과 고양을 지향한다. 해방된 노동 본능의 사회적 표현은 협력이다. 협력은 연대성에 기반을 두고 필연의 왕국을 조직하고 또한 자유의 왕국을 발전시킨다 ― 마르쿠제, <해방론>, 135-136쪽.

1960년대 ‘미완의’ 혁명이 벌어지기 직전, 마르쿠제는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새로운 삶의 창조로 연결하려 했다. 그는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높아진 삶의 기준을 민중이 전유해 모든 인류를 위한 연대를 창출하자고 했다. 물론, 그러한 연대의 목표는 모든 민족적 경계와 이윤을 넘어서 인간의 가난과 불행을 폐지하고, 나아가 전쟁이 아닌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마르쿠제가 보기에, ‘진정한’ 혁명이란 억압이 아닌 해방에 있으며 해방의 토대는 이미 우리에게 본능으로 존재했다. 우리는 해방의 본능을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는가? 바로 작업장 안팎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협업, 즉 협력이다.


크리스티안 마라찌 역시 ‘미완의’ 혁명에서 태어났고 이탈리아의 뜨거운 70년대에서 자랐다. 한국어로 옮겨진 마라찌의 두 번째 책, <자본과 언어>(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3)는 제목이 상징하듯이 신좌파의 장구한 혁명의 산물일 것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좌파 혁명에서 중요한 측면을 꼽으라면, 아마도 반(反)문화와 자본주의의 변형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과 언어> 역시 1970년대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의 변형을 일종의 의사소통 이론으로 조명하고 있으며, 포스트포드주의 아래 출현한 ‘기호자본주의’의 성격과 그 위기 경향을 다루고 있다. 먼저 두 가지만 언급해두자. 우선 제목에 관해 짚고 넘어 가자면, 언어이론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기호’나 ‘언어’라는 추상적 표현을 ‘소통’이나 ‘커뮤니케이션’으로 바꿔 읽으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 없어 보인다. 다음으로, 번역 용어 가운데 국내에서 통용되는 경제금융 용어와 약간씩 다른 표현을 사용한 경우가 있다. 내용 이해에는 크게 지장이 없지만 독자들은 이를 염두에 두기 바란다.

저자의 매우 도발적이고 다소 난해한 시각을 ‘도식적으로’ 정리해보자.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언어,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통 능력은 핵심적 요소이자 원리가 되었다. 우선, 금융 부문에서 말(言)의 힘은 단순한 요소를 넘어 절대적이다. 앨런 그린스펀의 말 한마디에 따라 금융시장이 요동을 치듯이, 금융시장은 그 자체로 언어적 구성물이며 여론의 산물이다. 나아가, 언어적 구성물로서 금융 영역은 인간의 모방적인 행동에 따라 움직이는데, 불확실한 정보 아래 군중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인다. 금융시장에서 나타나는 지표는 이러한 군중의 지성이 표현된 산물인 것이다. 둘째, 실물 경제는 생산에서 유통과 소비까지, 노동시간에서 여가시간까지 이른바 ‘소통경제’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기호자본주의에서 지식과 감정, 서비스 등 협업적 역량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노동자의 일반적인 언어 능력이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왜냐하면 협업적 역량의 핵심이 바로 언어, 즉 소통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물과 금융 양쪽에서 소통경제가 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라찌는 자본주의에서 언어의 역할 증대를 설명하기 위해, 포드주의의 위기와 그 대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윤의 하락과 경쟁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포드주의 경제는 실물과 금융 부문 모두를 변형했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유연성과 아웃소싱을 추구하고, 임금을 삭감하고 실업을 증가시키고, 집단적 비용, 즉 사회복지를 삭감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작업장 안팎에서 끊임없이 유연한 일자리를 찾아다니거나, 말 그대로 자영업자로서 기업가가 되었다. 이때 필요한 핵심 역량이 바로 적응력과 잠재력, 그리고 의사소통 능력 등이었다. 소위 직무확대와 확충, 팀제, 소사장제, 창조경제 모두 사람들의 기초적인 협업 능력이 없다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일상생활도 예외는 아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집에서 TV를 볼 때조차 생산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시청률에 따라 마케팅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말하고, 창작하는 모든 소통 활동이 첨단기술로 무장한 네트워크를 타고 흘러나간다.

다른 한편으로 생산부문과 발맞춰, 금융부문도 ‘혁신’을 추진했다. 이는 산업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우세를 뜻하는 금융화로 표현되었다. 또한 금융화는 자본조달 기능을 은행보다는 전 지구적 자본시장으로 이동시키고, 생산적 투자와 고용 창출보다 투자 수익률과 투자자의 권리를 우선시한다. 특히, 금융화 메커니즘은 연기금의 주식시장 투자와 뮤추얼 펀드를 통해 노동자를 투자자로 변모시켰다. 여기서, 금융과 생산은 서로 연결된다. 달리 말해, 공장에서 쫓겨나고 실질 임금이 줄어들고 은행 금리가 하락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임금과 급여보다는 투자수익률, 혹은 담보대출 금리에 민감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어느 샌가 시시각각 변동하는 주가 정보를 쳐다보고 있으며, 전 세계 정부와 중앙은행의 발표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이 높은 투자수익을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고용이 파편화되고 불안정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그렇게 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주식 정보에 민감해질 것이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형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위기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흥미롭게도, 마라찌는 기호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내재한 불균형을 설명한다. 사실, <자본과 언어>는 자본주의적 시간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시간은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자유시간), 생산시간과 생활시간(재생산시간)으로 분할된다. 포드주의 아래서는 작업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시간이 이윤의 원천이었다면, 신자유주의 아래 노동은 작업장 안팎을 가리지 않고 진행된다. 특히, 자본은 사람들의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변형하면서도 이를 보상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너무나 바빠서 생리적인 피로조차 회복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생존하려면 누군가는 유무형의 상품을 소비해야 하고, 따라서 여유로운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소득을 벌충하기 위해 과거보다 바빠진 노동자들과 그 가족은 소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마라찌에 따르면 결국 자본주의는 위기에 빠진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경제학들과 사회학자들은 높아진 생산력 때문에 늘어난 여가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당시는 소비영역이 여가시간을 잡아먹어 ‘진정한’ 한가로움이 사라진다고 고민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은 노동시간을 단축해도 여가와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는다. 재생산 노동을 제외하더라도, 우리는 소득을 벌충하느라 공장 밖에서 일자리를 찾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텔레비전에서는 1초면 영화 몇 편을 다운받을 수 있는 스마트폰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 우리가 노동자와 소비자, 사회의 재생산자라는 삼항조의 운명을 타고 났으며, 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고 말한다. 생산 영역의 변형 때문에, 우리는 삼항조의 역할을 노동자가 아니라 자영업자, 혹은 기업가로 살아가야 한다. 나아가 금융 영역의 변형 때문에, 우리는 투자자로서 운명 지어진다. 그것도 빚을 내서라도 기꺼이 투자하는 사람 말이다. 누구나 기업가이고 투자자가 되는 세상은 아마도 쓰레기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레기로 폐기되지 않으면서도 불안정노동자-기업가-투자자로 살아가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마라찌는 현 체제 밖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해법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의 기호자본주의 안에 해결책이 있다고 본다. 여기서 다시 언어 역량이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소통경제로 전환하면 할수록, 사회를 재생산하게 해주는 그 무엇은 언어 역량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우리 모두의 협력적 역량이 없다면 오늘날 자본주의는 멈춘다는 말이다. 다만, 우리의 과제는 이 합리적 역량을 폐기의 공포에 맞서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있다. 그렇지 못하면, 자본은 위기가 있으나 없으나 이윤을 사유화하면서 비용은 사회화할 것이다.

다시 마르쿠제로 돌아가 보자. 그는 객관적인 착취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이 물질적 풍요와 주관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에, 협력적 자질을 갖추었음에도 저항하지 못한다고 봤다. 그래서 당대의 혁명은 학생과 빈민이 선도하여 복지 체제와 보수적인 미디어에 포섭된 노동자를 이끌어야 한다고 봤다. 반대로, 마라찌를 비롯하여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산업 노동자조차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이제 모두가 프레카리아트, 즉 불안정 노동자이고 영세한 자영업자이고 투자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사회적 투쟁은 대규모로 전개되지 않는가? 그리고 누가 이 투쟁을 선도할 것인가? 또한 운동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 것인가? 이 책은 여기에 대한 특별한 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마라찌는 삶정치를 사전에 규정하는 태도에 경고하고 있다. 아마도 다중의 협력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감각과 관념, 전략과 전술이 출현한다고 봐야 할지 않을까?

덧붙이면, 한국 사회 일각에는 산업 노동자와 그 조직을 낡은 ‘꼰대’로 조롱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자본과 언어>는 신세대 지식 서비스 노동자를 위한 것처럼 읽힐 우려가 있고 실제로 그런 징후가 보인다. 그렇지만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그렇지 않다. 신경제와 구경제의 연속과 변형을 같이 해석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 자본주의를 기호자본주의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한국사회는 제조업 비중이 비교적 높은 반주변부 국가이다. 예를 들어, 수도권만 하더라도 공단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의 힘든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노동착취공장과 마찬가지인 그곳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화된 구로공단에 빽빽한 IT 공장들도 마찬가지다. 프로젝트 노동의 극단적인 유연화와 하청 노동이 횡행하고 있다. 이곳에서 노동자들은 물론 소통적인 협업을 바탕으로 한다. 수도권 안에서도, 구경제와 신경제가 겹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자본과 언어>는 두 경제를 연계시킬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마라찌가 브랜드에 관해 언급하듯이, 선진국에서 태생한 이론 역시 국경을 넘어 이동하면서 현지화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무언가 만들어진 이론을 던져 주는 책이 아니라, 새로운 실천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각을 제공해주는 책이다. 그렇게 읽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