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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삼성 지배구조 개선은 핵심이 아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 항소심 판결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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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사건 항소심에서 1심보다 큰 형량을 선고했다. 지난 1996년 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헐값에 발행, 이를 이재용 씨에게 편법 매각한 이 사건은 이건희 회장 부자의 경영권 승계를 통해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다져진 것으로 무려 11년이나 논란이 되어왔다.

항소심 재판부는 첫째,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인 피고 2명이 이사로서 배임한 사실, 둘째, 전환사채의 헐값 발행으로, 최소 90억 원에서 1천억 원 이상의 이득을 챙겼다는 점을 들어 유죄를 확정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가 불법 행위에 기초해 이뤄졌다는 것을 확인한만큼 재벌의 비상장주식을 통한 부의 획득에 책임 추궁의 근거가 마련됐다. 법원이 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사채 등을 이용한 재벌의 편법 경영권 상속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이 주는 의미는 작지 않다. 한편 항소심 재판부는 경영권 편법 승계 과정에 그룹 차원의 공모가 있었는지 여부는 판단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 등 삼성의 핵심 관계자들이 관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건희 회장도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마땅히 그리 해야 한다. 부의 대물림으로 자본축적 과정에서의 소유-지배권을 재생산하는 재벌의 관행은 폐절되어야 한다.

하지만 항소심 판결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삼성자본이 유발하는 문제에 견주어볼 때 아주 작은 진전에 불과하다. 삼성은 2006년 기준으로 총매출 1백41조 원, 자산 230조 원, 고용 인원 25만 명, 한국 총수출량 20%를 점하는 거대 재벌로 성장했지만, 노동조합조차 허용치 않는 전근대적 노무관리에, 최근에는 삼성 계열 비정규직 노동자 탄압 사례도 빈발하는 실정이다.

이건희 일가의 지분은 0.8%, 이처럼 작은 지분으로도 삼성의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데는 순환출자형 지배구조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에버랜드를 중심으로 삼성생명, 삼성전자 출자가 이어지고, 삼성카드는 다시 에버랜드의 대주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도 공개적으로 지배구조의 개선을 촉구한 바 있다. 삼성이 전자, 생명 등 몇 개의 지주회사 체제로 가줬으면 한다는 발언의 연장이다. 지주회사 체제로의 재편은 기업에 대한 정부와 시장의 역할 및 기능과 관련된 문제이다. 지주회사 체제는 재벌 총수의 경영 실패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고, 계열사간 복잡한 소유지분구조를 해소함으로서 이른바 투명성을 높일 수 있으며, 지주회사+자회사의 단층 구조로 소유-통제가 단순화된다는 점에서 주주가치를 높이는 체제이다. 따라서 순환출자든 지주회사든 소수에 의한 기업 지배구조가 인정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지배구조 개선을 마치 재벌 문제에 대한 대안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IMF 위기 처방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전면화 되면서 재벌개혁은 자본축적 방식 재편에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대우 등 10여 개 재벌이 이 과정에서 몰락하거나 재편된 바 있다. 공기업 민영화, 외자 규제 완화 및 폐지, 기업 지배구조 개혁, 금융개혁 조치가 잇따랐고, 장하성처럼 한국 경제의 시장주의적 재편을 꿈꾸던 사람들한테는 꿈과 기회의 시대가 도래했다. 론스타가 외환은행 매각만으로 4조5천억 원의 이익을 낸 데서 보듯이 유상감자, 고액배당을 통한 투자자본 회수는 투기자본, 사모펀드의 대표적 먹튀 방식이다. 장하성펀드 역시 이와 같은 투기방식을 노골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의 실체가 여기에 있다. 기업은 유상감자, 고액배당, 자산 매각으로, 노동자는 구조조정, 정리해고, 비정규직화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해왔다. 이처럼 지난 10여 년간 재벌개혁은 초국적자본의 투기를 위한 규제 완화와 함께 주주자본주의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지금은 자본시장통합법 입법 예고와 한미FTA 타결로 글로벌스탠다드로 회자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축적체제의 안착화가 예고되는 시점을 맞고 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사건 유죄 판결은 삼성권력의 불법 행위를 법적으로 확인했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삼성이 기존 지배구조의 급격한 변동을 가져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삼성이 현재의 지배구조를 유지하든, 지주회사로의 재편을 강제받든,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서 삼성이 점하는 자본권력으로서의 지위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97년 대선 당시 X파일에서의 삼성이 그랬듯이 10년이 지난 지금 삼성자본의 힘은 훨씬 막강해졌고, 편법증여사건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며 상고하겠다는 자신감 피력도 삼성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결국 지배구조 개선 문제는 삼성재벌을 둘러싼 자본운동 경향간의 긴장일 뿐 노동자와 민중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삼성자본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사회적 통제의 기제와 방안을 마련하는 근본적 처방만이 오늘날 삼성자본의 반노동자적, 반사회적 폐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