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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 서비스를 건강권의 영역으로! 일해라 복지부!”

모임넷, 복지부 찾아가 유산유도제 즉각 승인・임신중지 건강보험 적용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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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인 9월 28일, 시민들은 직접행동의 일환으로 보건복지부가 있는 세종시를 찾았다. 활동가, 학생, 의료인 등 30여 명의 시민들이 버스를 대절해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까지 간 이유는 임신중지 건강보험 적용 및 유산유도제 도입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낙태죄’ 폐지 이후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기대했지만, 여전히 여성들에게 큰 부담을 지우고 있다. 임신 중지를 위한 정보는 부족하고, 의료비는 값비싸다.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유산유도제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비공식적 루트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


이날 권리보장 버스에 오른 시민들은 임신중지 합법화가 여성의 재생산 권리 보장으로 이어지려면 임신중지 선택을 허용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결정이 가능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의료적 조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역할을 해야 할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정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시민들은 “일해라 복지부!”를 외치며 오전부터 대형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날 12시 반 복지부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선 정부를 향한 따가운 질타들이 쏟아졌다. 우선 미프진으로 알려진 유산유도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이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사무국장은 “복지부와 식약처는 유산유도제 도입은 여전히 미룬 채 불법유통을 근절한다며, 국제적으로 품질이 보증된 유산유도제를 제공하는 우먼온웹 사이트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라며 “약물적 방법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물리적 지역적 장벽을 낮추고 사생활도 보호해주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정부는 이른 시일 내에 유산유도제를 도입해 안전하고 신속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비상임연구원은 예방의학 전문의이자 건강정책 연구활동가인 김 연구원은 입법 공백을 이유로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제도 마련에 나서지 않은 복지부의 입장에 대해 “처벌과 상관도 없는 필수의료를 법 없이는 진행할 수 없다는 말은 복지부의 직무태만”이라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한국의 어떤 의료서비스도, 심지어 심장이나 간을 바꾸어 끼는 이식 수술조차도 별도의 법적 규정을 요구하지 않는데, 임신중지는 왜 별도의 법적 근거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인가”라며 “코로나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한 일의 범위, 내용, 속도를 생각하면, 미프진 도입과 임신중지 건강보험급여, 더불어 성과 재생산 건강 보장을 위한 법체계 마련과 정책도 이미 실행됐어야 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신 중지를 다루는 부서가 ‘인구정책실’이란 점도 비판 거리였다. 김 연구원은 “국민 건강권을 위해 일한다는 복지부는 여성건강을 담당하는 부서 하나 가지고 있지 않고, 여성이 겪는 임신이 아닌 출산의 과정인 임신만 중요하다는 ‘인구정책실’ 소속 출산정책과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대응도 하는 상황”이라며 “출산정책과에선 낙태죄 폐지 이후 ‘입법 공백’ 운운하며 남 탓만 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성과 재생산의 권리는 여러 조건 속에서 차별받고 있는 장애여성에게 특히 더 멀기 때문에 이를 고려한 지원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장애여성의 경우 장애인 거주시설, 지역사회에서 장애여성 강제 피임이 벌어지고, 불임 시술도 잇따른다.

여름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는 “차별과 권리침해의 현실을 제대로 목도해야 권리보장 중심으로 지원체계를 재구축할 수 있지만 국가는 제대로 된 실태조사조차 하지 않고 있다”라며 “장애여성의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을 위한 지원제도를 구축하고 만들어 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복지부의 장애여성에 대한 모성 보건사업 내용에 대해 “국가가 가부장제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여성이 요구받는 성역할을 수행할 때만 공적인 지원제도를 받을 수 있는 국민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내용”이라며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복지부…
“임신중지 권리보장 위해 사회운동의 힘이 더 커져야 할 것”


한편, 권리보장 버스 참가자들을 조직한 ‘모두의안전한임신중지를위한권리보장네트워크(이하 모임넷)’는 이날 오후 복지부와의 면담에서 임신중지 관련 의료서비스를 건강보험으로 보장할 것과 유산유도제의 즉각 도입, 임신중지는 물론 재생산 권리 전체를 건강권의 영역으로 다룰 것을 요구했다. 이밖에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체계를 구축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종합정보제공시스템을 마련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교육 실행 ▲사회적 낙인을 해소 및 포괄적 성교육 시행 ▲성·재생산 건강 권리 보장을 위한 법체계 마련 등을 추가로 요구했다.

면담 참석자들은 복지부와의 면담을 마친 후 “복지부는 모임넷의 요구안들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법적 상황의 한계를 언급하며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들다는 입장을 반복했다”라고 전했다. ‘낙태죄’ 폐지 이후 개정 입법에 대해 복지부는 여전히 종교계, 의료계 등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취하며 ‘사회적 합의’가 나올 때까지 관련 정책 마련을 미루겠다는 입장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나영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 활동가는 “모임넷은 해석이 다를 수 있는 사법적 영역이 아니라 건강권의 영역을 강조하며 복지부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라며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도 없고, 방향도 못 잡고 있는 복지부를 더 적극적으로 견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낙태죄 폐지를 대중적으로 밀고 왔듯, 복지부의 역할 촉구를 위해 더 강하게 요구하고 외쳐야 할 때 같다”라고 참석 후기를 밝혔다.

김새롬 연구원은 “복지부는 법제처로부터 모자보건법이 여전히 형식적으로 유효하다는 해석을 받았으며,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했다”라며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는 태도가 분명했다”라고 면담 내용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임신중지 허용 범위를 규정한 모자보건법 14조는 형법상 낙태죄 폐지가 무효화되면서, 제한적 허용 사유 역시 무효화된 것으로 해석이 되고 있지만 여전히 정부 부처나 일부 의료계, 종교계에선 이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활동가 역시 “기재부 출신이 복지부 장관이 나오고, 사회운동이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성과 재생산 권리보장을 위한 큰 변화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오늘 면담을 시작으로, 복지부를 압박하는 더 많은 일들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생산 권리와 불평등의 문제…공공성 의미 확대하면서 사각지대 없애야”

복지부에서 면담이 진행되던 같은 시각, 권리보장 버스에 탑승했던 다른 참가자들은 복지부 앞에서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체계 마련을 요구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정은희 사회주의전망모임 활동가는 아르헨티나의 사례를 들어 한국 정부가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정책 마련에 의지가 없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한국과 비슷하게 임신중지를 합법화한 아르헨티나에서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변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경기 악화 속에서도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지원은 무상으로 제공된다. 정은희 활동가는 “2019년 임신중지 합법화를 이룬 아르헨티나의 경우 임신중지 시술뿐 아니라 유산유도제까지 공적으로,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다. 자발적 임신중지 법안이 통과된 이후 11개월 동안 임신중지 시술은 3만 건 이상, 유산유도제는 4만 개 넘게 공급됐다”라며 “아르헨티나가 빠르게 재생산 권리 보장을 위한 변화에 나선 배경엔 여성들의 힘이 있었다. 2005년부터 페미사이드를 규탄하고, 이를 막기 위한 제도를 사회적으로 요구하면서 임신중지 합법화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은 파업도 하고 대규모 시위도 일으키면서 권리를 쟁취해 나갔다. 사회적 힘을 함께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타리 셰어 활동가는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에 있어 공공성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리 활동가는 “WHO의 미프진 권고 가격이 2만 원이고, 1만 원으로 유통되는 나라도 있는데, 현재 현대약품에선 35만 원을 부른다고 한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더라도 약값이 어떻게 결정돼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문제다”라며 “또한 유산유도제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면 끝인가 하는 고민도 든다.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남겨질 사람들을 고민해야 한다. 결국 불평등의 문제다. 공공성의 의미를 계속 확장하고, 끝까지 요구하면서 우리 사회 안전망을 더욱 촘촘히 해야 한다. 불평등 해소와 긴밀하게 연결된 이러한 문제들을 더욱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해 나가고 싶다”라고 밝혔다.


청소년 재생산권을 다룬 다큐멘터리 <미완의 시간>을 제작 중인 최혜리 씨는 “사회 경제적으로 취약한 조건에 있는 청소년들이 재생산권을 어떤 식으로 침해당하는지 기록하고 있다”라며 “특히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 청소년들의 실태를 복지부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어떤 지원을 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권리보장 버스에 탑승했다”라고 밝혔다. 최 씨는 “임신중지 낙인에 더해 청소년이라는 낙인까지 더해져 임신중지를 위한 병원을 찾기가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해 양육자의 지원이 없으면 임신중지가 지연되는 상황에 놓인 여성 청소년들은 한결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라며 “지금 복지부는 ‘입법 공백’ 상태를 말하지만 ‘권리 공백’ 상태가 더 심각하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