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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한 겨울, 영산마을 주민들이 시작한 싸움

[유하네 농담農談] 땅도, 유하네도, 영산마을도 위로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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쩍 갈라진 땅에 하얀 눈이 옵니다. 한 해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느라 상처를 가득 품은 땅을 하얀 눈이 위로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낸 땅은 더욱 포슬포슬해져 한 해 동안 새로운 식물을 키울 힘을 품습니다. 겨울은 농부에게 위로가 되는 계절입니다. 농부들도 하얀 눈의 위로를 받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봄을 기다립니다. 유하네도 새봄을 기다리며 농한기를 보냅니다.

보물과 선물이 오는 겨울

유하네는 농한기 내내 콩을 삶습니다. 메주와 청국장을 띄우기 위해서입니다. 노랗고 동글동글한 백태를 잘 씻어 큰 솥에 넣고 마른 나무들을 주워와 불을 피워 다섯 시간을 끓입니다. 강한 불꽃에 콩물이 넘칠까, 물이 부족해 콩이 솥에 눌어붙을까 노심초사하며 불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유하 파파는 꼬박 5시간 동안 불멍을 때리며 솥 앞에 앉아있습니다.

콩이 진한 노란색으로 변하고 손끝에 놓고 누르면 뭉그러질 정도로 삶아지면 큰 대야에 옮겨 빻습니다. 쿵더쿵쿵더쿵 방아를 찧어 네모난 틀에 넣고 누르면 메주가 완성됩니다. 예전에는 못생긴 것을 보고 메주처럼 생겼다고 했었지요. 메주를 만들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노랗고 반듯한 메주는 어느 것보다 예쁩니다. 정월까지 따뜻한 방에서 이리저리 뒤집으며 잘 띄우면 된장과 간장을 만들 수 있으니 보물입니다.

  겨울의 보물이자 선물인 메주와 청국장 [출처: 이꽃맘]

또 5시간 동안 삶은 콩을 작은 대야에 옮겨 지푸라기를 꽂아 방 한편 따뜻한 곳에 이불을 덮어 놓습니다. 유하네가 사는 작은 집 가득 쿰쿰한 냄새가 나면 하얀 실이 가득한 청국장이 만들어집니다. 쿰쿰한 냄새가 싫을 만도 한데 세하는 “겨울에 제일 맛있는 건 청국장”이라며 즐거워합니다. 천일염과 고춧가루를 넣고 빻아 만들어놓은 청국장 한 덩이에 김치랑 고기를 조금 넣고 바글바글 끓이면 유하 세하는 밥 한 그릇 뚝딱입니다. 겨울이 주는 선물 같은 청국장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모이다

고요하고 편안한 농한기에 유하네를 괴롭히는 것들이 등장했습니다. 지난해 11월 마을 입구 논 한 가운데에 커다란 레미콘이 들어와 콘크리트를 붓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곳에 축사가 웬 말이냐.” “논 한가운데 축사가 들어오면 우리는 농사를 어찌 짓느냐.” 온몸으로 막은 끝에 레미콘은 콘크리트를 붓다 말고 쫓겨나야 했습니다.

유하네가 사는 영산마을은 선배 농부들이 오래전부터 친환경 농사를 지어왔습니다. 우렁이를 풀어 벼농사를 짓고 제초제를 뿌리는 대신 손으로 풀을 뽑으며 밭농사를 지었습니다. 유하네는 선배 농부들과 지구를 지키는 농사를 짓고 싶어 이 마을에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곳에 대형축사라니, 마을 주민들은 화가 났습니다. 보통 작은 마을에 대형축사가 들어오면 벌레를 쫓기 위해 약을 치고, 약을 치다 보면 친환경 농사는 물론이고 관행 농사도 어려워집니다. 결국 농부들은 축사를 짓겠다는 사람에게 땅을 팔고 그 작은 마을 전체는 대형축사로 가득 차는 게 보통입니다. 우리 마을을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며 마을 주민들이 함께 들고 일어섰습니다.

영산마을 이야기

우리가 살고 있는 영산마을은 참 이야기가 많습니다. 영산마을은 신령한 산이라는 영산 밑에 있는 마을입니다.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는 호암산이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은 마을이지요.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산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마을 중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 작은 성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98년 영산성당이 세워진 뒤, 이 작은 성당은 마을 강당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을 만든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우리 마을 사람들은 참 잘 모입니다. 마을에 큰일이 벌어지면 이걸 핑계로 더 자주 모입니다. 앞집 할머니는 여름에 거둬 얼려놓은 옥수수를 구워 먹자고 사람들을 모으고, 옆집 아저씨는 시골 어르신들의 최애 프로그램인 ‘6시 내고향’에서 본 물메기를 사 와 국을 끓였다며 모이라고 합니다. 건넛집 할머니는 가래떡을 뽑았다고, 버스정류장 앞 할머니는 도토리묵을 쒔다고 모이라고 합니다. 축사 문제가 터지자 마을 사람들이 더 자주 모입니다.

모일 때마다 불만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우리가 집 하나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고, 비행기 소리까지 참아가며 살고 있는데 아주 마을을 통째로 없애겠다니 어쩌면 좋냐.” 앞집 할머니가 한숨을 푹 내쉽니다. 우리 마을은 호암산 건너편에 있는 공군부대 탄약고 때문에 군사보호 지역으로 지정돼 새집도 못 짓습니다. 비행쇼단 블랙이글스가 저공비행을 해 엄청난 소음공해에 시달리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늙어서 아무것도 못 해. 젊은 너희가 좀 도와줘” 하십니다. 40대 중반이 된 유하 엄마와 유하 파파는 이 마을의 막내입니다.

축사 부지 길목에 집회 신고를 내느라 원주경찰서를 드나들고, 국민신문고에 매일 민원을 올리고, 공군부대에 전화를 걸고…. 평화로워야 할 농한기에 유하 파파와 유하 엄마는 싸움꾼이 됐습니다.

위로가 되길

  블랙이글스 해체 싸움에 함께 합니다. [출처: 이꽃맘]

면사무소도, 원주시청도, 공군부대도 모두 법에 따라 진행한 것이라 자신들의 책임은 없다고 합니다. 대형축사를 짓는다는 옆 마을 건축주가 마을 어르신들을 고소하는 등 주민 간 갈등이 심각하지만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피해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허가를 내준 책임이 행정관청이 분명함에도 다들 뒷짐 지고 구경만 합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마을 어르신들은 좋다고 하십니다.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와서 얘기도 들어주고 인터넷으로 자신들의 얘기도 해줘서 너무 좋다고 하십니다. 젊은 사람들이 앞에서 움직이니 자신들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하십니다.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유하네의 움직임이 어르신들의 마음에 쌓여있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릴 수 있길 바라봅니다. 유하네가 영산마을에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봅니다. 물론! 축사는 반드시 막아낼 겁니다! 오랜만에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