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자본주의 지배동맹 VS 민중

[녹색 스트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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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택일의 문제: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대한민국 관료제가 수행하는 통치행위는 ‘누구를 위해’ 이뤄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보다 어쩌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해당 정책의 효과 내지는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당사자들이 거의 초대되지 않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이하 ‘탄녹위’)는 농·어민, 노동자, 청소년, 여성, 장애인을 비롯한 정부와 기업의 개발 행위로 인해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주민 등 기후위기 최전선 당사자를 위원으로서 초대하지 않고 있다. 지난 문재인 정권의 탄소중립위원회(이하 ‘탄중위’)에서 논란이 됐던 기후위기 주범 산업계를 대변하는 인사들은 탄녹위 구성에서 사라졌지만, 이제 그들의 산업을 대변하는 교수·연구원들이 산업계의 빈자리를 메꾸면서 학계·전문가의 비중이 훨씬 더 높아졌다.

정책 결정 과정에 있어서 우리가 기후위기 최전선 당사자의 직접 참여를 외쳤던 이유는 이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지, 단순히 ‘자리’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그 자리에 앉아있었는지’보다 ‘누구를 대변하는 자리였는지’가 더 중요하다.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한 이의 특정 ‘정체성’이 해당 정체성의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전문가와 정부 관료가 노동자 계층을 위해 활동할 수 있고, 조직된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자본과 영합해 지금의 불평등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라는 질문을 양자택일의 질문으로써 던진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소수의 지배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일하는 정부인가? 다수의 평범하고 다양한 민중을 위해 일하는 정부인가? 이 양자택일의 질문은 이분법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지배구조를 그려낸다. 권력을 독점하는 이가 한쪽에 있다면, 다른 한쪽은 권력을 박탈당했다. 다만 이러한 지배구조가 종잡을 수 없는 ‘환상’처럼 보이는 이유는 지배와 피지배를 나누는 선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아니, 자본주의야말로 환상을 지어내고 교란을 일으키는 체제다.

우리 몸의 일부이자 근원인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이로우며, 필수 불가결한 행위라고 자본주의는 가르친다. 지구를 쥐어짜서 이윤을 내는 기업이 없으면 노동자는 죽고 말 거라는 믿음을 자본주의는 강요한다. 따라서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고 자본주의에 속한 이는 믿는다. 머리(의식)와 몸(계급)의 분리는 혼란을 초래한다. 머리는 권력을 독점한 집단을 대변하고 몸은 그 권력 집단에 의해 힘을 박탈당한다. 몸은 평생 속박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나 머리는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정당을 선택한다. 이러한 몸과 머리의 분리로 인해 지배와 피지배를 구분하는 선이 어디쯤인지 가려지게 된다. ‘행동은 의식의 반영’이라는 전제하에서 우리에게 남은 실마리는 그가 ‘누구를 위해 행동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마리마저도 온갖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포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헝클어지기 십상이다. 자본 권력은 ‘당신이 한 행동은 당신의 계급을 위한 것’이라는 자기기만의 덫을 사방에 던져놓았다. 환경운동가와 노동운동가가 그 덫을 밟고 거대 자본이 자연과 노동자를 착취해 얻은 이윤의 부산물을 얻어먹으며 환경과 노동자를 위해 일한다는 자기기만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라. 그들 의식에는 자본 권력이 심어준 정당화 논리가 열심히 작동하고 있다.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가 뭐가 중요해?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한 거지!’ 자본 권력의 이러한 책략은 나의 의식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행동이 실질적으로 누구를 위해 기여하는지 분별력을 가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구조를 은폐하고 교란하는 자본 권력의 의식화 전략을 폭로하고 저항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허구:
자본 권력을 위해 일하는 정부와 시민단체 그리고 거버넌스


대한민국 정부를 비롯해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경제를 의탁한 국가의 정부는 자본 권력의 의식화 전략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거나, 통제하지 않고 있다. 자본 권력은 언론매체를 포함한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고, 시민사회가 계급성을 스스로 혐오하도록 부추겼다. 시민사회 일부 인사들은 시민을 대표해 정부와 ‘민관협치’를 추구하는 거버넌스를 만들어 놓고는 정부를 위해서, 나아가 정부를 통제하고 있는 자본 권력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다. 그들의 활동은 기업을 감시하거나 견제하는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기업 독점 체제에 통합되는 활동만을 벌인다. 그것들은 대개 개인의 실천 내지는 봉사 영역으로 축소된다. 그 활동 자체가 시민사회 내부에 교란을 일으키고 계급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만든다.

가까운 예로 충북지역 환경단체와 거버넌스가 주최한 ‘2022 충북환경인의 날’은 SK하이닉스의 지원을 받았다. SK하이닉스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기후위기 주범 기업 중 하나이며, 더군다나 청주 도심 한 가운데에 반도체 공장 증설을 위해 자체적인 LNG 발전소를 짓고 있다. (최근 공장 증설 계획이 사실상 취소됐으나 발전소 건설을 강행하고 있고, 청주시는 이를 내버려 두고 있다.) 이날 행사에서 SK하이닉스는 ‘연대와 협력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초대됐다. 이날 수년째 발전소 건립을 반대하며 투쟁하고 있는 주민과 단체들의 목소리는 까맣게 지워졌고,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고 환경교육을 하는 이들은 상을 받았다. 교란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이는가?

한편 민주주의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선거제도와 정당제는 다원적인 정치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미국 정치이론 테스트: 엘리트, 이익 집단 및 일반 시민 Testing Theories of American Politics: Elites, Interest Groups, and Average Citizens’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은 1982년부터 2002년까지 20년 동안 미국에서 시행된 주요하고 다양한 정책 1,779건을 분석했는데, 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 엘리트와 이익 집단이 미국 정부의 정책에 독립적으로 두드러진 영향을 미친 반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시민 내지는 대중은 영향은 미미한 영향을 미치거나 독립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해당 논문은 실제 정치의 장에서 미국의 네 가지 정치 이론 중 ‘자본 엘리트 지배 이론’과 ‘상층 편향적 다원주의 이론’이 작동되는 반면, ‘다수결 선거 민주주의’나 ‘다수결 다원주의’는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증명했다. 다시 말해 해당 논문은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왜곡을 일으키고 있고, 자본 권력을 중심으로 한 권력 집단이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음을 실증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고도화했다고 평가받는 미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는 국내 민주주의를 진단하는 데도 참고할만하다. 우리는 이미 경제 엘리트들과 재계가 지지하는 법안은 너무나도 쉽게 국회를 통과하지만 노동자, 시민이 요구하는 법안은 국회만 들어가면 멈추고 방해받는 현실을 지켜보고 있다. 국회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국회의원들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살펴보자는 질문을 다시 적용해보면 상황은 좀 더 선명해진다.

2020년부터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화물연대의 안전운임제 일몰 폐지와 품목 확대 요구를 비롯해 중대재해처벌법, 근로기준법, 노조법 개정 등에 있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논의를 지연시키고 주요 쟁점들을 탈락시키고 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거대양당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사이좋게 근본부터 파괴”하고 있다며 ‘법인세 인하’가 포함된 2023년 조세와 예산에 대한 밀실 합의를 페이스북에 폭로했다. 거대양당은 민중이 각자 삶의 현장에서 시작한 전선(戰線)을 쪼개고 투쟁과 논의를 지연시킴으로써 현재의 자본주의 독점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선거 제도와 정당제는 민주주의를 담보하지 못한 채 고장 난 기계처럼 방치돼 있다.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 혹은 노동·시민사회는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고군분투하고 있거나, 더 이상 투쟁하지 않는다. 정치에 답답할지언정 함께 분노를 모으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기후정의: 자본주의 지배동맹을 폭로하고 반대하자

일찍이 자본주의에 내재한 교란과 기만의 속성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거대 자본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생명 그리고 터전을 파괴했는지, 어떻게 우리의 통제력과 권리를 앗아갔는지 폭로하는 단체들이 있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기업감시(CorpWatch)는 그 대표적인 단체다. 기업감시는 21세기를 앞두고 ‘온실가스 깡패 대 기후정의 Greenhouse Gansters vs. Climate Justice’1)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 이들은 초국적 자본 권력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고, 인권 침해를 조장하면서 전 지구적인 환경 재앙을 일으키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기후정의’를 정의내린다. (보고서의 저자 중 한 명인 케니 브루노Kenny Bruno는 1996년에 〈그린워시: 기업 환경보호주의 이면의 진실Greenwash: The Reality Behind Corporate Environmentalism〉을 앞서 펴내기도 했다.) 기후정의를 설명한 부분을 요약 번역하자면 이렇다. 기후정의는 지구 온난화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지구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을 계속해서 길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후정의는 생산 및 유통의 모든 단계에서 온실가스 깡패들이 저지른 파괴에 반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서의 기후정의는 저소득 지역사회, 유색 인종 지역사회 또는 화석연료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는 방법이 아니다. 대신 이들이 더 건강하고 공정한 환경에서 일하고 살 수 있도록 정의로운 전환을 강조한다. 기후정의는 모든 국가가 온실가스 배출의 급격한 감소에 참여해야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현재 지구 온난화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선진국이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의미다. 개발도상국(‘저개발국가’가 정확한 표현이다-필자 주)을 위한 기후정의는 세계은행 및 세계무역기구와 같은 국제기구가 기업주도의 화석연료 기반 세계화에 대한 자금 지원 및 촉진을 중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기후정의는 화석 연료 기업이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 역할에 대해 책임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보고서는 온실가스 깡패 기업들이 지구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들을 다섯 가지 ‘D’로 간파한다. Deny(부인하기)·Delay(질질 끌기)·Divide(분란 만들기)·Dump(다른 곳에 쏟아버리기)·Dupe(속이기).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며, 관련 논의와 합의를 지연시키고, 민중 내부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한다. 오염·유해 산업을 해외 저개발 국가로 이전시키고 이런 전 과정을 통해 민중을 속인다! 그들은 화석연료 기반 산업이 엄청나게 많은 이들을 고용하고 있고, 경제 성장에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내버려 둬야 한다는 여론을 만든다. 이때 마치 기업은 노동자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경영하는 것처럼 자신의 지위를 드러낸다. 하지만 기업들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수·합병 등을 거치며 대규모 구조조정을 하고 노동자들을 내쫓고 있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분열 전략은 실질적으로 기후정의 운동을 펼치는 데 있어서 노동자·시민사회 내부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기후정의의 요구는 독립적인 민중의 힘이 기업의 탐욕스러운 파괴 행위와 그들의 속임수,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고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을 중단하는 데서 생겨난다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본 권력을 위해 복무하는 정치·경제·언론·교육·문화 등의 집단들은 그들과 지배동맹을 이룬다. 이들을 ‘자본주의 지배동맹’이라고 부르자! 우리에게 땅과 식량, 독립적인 노동과 공동체, 우정으로 가득한 세계를 박탈한 것은 다름 아닌 자본 권력과 그들을 위해 말하고 일하는 집단들이다. 기업의 책임은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온난화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에 있고 세계금융기구가 기업의 범죄행위를 부추기고 지원하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으로 완료된다. 자본주의 지배동맹이 더 이상 동맹체를 결성할 수 없을 때, 그들이 사분오열 흩어지게 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전진할 것이다. 우리 함께 자본주의 지배동맹을 폭로하고 반대하자.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다시 양자택일의 질문을 당신에게 던진다. 당신은 자본주의 지배동맹을 위해 살 것인가? 민중인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의 몸이자 근원인 지구 생명과 터전을 위해 살 것인가? 이는 틀에 박힌 ‘이분법’이 아니라 지배와 착취가 작동하는, 살아있는 정치적 현실이 존엄한 당신에게 매일 묻고 있는 질문이다. 아니, 당신의 존엄이 당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후자를 택한다면 우리가 공동의 전선에 서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싸움과 나의 싸움이 존엄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투쟁이라는 진실을 말이다. 화물노동자의 과로·과적·과속의 노동은 나의 과로·과적·과속의 삶과 같은 뿌리에서 비롯됐다.2) 나 스스로를 소진하고 파괴하는 삶은 태워지고 파괴되는 화석연료의 삶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오랫동안 복잡한 속임수와 계략에 혼란스럽고 답답한 시절을 보내왔다.

자본주의 지배동맹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가 연대하고 동맹을 이뤄야 한다. 그 첫 시작은 우리 삶과 의식 곳곳에 침입하고 있는 자본주의 지배동맹을 드러내고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들의 폭력과 범죄행위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단호하게 반대하자. 그리고 서로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내자. 새만금, 가덕도, 제주도 신공항 건설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 지리산 산악열차를 반대하는 이들, 석탄발전소·양수발전소·LNG발전소, 핵발전소, 핵폐기물 처리시설, 산업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 공장식 축산과 대규모 동물 학살을 반대하는 이들, 나와 동료 노동자·시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 해고 위협에 맞서 싸우는 발전소 노동자와 인간다운 노동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이들과 함께 모여 동맹을 만들자.

자본주의 지배동맹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부정의와는 과감하게 결별하자. 그들에게 결별을 선언하자. 굴욕을 버리고 존엄을 되찾자. 화물연대 파업을 지지하며 발언한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유최안 동지의 말을 기억하자.

“이길 수 없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해도 안 되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알고 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을 위해 팔 하나 정도는 자를 수 있는 정의로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닌 이제 우리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해 갈 고민, 그리고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 혼자의 괴로움이 아닌 망설이고 있는 저 지저분한 인간들이 용기를 낼 수 있게, 어떻게든 내 가족 내 새끼밖에 모르는 저 지저분한 인간들이 가슴 속에 거름을 덜어낼 수 있게 여러분들이 우리가 그리고 내가 마중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주>
1) CorpWartch의 홈페이지(https://www.corpwatch.org/our-history)에는 환경, 경제, 인권에 대해 기업이 어떤 범죄를 자행하고 있는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드론 전쟁을 통해 어떤 전쟁 이익을 누리고 있는지, 미국 정부와 국회가 대기업의 권한을 견제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했는지 등에 대한 지난 20년간의 활동과 보고서들이 공개돼 있다.
2) “파업하자”, 채효정, 〈경향신문〉, 202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