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87년이후 보수-자유 동거체제의 완벽한 귀결

[사파시평]노태우 국가장(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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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장의 최종 결정권자

국가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누구를 국가장으로 ’예우’할지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다. 이번 노태우 장례를 정부가 국가장으로 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최종 결정한 것이지 김부겸 총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고로 1987년 민주화이행 이후 첫 직접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자, 1980년 5.17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을 일으킨 신군부의 핵심이며,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전두환 유사 권위주의체제에서 2인자로 민정당 대선후보였고, 1997년 내란음모와 5.18 광주학살의 주동자로 징역 17년형을 받은 노태우의 국가장을 결정한 주체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자.

국가장법에 따르면 국가장 대상자는 전·현직 대통령, 대통령 당선인 혹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국가장 여부는 행안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한다. 장례위원회 위원장은 국무총리가, 장례 절차를 총괄 진행하는 집행위원장은 행안부 장관이 맡는다. 또 국가장을 주관하는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하며 장례 기간은 5일이다. 국가장 기간 중에는 조기(弔旗)를 게양한다.

이와 관련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법만 두고 보면 노 전 대통령이 17년형 선고를 받았지만 사면, 복권, 예우 박탈 등을 국가장 시행의 제한 사유로 명시하지 않아 국가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법에 대한 과잉 해석이다. 제한 사유를 명시하지 않아 국가장도 가능하다는 것은 법률이 모든 사유를 명시하지 않으니 가능하다는 확대해석이다. 하지만 국가장의 취지는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라는 포괄적 규정에서 드러나 있고, 과연 노태우가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또한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건별’로 판단할 문제다. 그렇다면 노태우는 국가장법에 따른 ‘예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왜 문재인 대통령은 노태우가 국가장법에 따른 예우를 받을 수 있다고 결정했는가. 마지막으로 노태우의 국가장 논란을 통해 우리는 민주화이행 이후 민주주의에 대해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기억해야하는가.

2. 국가장 결정 이유- 추징금 환수

가장 작은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문재인 정부는 대법원이 노태우의 내란과 뇌물죄 등을 유죄로 판결하며 부과했던 ‘추징금’을 노태우가 냈다는 점을 결정사유 중 하나로 들었다. 그렇다.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추징금을 거의 다 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낸 것이 아니다. 눈치를 보면서 전두환과 함께 시간을 끌었다. 2013년에도 여전히 노태우에게 부과된 추징금 230여억 원이 미납된 상태였다. 그리고 2013년 10월 11일이 추징금 시효가 만료되는 날이었다. 당시에는 주로 전두환이 미납한 추징금 1672억 원이 문제가 됐었다. 하지만 노태우가 미납한 230억 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됐다.

나는 당시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이자 민교협 노동위원장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징금 미납문제를 공론화하는데 나섰다. 2013년 6월 당시 검찰 등 법기관은 계속 법 집행을 미루고 있었다. 추징금시효 만료를 불과 몇 달 앞둔 상황에 대해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었고, 시간적으로 다급한 상항이었다.

나는 당장 추징금 환수를 위한 조처들로 추징금에 해당하는 시간만큼 ‘환형 유치’ 및 ‘노역형’을 부과하는 방안도 있다고 제기했다. 환형유치란 벌금 등 추징액을 내지 않는 경우 형을 금액으로 환형해 노역형을 가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운동과 ‘불법’ 집회 시위 등에 참가한 활동가들에게 국가와 법원이 자주 내리는 결정이다. 또 화이트컬러 범죄나, 정말 벌금 낼 돈이 없는 무산계급이 돈 대신 징역형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환형유치 노역형의 경우 ‘소득’에 따라 일 4백만 원까지 일당을 차별적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여하튼 나는 그때 전두환, 노태우가 내란죄 등으로 확정 판결을 받은 1997년 이후 2013년까지 15년 째 추징금을 내지 않고, 그해 말 시효가 종료되는 상황에 대해 페이스북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당시 KBS 법조기자의 기획 취재에 협조하고 KBS 뉴스를 통해 인터뷰가 나가기도 했다.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이 적극적으로 추징금 회수를 주문하고 검찰 내 TF팀이 꾸려져 전두환의 숨겨진 재산 찾기를 국내외로 진행하면서, 곧바로 가시적인 결과들이 나왔다. 추징금 시효에 따르면, 시효 전에 단 한건이라도 추징 실적을 내고 앞으로 추징할 규모를 특정하면 시효를 연장할 수 있다. 결국 국회는 전두환 등 80년 12.12 쿠데타 및 내란죄 공모자들에 대한 추징금 환수기한을 5년 연장하는 법을 입법해 전두환 재산 추징을 위한 법적 근거를 확보했다. 그리고 2016년에는 전두환은 아니지만 전두환의 차남이 일당 400만 원의 노역형으로 수감되기도 했다.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노태우 전두환 등의 추징금은 자발적으로 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제기와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보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낸 것이다. 전두환은 좀 더 얼굴이 두꺼울 뿐이었다. 노태우 추징금 완납이 ‘국가장’ 결정의 한 요소라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정확히 기록을 남겨둔다.

3. 국가장 불허는 전직대통령 예우 박탈의 최종심이다.

국가장법에 따르면 전‧현직 대통령은 분명 국가장의 일차적인 대상이다. 전‧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그들이 사망한 경우 국가장을 치른다는 것이 법 취지일 것이다. 즉 국가장법에 따른 노태우 국가장 결정은 전직 대통령의 ‘예우’차원이다. 그런데 노태우는 내란죄 등 17개의 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로 인해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상 전직 대통령 예우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 두 가지를 연결하면 답은 분명해진다. 노태우는 ‘전직 대통령’이다. 그리고 ‘국가장’은 국가가 시민에게 주는 최상의 예우이며, 노태우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가장이라는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일차적인 대상이다. 하지만 노태우는 내란죄 등으로 ‘전직대통령 예우’ 자격을 박탈당했다. 국가장이야말로 전직 대통령이 국가적으로 누리는 마지막 ‘예우’이므로, 당연히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은 국가장에서의 제외를 포함해야 최종적인 것이다. 더구나 전직 대통령을 국가장의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법률에 따르면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한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한 개인 노태우에게 국가장이라는 가장 큰 ‘국가적 예우’를 선사했다. 전직 대통령 예우로서 최상급인 국가장을 내란 수괴이자 5.18 민중학살로 대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직 대통령 예우까지 박탈당한 이에게 선사한 셈이다. 도대체 그는 국가장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장법과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간의 상호 논리적인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법 논리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에 따르면 국가장 결정을 정무적으로 판단했다고 했으니, 이제 그에 대해서 ‘정치’적인 판단만이 남았다.

  <한겨레 신문> 1996년 8월 27일자 기사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4. 논란의 시원: 노태우라는 이행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

이번 사태의 시원은 1997년 당시 대통령 김영삼과 대통령 당선자 김대중이 청와대 첫 회동에서 형기도 마치지 않았고 추징금도 미납한 상태였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 복권하기로 한데서 비롯된다. 다시 풀어서 말하면 노태우는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됐지만, 그 때 그가 12.12 군부 내 쿠데타와 5.17 쿠데타에 대해 처벌을 받고 공민권을 회복한 후에 대통령선거에 나와 당선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노태우가 1987년 헌법으로 이뤄진 ‘정초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고 해서, 그의 이전 죄가 면죄부를 받거나 사해지는 것이 아니다. 노태우가 대통령 선거에 나온 것 자체가 6.29 선언의 산물이다. 즉 스스로 6.29 선언을 하고, 다른 선거체제 하에서 다시 후보로 나온 신군부 출신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문재인 정부는 그가 ‘직선제로 뽑힌 대통령’라는 점을 국가장으로 결정한 첫 번째 이유로 들었다. 이를 통해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87년 6월 항쟁의 결과인 대통령 직선제를 얼마나 핵심적으로 생각하는지, 그들의 사고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들이 왜 앙상하기만 한 소위 ‘8개 조항’에 합의하며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6.29 선언을 그대로 추인했는지도 말이다.

사실 87년 6월 항쟁이 그랬다. 바로 엘리트 간의 협약에 기반 한 보수와 중도의 동거체제이다. 이것이 한국의 민주화 이행양식이었다. 6·10 항쟁으로 집권세력을 무너뜨린 정치혁명이지만, 동시에 ‘6·29 선언’이라는 권력 엘리트의 양보조처를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수용하면서 이뤄진 이른바 엘리트 간의 협약에 의한 이행이었다. 그래서 6월 항쟁은 학문적으로는 대중동원이지만 이행의 양식으로는 ‘엘리트의 정치협약’(DEAL)에 의한 방식으로 분류된다. 뿐만 아니라 6.29 선언은 노태우의 일방적인 작품이나 발언이 아니었다. 1987년 대선, 즉 ‘체육관에서 대의원들이 뽑는 간선제 선거’에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이자 2인자였던 노태우가 당시 대통령 전두환과 청와대에서 만나 합의해서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의 모습이었다. 6.29 선언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합의에 의해서 가능했다. 강온파 엘리트의 대립과 긴장이라고 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6.10 항쟁으로 백만이 넘는 사람이 서울 시청 앞을 채우고, 지역으로 대중 투쟁의 파고가 확산되며 바리케이트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가운데, 권력의 1인자와 2인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어떻게든 위기가 혁명으로 전화하기 전에 대통령 직선제라는 ‘거래’를 제안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김대중, 김영삼 등 자유주의 정치인들, 종로5가로 대표되는 종교-재야세력은 수용하기로 했다.

그때 군부엘리트와의 정치협약을 수용했던 이들을 계승한 현 정권이 현재 애써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분하려는 옹색함이 역사까지 왜곡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6월 항쟁의 성과가 어떻게 왜곡되고 정치엘리트간의 ‘딜’(거래)에 의한 협약으로 귀결됐는지를 축소 은폐하려는 의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분명히 6월 항쟁은 항쟁이었지만, 6.29 선언은 양 김씨와 전두환-노태우의 엘리트간 ‘딜’이었다. 그렇기에 전두환 노태우는 87년 이후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선언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1987년 12월 대선에서 신군부의 핵심이고, 전두환 정권의 2인자이자, 그들이 뽑아둔 차기 정권 대통령 후보가 곧바로 직선제 첫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돼 재집권한 사실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만큼 대통령 직선제 자체는, 그리고 한국의 이행 이후 제도정치는 허약했다. 반면 민주주의를 급진화하려는 거리 시위는 약해지기는커녕 갈수록 커져갔다. 체제의 정치적 위기는 아직 진화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노태우는 대선에 당선되면서 역사에 없는, 대통령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중간평가는 없었다. 야당과 야당의 지도자이자 정적인 김대중이 중간평가를 치르지 않는데 묵시적으로 동의해주었다.

그러므로 노태우는 대통령 자격조차 절반밖에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 결여에 대해 ‘범죄와의 전쟁’ 선포와 ‘공안정국’ 조성으로 돌파했다. 노태우 정권은 대통령 취임 1년 만인 89년 초부터 가장 먼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공안정국의 포문을 열었다. 안기부 공작과 조작사건, 고문 등을 통해 변혁운동의 정치조직들을 차례대로 궤멸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중적 노조운동의 첫 전국 조직인 전노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면서 심지어 소속 노조들의 집행부까지 모조리 구속시켰다. 그렇게 탄압이 변혁운동과 전투적 민주노조들에 집중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 경실련, 여성운동연합등 시민운동단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정부와 제도 언론은 의도적으로 이들 시민단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바로 그 시기에 1991년 5월 투쟁이 있었다.

5. 1991년 투쟁: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던 이유

1991년 투쟁은 노태우 정권을 “파쇼정권”으로 규정했고, “노동운동 탄압하는 파쇼 정권 타도”, “민중생존권 짓밟는 파쇼정권 타도”, 그리고 “민주주의 파괴하는 공안 파쇼정권 타도”를 걸었다. 하지만 노동자 민중의 대중적 진출이 매일같이 거리에서 일어나고, 학생들의 투쟁이 격렬해지는 반면, 재야 세력은 이미 선거민주주의를 인정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민주당은 1987년에도 대중의 꽁무니에서 움직이더니, 1991년에는 아예 5월 투쟁을 외면했고 심지어 비난했다. 정치적 고립 속에서, 울분에 찬 개인들의 분신들이 이어졌다. 시위 중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진압 경찰에 목숨을 잃었고, 이에 학생 박승희로부터 연쇄적인 분신 자결이 일어났다, 5월 6일 대기업연대회의를 주도하며 대공장노조들을 전노협과 결합시키려던 찰나 그 주모자들의 회합장소를 급습하여 무더기 체포한 뒤, 그중 한사람인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안기부에 끌려간 뒤 안양병원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리하여 1991년 5월 13인의 죽음이 이어졌다. 그러자 그 죽음을 조롱하는 자들이 기존의 민주화운동에서도 나타났다. 한때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김지하가 대표적이었다.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가 나서서 민주화시위에 비판을 퍼부었다. 그렇게 1991년 투쟁은 1987년을 재연하지도 못했고,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일부의 격렬 투쟁으로 매도당했다. 1987년에 함께 했던 화이트칼러 등 중산층은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간 뒤, 이제 민주주의가 된 세상인데 웬 시위냐는 싸늘한 태도를 취했다. 중산층 전문직 시민단체들은 ‘시민사회’라는 새로운 단위를 만들어 민중이라는 말을 지우기 시작했다.

이후 과거사에 대해 처벌받지 않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태우는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면서 대통령직에서 평화적으로 물러났고, 1996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권교체기 국면에 들어 내란음모 등으로 최종 유죄를 받았다. 하지만 이 결과 역시 민주당 등 자유주의 세력이 만든 성과가 아니었다. 3당 합당으로 우익 정당정치로 날아가 1993년 대통령이 된 김영삼 정부의 경제 실정과 부패 스캔들이 이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졌고, 그 과정에서 탄압에 억눌려있던 목소리들이 1991년 투쟁을 이어받아 노태우 전두환 학살자 처단,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거리로 다시 나왔다. 위기에 빠진 김영삼 정권이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고 전두환 노태우는 법정에 세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나란히 손잡고 푸른 수의를 입고 재판을 받았고 확정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바로 12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로 이 판결의 집행도 달라졌다. 김대중 당선자는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전두환 노태우 등의 사면 복권에 합의한다고 전격 결정하고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알렸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1980년 쿠데타 세력의 단죄를 끝내지 않고, 그들을 풀어줬고, 과거사를 제대로 올바르게 청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누가? 바로 민주당이. 그리고 김대중이. 근데 이제 그 정치세력의 정통을 이어받은 문재인 정권이 노태우 국가장을 결정함으로써, 신군부 주모자의 역사적 죄과를 정확히 역사에 남기는 것마저 불가능해졌다.

결국 문재인 정부가 노태우 국가장을 결정하면서 87년 헌법 하의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라는 점을 핵심 이유로 삼는 것은, 1980년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의 죄를 지우는 것일 뿐 아니라 1987년 이후 투쟁의 역사를 깡그리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스스로 자신들이 지었던 죄를 스스로 면책하고 삭제하는 것이다. 노태우가 1987년 대선에서 초대 직선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노태우가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데 대해서 묵인한 행동, 노태우가 나아가 1991년 5월 투쟁의 13명의 목숨까지 말이다.

1991년 투쟁은 노태우 정권이 6월 항쟁의 성과로 나온 첫 번째 대통령으로서 자격 없음에 문제제기했던 것이다. 노태우는 내란의 수괴이고 광주학살의 주모자였을 뿐 아니라, 직선으로 당선된 대통령으로서도 절반의 인정만 받은 ‘반쪽짜리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1987년 선거결과에 대한 부정으로서 91년 투쟁이 있었고, 13인의 항거죽음이 있었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은 그 역사조차도 부정하는 셈이다. 91년의 투쟁과 죽음은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 등 자유주의 세력의 탓도 큰데 말이다. ‘국민 통합’을 이유로 노태우 국가장을 결정했다고 하면서, 그들은 1991년 투쟁과 죽음들을 이렇게 배제해버렸다.

6. 87년 체제의 앙상한 결과: 대통령 직선제와 보수-자유 동거

이제 노태우 국가장의 유일한 근거는 결국 노태우가 87년 헌법으로 시행된 정초선거에서 당선된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역사적 아이러니는, 바로 이것이 민주당 자유주의 세력의 원죄이기도 하고 그들이 내세우는 민주주의이자, 민주화 이행의 결과라는 점이다. 그것을 자기부정 할 수 없기에, 내란이고 5.18 광주학살이고 간에 그들은 직선제 대통령제하의 첫 대통령으로서 노태우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장 결정의 배경이다. 국가장 결정으로 문재인 정권은 노태우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신원을 회복시켰다.

이것이 보수와 자유주의 세력의 공통의 정치체제다, 6월 항쟁이라는 대중항쟁 뒤로 ‘밀실타협’ 해 이룬 6.29 합의를 통해서 한국사회의 더 큰 변혁을 멈추고 이 정도의 이행으로 마무리하기로 한 것. 그렇게 해서 직선제 대통령제로 다음 정치권력을 확보할 가능성만 가지는 것. 그래서 이행 이후 35년간 서로 물어뜯고 죽일 듯이 싸우지만, 사실은 한 몸 위에 쌍생아라는 점, 적대적인 듯 하나 서로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의 근거로 삼는 두 정치 세력. 이념적으로 보수와 자유주의 세력이며, 그들 양자가 원하고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독점해온 체제가 바로 87년 체제다.

법률상 국가장 여부에 대한 결정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노태우 국가장을 결정한 것은, 바로 한국 자유주의 세력이 1987년 이전부터, 1987년, 그리고 1987년 이후 지금까지 보였던 민주주의에 대한 모호함, 정치권력을 향한 정파적 이해관계와 선거민주주의 외의 모든 민주주의에 대한 반민주적 태도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노태우 국가장의 역사적인 귀결이고, 우리가 그 자의 장례에 맞춰서 꼭 기억해야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역사이다.

하지만 노태우 국가장이 5일장으로 끝나고 대중은 곧 이 날을 잊고 말겠지만, 이 심각한 결정이 이 나라 현대사, 특히 민주화이행 이후 민주주의의 역사에 앞으로 끼칠 악영향은 분명하다. 자유주의 정권은 국가장과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양대 법률을 입법해두고서 법 논리와 판결을 무시하면서 법위의 정치를 구사했다. 그들은 자신을 유일 민주화세력으로 동격화하면서도 항상 민주주의에 대해 불철저했고, 배덕의 민주주의 정치를 해왔다. 나아가 그들은 민주를 넘어 ‘진보’를 자임하면서, 실제로는 이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진보를 향한 모든 움직임에서 진보를 가로막고 우익정치와 구태의연한 동거를 선택했다.

그 완벽한 귀결이 바로 오늘날 노태우 국가장이다.

이것이 87년 체제의 본질이고, 6월 항쟁의 남은 결과물이다. 그러니 민주당 문재인 정권이 노태우를 국가장으로 예우하는 것은 자유주의 정치의 당연한 논리적인 실천적인 귀결이다.

하지만 그 행위는 분명히 역사적으로는 역사 자체를 시궁창에 박아버리는 행위다.
  • 문경락

    평화통일을 위한 길목에 서서.............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