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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이슈] 워커스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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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뜨거운 곳으로 간다

차례

① 훼손된 강릉 앞바다, 그곳엔 삼성물산의 화력발전소가 있다
② 폐쇄되는 석탄발전소, 지워지는 노동자들
③ 핵발전 수명연장과 신규 건설, 사회적 갈등 커진다
④ 5만 명 모여 ‘9.24 기후정의행진’ 벌인다
⑤ ESG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ety), 지배구조(Governance)의 영문 첫 글자를 따서 조합한 단어다. 보통 ‘ESG’는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묻고 평가하는 지표로 설명된다. ‘ESG 경영’, ‘ESG 투자’, ‘ESG 우수기업’ 등과 같은 수식어적 표현으로 쓰이기 때문에 대체로 좋은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동안 기업들이 미디어를 통해 ‘ESG 경영’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왔다.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한 전문가들과 주류 환경운동도 ESG가 탄소배출 감축 노력에 기업을 동참시키고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중요 수단인 것처럼 소개하며 긍정적인 의미 확산에 기여했다. ‘4차산업혁명’이나 ‘그린뉴딜’, ‘탄소중립’ 같은 용어처럼 ‘ESG’도, 정부와 기업이 주도하는 각종 포럼이나 학회 등을 통해 ‘위로부터의 양적 살포’가 이뤄졌다. 또한 방송, 기차, 버스, 옥외광고판 등에서 반복 전시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이 용어에 노출되고 인상에 각인되는 방식으로 확산됐다. 그중에서도 ESG를 전파하는데 가장 앞장서 온 열성적인 전도사는 금융자본이다.

정확하게 보자면 ESG는 사회가 만들어낸 가치규범이 아니라, 자본시장에서 투자를 위해 개발된 새로운 평가 지표다. 투자자들에게 ‘지속가능한 투자’를 돕기 위한 정보 제공이 핵심 목표다.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란 말은 환경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지속가능한 경제’나 ‘생태적 지속가능성’과 혼동돼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은행과 투자사, 기업들이 말하는 지속가능한 경제란 ‘시장의 지속가능성’ 즉,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는 노동자나 농민, 시민들이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노동, 지속가능한 농업, 지속가능한 삶의 개념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투자와 지속가능한 금융시장은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ESG가 표방하는 ‘지속가능한 기업’이란 결국 녹색 성장류의 지속가능한 성장 모델을 벗어나지 않는다. 최근 탄소배출 기업이 ESG 평가에서 높은 등급을 받는 등 그린워싱으로 물의를 일으키자 일각에선 ESG가 오염되고 있다거나, ESG 기준을 강화해 신뢰도를 높이고 그린워싱을 방지하자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ESG 개념이나 가치는 훌륭하나 기업이 제대로 ESG를 하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제도화된 가치로서 ESG 자체가 거대한 개념의 그린워싱이다.

한국거래소에서 운영하는 ESG포털을 보면, “과거에는 기업을 평가함에 있어 ‘얼마를 투자해서, 얼마를 벌었는가?’를 중심으로 ‘재무적’인 정량 지표가 기준이었다. 그러나 기후변화 등 최근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가함에 따라 ‘비재무적’ 지표가 기업의 실질적인 가치평가에 있어서 더 중요”해졌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기업의 가치 평가에 비재무적 지표를 포함해 제공하는 것이 ESG의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지표가 환경의식이 높은 투자자들을 자본시장에 끌어들이고, 그들이 투자를 통해 기업 활동을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이 주류 환경운동과 환경경제학자들의 설명이다. 소비자들이 ESG 인증 상품이나 탄소중립 투자를 통해 당면한 위기를 시장적으로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이런 발상은, 금융시장의 생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너무나 순진한 설명이다.

ESG 등급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기업가치가 부과되며, 기업이 자금조달이나 투자유치에서도 유리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이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해보자. 만약 당신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데 기존의 신용등급 외에 당신의 환경 실천이나 사회적 책임을 대출이나 이자율 계산에 적용한다면? 이론상으로는 자신의 신용도를 높이거나 투자활동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환경 실천을 열심히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표로 ‘입증’돼야 하는 순간 관념상의 평화로운 이행 합의를 깨트리는 구조적 폭력성이 개입한다. 그 입증 수단이 당신의 투자와 소비라면? 당신이 소유한 자동차가 전기자동차인지, 평소에 탄소중립 휘발유를 구입하는지, 녹색 펀드, 주식에 투자하는 비율이 당신의 자산에서 어느 정도로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지가 당신의 ESG 등급으로 지표화된다면, 그것이 대출한도나 이자율을 결정하고 세금 감면 등 혜택을 준다면, 이것은 당신을 어떤 행동으로 유도할 것인가. 불필요한 ‘녹색 소비’가 당신의 ‘녹색 신용’을 창출한다는 이 거꾸로 된 모델이 개인이 아닌 기업에서 일어날 때는 그 폐해의 차원이 달라질 것이다. ‘녹색 투자’라는 금융의 메시지가 기업에 전달될 때, 기업은 공격적으로 탄소배출권을 구입하고, 탄소흡수원을 조성하며, RE100 인증을 받고, 넷제로 달성을 위한 수치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투자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이미 공격적인 재생에너지 확보, 탄소흡수원을 위한 토지의 점유와 약탈,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을 위한 자원전쟁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 주의 깊게 봐야 할 문제는 환경이나 사회에 대한 기업 책임이라는 ‘공적 가치’가 ‘투자 가치’라는 사적 자산로 전환되는 것이다. 탄소배출을 억제하기 위한 유인책으로 인센티브처럼 할당된 탄소배출권이 결국 금융상품으로 거래된 것과 동일한 형태가 ESG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공공기관이 아니라 주식, 채권, 펀드를 운용하는 한국거래소에서 탄소배출권 거래소를 운영하고, ESG 공시를 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거래소’는 증권·주식·채권 및 파생상품 시장의 개설과 운영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식회사’다. 환경, 사회, 기업 지배구조를 ‘가치화’해야 한다는 말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방식에는 ‘규제와 자유’라는 큰 간극이 있다. 시민사회를 비롯해 공공이 합의한 사회적 가치들을 기업 경영에 반영하도록 제도를 통해 강제하는 공공적 방식과 시장참여자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이해관계자들의 합의에 기초한 시장적 방식은 상호 대립한다. ESG의 척도를 누가 만들고, 평가하는가. ESG 기준을 ‘노사정 협의회’에서 만들고 이행을 점검할 수 있는가? 시민사회와 정부에서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시장과 다른 가치 척도로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제재나 지원 등 정책에 반영해 기업 경영에 개입하고 지배 구조를 개혁할 수 있다면, ESG를 기업에 대한 환경·사회적 통제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투자자들은 ESG주식과 펀드에 투자하지만, 그 금융파생상품이 어떻게 조합되고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른다. 이 상품이 우량 상품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드는 것도, 평가 등급을 매기는 것도, 판매하는 것도, 모두 자본시장의 민간 평가회사와 금융기관이다. ESG를 시장 가치로 창출하는 중심에 금융자본이 있는 것이다.

최근 ESG가 갑자기 부상한 것도 2020년 세계 최대 투자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 연례 서한에서 주요 기업들에 ‘환경 지속가능성을 핵심투자 기준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국내 많은 환경단체와 전문가, 활동가들도 그 서한에 고무돼 초국적 금융자본조차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다며 한국의 정부와 기업들에 각성을 촉구했다. 정말로 굴지의 금융자본가가 기후위기에 경각심을 가지고 지구를 살리는데 앞장서야겠다고 ‘회심’한 것일까? 답은 금융자본이 스스로 알려주고 있다. 같은 해, 도이체방크는 2030년이면 전 세계 ESG투자 규모가 130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한화로 하면 약 14경5000조 원이다. 올해 블룸버그는 ESG 자산이 지난해(2021년) 말까지 역대 최고치인 37조8000억 달러로 급증했으며, 2025년 말에는 운용 규모가 전체 글로벌 자산시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3조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엄청난 규모의 ‘ESG 시장’에 대한 전망은, 다시 말하면 ESG를 통해 시장을 팽창시켜 성장 위기를 탈출하려는 자본의 희망이다. 윤리적 책임과 의무조차 시장가치화해서 자산으로 둔갑시키는 비결이 바로 ESG의 마술이다. 정부도 ESG 시장 확대를 지원한다. EU는 역내 모든 금융기업을 대상으로 ESG 공시를 의무화했다. 규범이 제도화되면 지표는 공신력을 얻게 되고, 환경, 사회, 지배구조 같은 무형의 공적 가치들이 거래 가능한 시장 가치로 성공적으로 전환된다.

이를 통해 자본시장에는 기존의 재무가치에 더해 비재무적 가치라는 새로운 기업의 교환가치가 생겨난다. 기존의 기업 가치에 ESG 가치가 더해진 셈이다. ESG는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던 사회적 가치를 기업의 투자지표로 바꿔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교환가치로 바꾸는 놀라운 창조경제를 실현한다. 탄소거래제가 탄소를 상품화한 것처럼, ESG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 같은 비물질적이며 공공적인 사회 가치들을 금융투자상품으로 전환시킨다. 이 과정은, 탄소배당과 탄소배출권 거래제가 기업에 물어야 할 탄소배출 책임을 반대로 기업의 권리이자 자산으로 만들어준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런 금융기법을 통한 창조경제는 지금까지 금융자본주의가 금융공간에서 지탱해온 시장의 붕괴를 일시적으로 연장시킬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더 큰 금융위기로 돌아올 것이다.


ESG는 시장제도인데다 인센티브 방식이기 때문에 기업에 대한 실효성 있는 정부 규제나 시민적 통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업이 친환경기술을 개발하거나 녹색산업(그린 택소노미)으로 분류된 산업 분야에 투자하면 기업의 ESG등급은 올라가고 그만큼 정부지원금을 받거나 투자 유치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반면 ESG 등급이 낮다고 제재가 따르는가? ESG 등급을 포기하는 대가로 다른 영업에서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면 기업은 당연히 ESG를 포기한다. 화석연료 기업은 ESG에서 D를 받아도 수요와 수익이 있는 한 석유 채굴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재생에너지 시장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다국적 에너지 기업 중 다수가 천연가스와 핵발전소를 석탄발전소와 함께 운영한다. 독일의 탈핵 정책이 영업에 피해를 초래했다며 투자자-국가 간 분쟁 해결 절차(ISDS)를 통해 막대한 손해배상액을 청구한 유럽 최대 에너지 기업인 바텐팔은 재생에너지 시장 확대에 주력하는 동시에 보유한 석탄화력발전소도 계속 운영한다. 기업의 입장에서 제재는 없고 보상은 큰 ESG는 일종의 수익 다각화 전략으로 활용될 뿐이다. 국내 굴지의 석유화학기업인 SK가 ESG를 선도하고, 탄소배출에 앞장서 온 현대자동차나 포스코가 ESG에 앞장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친환경 식품 시장이 소비자들에게 대체상품과 선택적 다양성을 제공해 시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할 뿐 농업 생산의 구조를 바꾸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ESG도 소비자·투자자들에게 일종의 ‘대체 투자 상품’을 제공할 뿐, 기업의 구조와 생산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없다. 유기농 친환경 인증제가 녹색산업으로 포섭돼 시장에서 다양한 대체 상품의 선택지를 제공할 뿐 산업화된 농업을 생태적으로 복원하거나 상품화된 먹거리 체제를 건강하게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ESG인증제도 마찬가지다. 전기자동차가 내연기관자동차를 퇴출할 수 있는지, 재생에너지가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지 시장의 경쟁력에 달려있지 않다. 그건 사회적 세력 관계와 정치적 결정에 달린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가지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리버럴 학자들은 종종 ESG가 표방하는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동안 서구 사회가 발전의 척도로 삼아온 GDP 같은 단일한 경제성장의 지표 외에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평가 지표가 개발된다면, GNP나 GDP의 폐해를 일정 정도 상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지표들이 기업을 갱생시켜 지금보다는 좀 더 인도주의적인 자본주의로 변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대한 착각이다. 한국 최대 석유화학 기업인 SK가 ‘탄소중립 휘발유’를 출시하고, ESG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모습을 보라. 탄소를 배출해도 탄소배출권이나 탄소흡수원을 구매해서 배출을 상쇄시켜줄 수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낸 탄소중립의 ‘상쇄의 셈법’은 ESG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ESG는 기업이 과거에 저질러온 생태 학살을 앞으로 잘하겠다는 ESG 경영의 미래 계획으로 상쇄시켜주고, ‘그곳’의 생태범죄를 ‘이곳’의 윤리경영으로 세탁해준다. ‘북반구의 그린뉴딜이 남반구에선 녹색식민주의’라는 외침을 지금 ESG 지표를 위해 도구로 동원되는 존재들도 그대로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들의 ESG 투자와 경영은 우리의 반환경적, 반사회적, 자본지배를 의미한다.”

ESG가 새로운 것도 아니다. 1987년 유엔환경계획(UNEP)이 ‘우리 공동의 미래’(브룬트란트 보고서)를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처음 제시한 이래, ‘지속가능한’이란 개념은 자본의 위기 때마다 조금씩 변형돼 왔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나 ‘기업의 사회적 가치창출(CSV)’은 ESG가 유행하기 이전에 ‘지속가능한 경영’을 대변했던 대표적인 개념이다. ESG는 2004년 UNGC의 보고서(‘Who Cares Win’)에서 처음 사용됐고, 2006년 유엔PRI(책임투자원칙)는 ESG를 투자 결정과 자산운용에 고려한다는 원칙을 발표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4.0’ 논의가 본격화했고, 2019년 다보스 포럼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의제로 선정되고 이후 팬데믹과 기후위기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ESG가 ‘지속가능한 자본주의’ 방식의 하나로 재부상했다. 결정적으로 ESG를 투자 결정 요인으로 고려하겠다는 블랙록 래리 핑크 회장의 선언이 전 세계 기업과 국가들에 메시지를 타전한 것이 ‘ESG 투자시장’을 만들고 ESG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만든 계기가 됐다.

록펠러가 기업에 대한 비난을 칭송으로 바꾸기 위해 사회공헌과 기여라는 상쇄 수단을 사용한 ‘자선 자본주의’ 모델을 창안한 이후 이 모델은 여러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ESG는 CSR과 CSV와 함께 그 계보를 잇고 있다. 위선과 거짓이 폭로될 때마다 ‘착한 자본주의’는 조금씩 다른 개념으로 갈아타며 혁신을 거듭해왔다. CSR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주로 기부, 기여, 봉사와 연계된 사회공헌활동으로 입증하려 했다면, CSV는 기업이 사회적 문제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해결책을 제시해 ‘사회적 문제 해결’과 ‘기업의 수익 창출’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한다. ‘솔루션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유형의 사업은 ‘사회적 가치 창출’ 개념을 통해 탄생했다. 기업 입장에서 보자면 자선, 기부, 사회봉사, 사회공헌 등의 형태로 기업 이미지 제고에는 도움이 되지만 수익과 연결되지 않는 CSR 모델의 한계를 극복하는 혁신이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적극 상품으로 개발해 공익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독거노인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이 독거노인 돌봄 봉사활동 정도에서 돌봄 상품 개발로 진화한다. 실내 카메라와 앱을 연동해 생체정보를 체크하고, 필요시 병원이나 119에 연락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고, 이런 사회적이고 공익적인 기술 개발에 공공재원 투입을 유도하고, 그렇게 개발된 상품을 다시 공공기관이 구매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이란 말은 이런 방식으로 공공적이며 사회적인 가치들이 기업에 의해 상품화되고 시장화되는 현실을 교묘하게 은폐했다. 이런 모델을 주창한 경제학자들은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해결을 촉구했기 때문에,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회 참여적 지식인처럼 보였고, 자신들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드러낸 사회 문제들을 늘 기술적·시장적 방식으로 해결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회 문제에 대응하는 용어도 새롭게 개발돼 소셜 디자인은 사회 운동을, 리빙랩은 생활 정치를 대체하고 혁신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혁신의 요체는 ‘가장 정치적인 것을 가장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개별적인 문제로’ 해결해가는 방식이었다. 솔루션 비즈니스는 ‘혁신’을 주창한 민간 싱크탱크나 스타트업이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하나의 솔루션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솔루션 상품이 개발됐다. 이렇게 해서 ‘사회적 가치’는 새로운 사회서비스 시장을 만들어냈고, 끝없는 대체 상품이 개발될 수 있는 사회 솔루션 시장이라는 무한 파생상품 시장이 탄생했다. 문제가 있는 곳에 기업은 해결책을 만들어낸다고 선전했다. 물론 상품의 형태로 수익을 남기면서 말이다. ESG는 사회적 가치를 상품 가치로 적극 창출하는 아이디어를 한 번 더 혁신시켰다. ‘사회적이며 공익적인 가치’ 자체를 수량화해 금융투자상품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산운용회사’들이 지구가 아니라 투자자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금융시장에서 투자자들은 평등하지 않다. 금융은 ‘큰손’을 우대한다. 수수료는 거래금액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투자자의 권력은 돈에 따라 철저히 위계화된다. 블랙록의 래리 핑크는 투자자들의 자산을 대신 운영하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대표지만 동시에 그 자신이 최상위층의 투자자를 대표하는 금융자본가다. 이 금융자본가의 메시지가 전 세계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하다’고만 할 수 있는 문제인가. ESG는 기업의 ‘정치적 지배력’을 ‘사회적 책임’과 혼동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자본이 가진 막강한 영향력을 좋은 방향으로 발휘하도록 만들 것인가’ 같은 자가당착에 빠진 물음이 아니라 ‘그토록 막강한 자본의 지배력을 어떻게 해체하고 자본으로부터 권력을 탈환할 것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