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87년 체제’와 ‘48년 체제’를 넘어서

[사파시평] 덜 악마스러워도 악마는 악마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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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을 앞두고 진보 논쟁은 윤석열이냐 이재명이냐, 혹은 ‘그들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좋아’라는 3가지 선택지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한마디로 87년 12월 대선 지형의 참담한 재연이다. 아니 이데올로기적 지형은 오히려 87년보다 더 악화되었다. 1987년에는 변혁운동, 사회주의운동이 국가의 공안탄압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정립돼있었으나, 지금 2021년에는 보수정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긴급한 좌파의 입장이라고 공공연히 공표하는 현실이 도래했으니 말이다. 필자가 최근 지금이야말로 ‘좌파의 위기’라고 규정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22년 대선후보를 두고 ‘포퓰리스트’ 이재명보다 ‘자유민주주의자’ 윤석열이 낫고, 지금 좌파의 과제는 정권교체여야 한다는, 자칭 좌파단체의 논리 전개와 결론은 현재 좌파를 둘러싼 지형의 한계 속에서 길 잃은 모습 그 자체다. 그러니 이 단체의 입장문에 대해서 “이건 아니지” 라고 다들 비판과 비난을 퍼붓지만 어쩌면 사태는 오십 보 백 보인 것을.

왜냐하면 그나마 진보적인 주장, 즉 윤석열도 이재명도 찍지 말고, 민주당도 국힘도 찍지 말고, 그들이 아닌 그 누구든 제 3의 후보를 찍자는 제안도 좌파의 입장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당과 연정을 도모하다가 이제 안철수, 김동연과 연정을 도모하겠다는 후보를 내세운 당도 좋다는 입장이 적어도 ‘좌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좌파 단체(전국학생행진)의 입장을 좌파의 입장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마찬가지로 윤석열과 이재명만 아니면 된다는 입장도 좌파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단체의 입장문으로 ‘좌파’란 단어마저 조롱거리가 된 느낌이다. 그건 ‘좌파가 아니야’라는 말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재의 상태. 사실은 자신의 입장을 두고 좌파적인가 혹은 좌파의 주장에 동조하는가의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으면서 다른 주장들에는 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현실에서, 오십 보 백 보는 더욱 일반적인 모습이 되어 가고 있다. 좌파라는 단어마저 조롱거리로 삼고 있는 현재에,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의 시작은 이것이다. 한마디로 아래 논지를 요약하면, 보수 양당 독점구도와 선거민주주의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보다는 선택적인 적응을 선택한 좌파는 이미 좌파일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 다음에서, 미국의 대선에 대한 글을 기초로 밝혀보겠다.

“덜 악마스럽다고 해도, 악마는 모두 악마일 뿐이다.”(Lesser Evilism Is Still Evil)
2020년 11월 3일 치러진 미국 대선 즈음 나온 얘기다. 결론은 미리 말하면 이렇다.
트럼프로도 바이든으로도 대변되지 않는 인민들의 베이스가 있다. 그 곳이 바로 우리의 노동계급정당을 건설해야만 하는 장소이다. (This all means that there is a base of people who are not represented by either Trump or Biden. This is where we need to build our working class party.)

2020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레이스 중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 버니 샌더스가 경선을 중도 포기했다. 그는 포기했을 뿐 아니라,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조 바이든을 “decent man(좋은 사람)”이라고 칭찬까지 얹어 확실하게 정치적인 ‘승인’을 해주었다.
아 이런, “‘좋은 사람’이라니, 적어도 그 말만은 굳이 하지 말았어야지!” 라는, 샌더스 발언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decent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할 말이 아니다. 샌더스에 대한 내 의심이 한 푼어치 더 늘어난 순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바이든은 그의 정치적 성향과 지금껏 언행과 활동과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로 알려진 사생활을 봐서도 도저히 “좋은 사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된 경구대로, “덜 악마스럽다고 해서 악마가 아닌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대통령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미국이다. 이 나라에 이런 대통령이 가능한 이유는 역시 미국이 유지하고 있는 보수 독점 양당정치 덕분이다. 즉 도토리 키 재기식의 보수 양 정당이 대통령과 의회 다수당을 적당히 번갈아 나눠 가지면서, 중간선거라는 완충장치를 두고, 제 3세력이 불가능한 선거제도를 통해서, 철저히 인위적으로 제 3의 정치세력과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도적으로 진입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정치적 정립 속에서 트럼프 같은 대통령도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서 자한당, 미통당, 박근혜, 황교안, 차명진 등도 가능하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실정’속에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에 조금 다가간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이 정작 민주당 등록 유권자 표를 얼마나 얻어서 민주당 1위 후보가 됐는지 알아보자. 아래와 같다.
미국 선거명부상 ‘등록유권자’ 중 30%가 민주당원이고, 그중에서 30%가 2020년 민주당 후보 경선에 투표를 했다. 이중 무당파 독립 유권자를 제외하면 조 바이든은 등록된 유권자중 고작 9% (등록 유권자이면서 이번 민주당 경선에 투표한 자들의 교집합)의 지지로 민주당 대선후보가 됐다. 나아가 등록되지 않은 유권자들을 포함하면, 바이든은 미국 전체 유권자중 고작 4%가 지지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단지 4%가 지지! 결국 바이든은 민주당내에서조차 소수의 지지로 대선 후보가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같은 양당 독점 구도 하에서는,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당내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는다는 것은, 일종의 ‘예비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것과 같다. 선거(election)는 이미 선택된 사람(the elected)을 뽑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트(elite)라고 하는 것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모든 피선거권자 즉, 모든 평범한 사람들(the common people)을 대상으로 투표하지 않는다. 선거민주주의의 매개 장치인 정당정치가 있는 한, 미국 선거권자들은 항상 대부분의 선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내놓는 후보 두 명중 하나를 뽑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나라의 선거다. 이미 선택된 사람들을 뽑는 선거. 그런데 선택받을 후보를 뽑는 과정이 고작 유권자 3~4%의 지지로 이뤄지고, 그들이 모여서 전국 ‘선거인단’을 구성하고, 그 표들을 마지막에 산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식 선거민주주의의 실체다. 절대 소수가 다수결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활용하여 지배하는 민주주의 말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미국식’이 아니라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상부구조이자 정치체제로 제도화되는 과정은 자본주의적 계급적 이해관계를 유지하는 제한 속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바로 선거제도와 정당정치를 양대 축으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체제에는 다양성이 있다. 자본주의의 국가적 다양성만이나 외양과 운용면에서 민주주의 하위 체제의 다양성이 있다. 이 점에서 양당 독점구도와 독특한 ‘간접 선거’제도를 유지하는 이 민주주의를 ‘미국식 민주주의’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뭔가 비슷하지 않은가? 한국의 대선 후보 경선은 다른가? 2020년 한국에서 집권 민주당이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완전히 뭉개면서 위성정당 꼼수로 의석을 싹쓸이해 압승한 결과, 여대야소 거대 제1당이 되는 것은 뭐가 다른가? 한국이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87년 개헌으로 더 이상 간접 선거가 아니라 직선제 대통령제를 실행한다고 해도, 보수 양당 독점구도, 그리고 다른 대안적 이념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정당정치를 유지하는 소위 ‘48년 체제’ 하에서는 한국은 여전히 미국식 민주주의에 가깝다.

여기서 48년 체제란 국가 보안법 제정으로 사회주의를 정치시장에서 제도적으로 봉쇄하고, 한독당과 한민당의 보수 양당 체제를 유지했던 대한민국 국가 초기 정당체제를 의미한다. 이 체제는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18년의 권위주의 체제로 잠정 중단됐고, 80년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군사쿠데타로 계속 중단상태였다가 1987년 6월항쟁과 12월 헌법 개정으로 직선제 개헌과 김영삼 김대중 등 양 김씨에 대한 정치적 ‘해금’조처로 다시 복원된 체제를 의미한다. 87년 체제는 직선제 개헌과 자유주의 정당의 정치적인 활동 복원으로 보수 양당 체제로 복귀했고,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 정치는 계속 48년 체제의 연속으로서 87년 체제하에서 진보정치와 사회주의 정당 활동을 봉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보수 양당 독점구도와 선거민주주의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보다 선택적인 적응을 선택한 좌파는 이미 좌파일 수가 없다. 설사 제한적으로나마 선거제도와 제도정당정치를 활용하더라도, 만약 이 제도정치, 그리고 87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선거제도를 통한 제도정치로의 진입과 의회정당으로서의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 존립의 목표로 전락한다면, 그 역시 좌파일 수가 없다. 이를 민주화 이행 이후 흔히 좌파와 구분해 ‘진보’정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진보와 좌파를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좌파 스스로 진보와 좌파를 분리하고 구분하는 순간, 좌파는, 존재의 위기를 넘어서 부재의 시간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 좌파의 정치 전략은, 첫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진보는 좌파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는데서 출발하고, 그를 기초로 하여 계급 간 사회정치적 동맹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보수 자유주의 정치로부터 독자적인, 좌파계급정치의 시작이 될 것이다.

* <사파시평>은 사회적파업연대기금 홈페이지에도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