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체포’와 ‘감금’이 일상이 된 소성리 마을

[소성리를 쓰다⑩] 나물 뜯다가 벌금 500만 원 받은 부녀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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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항쟁 41주년을 맞은 지난 5월 18일 새벽, 경북 성주군 소성리에 1,500명의 경찰 병력이 들어왔다. 이들은 사드 기지 장비 반입 위해 주민을 고립시키고 반발하는 이들을 강제해산시켰다.

2016년 소성리에 사드 배치가 결정된 이후, 지난 5년간 주민들은 끊임없는 경찰 폭력에 시달렸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던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에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친 2020년에도 폭력과 침탈은 이어졌다. 소성리 주민들의 투쟁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주민들을 상대로 소환장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소성리 마을 주민인 시야 기록노동자는 지난해 5월부터 소성리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해오고 있다. <참세상>은 총 11회에 걸쳐 시야 기록노동자의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연재 순서

① 2021년 5월 14일 새벽, 기나긴 소성리 싸움의 시작
② 5월 18일의 침탈…소성리는 40년 전의 광주
③ 열 번째 경찰 침탈, 결국 구급차를 탔다
④ 기사 한 줄 실리지 않는 소성리의 ‘야만의 시간’
⑤ 소성리 할머니들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⑥ “경북기동대장 김광섭은 소성리를 떠나라”
⑦ 60년 일군 땅, 사드가 눈앞에서 없어지면 좋겠다
⑧ “놀면 뭐하노, 진밭에 올라가 보초나 서지”
⑨ 소성리 할머니들과 아사히비정규직 노동자들
⑩ ‘체포’와 ‘감금’이 일상이 된 소성리 마을
⑪ “문재인은 사드 못 뽑는다. 우리가 뽑는다”

  6월 18일 14차 경찰 침탈 당시 경찰청 인권위 [출처: 사드철회상황실]

지난 7월 8일 경찰청 인권위원들이 소성리로 방문했다. 당시 한 인권위원이 소성리 마을 이장님께 주민 고충이 무엇이냐 물었다. 이석주 이장님은 지금이 한창 농번기라 트럭 위에 관리기를 싣고 새벽부터 논과 밭으로 나가야 하는데, 경찰버스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마을로 들어와 좁은 마을길에 주정차를 해놓으니 트랙터나 경운기가 마을길을 다닐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경찰이 들어오는 날에는 사드반대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주민들도 일상적인 감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도 말했다.

실제로 모심기를 해야 할 5월 중순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경찰병력 1천여 명이 수십 대의 경찰버스를 끌고 마을로 들어왔다. 새벽 6시만 되면 경찰버스가 마을길을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으니, 모심기에 필요한 장비들이 마을길을 다니지 못했다. 거기다 경찰에게 계속 불심검문을 당하며 마을주민임을 밝혀야 했고, 농사일을 하러 간다는 보고까지 해야 하니 마을길 이용이 얼마나 곤욕스러웠을까. 그러니 이석주 이장님의 말처럼, 사드반대 집회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소성리마을 주민 모두가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경찰청 인권위가 무언가 해결해 줄 것이란 기대를 하긴 어려웠다. 다만 최소한 주민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금은 개선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사치였나 보다.

경찰청 인권위가 다녀간 후

7월 15일 새벽 5시 45분. 경찰은 마을회관에서 도로로 나오는 길을 주황색 질서유지선으로 그어버렸다. 그리고 도로로 나온 주민에게 불법집회를 하면 체포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이전까지는 경찰이 소성리에 들어오더라도 새벽 6시에 주민이 집회를 하고 있으면 30분 정도 후에 포위한 뒤 진압 작전에 들어갔다. 그에 비하면 한 시간이나 빨리 마을을 포위한 셈이었다. 주민들은 이날 새벽 일찍부터 경찰과 대치해야 했다.

  7월 27일 25차 경찰 침탈 당시 주민들은 경찰에 의해 감금당하고 경찰은 사드-미군기지로 들어가는 차량을 위해 길을 열어주었다. [출처: 사드철회상황실]

23번째 군경합동작전이 있던 7월 20일. 새벽 5시 30분이면 경찰버스가 들어올 시간인데, 이상하게 마을길이 평온했다. 사람들이 도로를 향해 앉아있으니, 성주경찰서 경비과장이 경찰 무리를 끌고 마을로 내려왔다. 경찰은 주황색 질서유지선을 그은 뒤, 마을회관 앞에서 하는 집회는 보장하겠지만 도로 점거는 불법이라고 떠들었다. 질서유지선을 넘어 다니는 것도 불법이라며 막았다. 새벽 6시 경, 방패를 소지한 경찰 병력이 우르르 내려와 3열로 마을회관을 차단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경찰은 6시가 되기 전부터 방송을 시작했다. 스스로 이동하지 않으면 사법처리 하겠다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체포될 수 있다고 협박도 했다. 6시 32분에 1차 해산명령을 내렸고, 약 5분 간격으로 4차 해산명령까지 내렸다. 앞에는 사드기지로 들어갈 공사인부 차량과 트럭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은 강제로 끌어내지 않고 설득하는 것이라 했지만, 사실은 도로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는 협박이었다.

  7월 21일, 주민들은 경찰 폭력과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접수했다. [출처: 사드철회상황실]

6시 48분, 5차 해산명령이 울려퍼졌다. 경비과장이 직접 집회장 안으로 들어와 체포하겠다고 협박했고, 경북기동대장도 뒤에서 확성기를 들고 체포하겠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대화경찰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계속 일어나라고 했고, 끌어내도 되겠느냐고 물었으며, 아니면 체포하겠다고 말했다. “스스로 일어나서 이동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 7시 28분, 해산 당할 때까지 두 시간 가까이 경찰에게 반복적으로 들은 언어폭력이었다.

태환 언니는 내가 체포될까봐 도저히 먼저 일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들도 온몸이 쑤시고 힘들었지만, 자신들이 먼저 나오면 연대자들이 체포될까봐 먼저 일어설 수 없었다고 했다. 맨바닥에 앉아 경찰에게 둘러싸여 시달리는 시간동안 육체적 피로 뿐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도 얼마나 그들을 괴롭혔을까. 우리는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경찰의 공무집행은 공개할 수 없는 것일까?

7월 22일은 24번째 군경합동작전이 있는 날이었다. 5시 40분 경 경찰병력이 마을길로 내려와 질서유지선을 쳤다. 도로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불법집회를 엄중히 사법처리하겠다는 경고 방송을 했다. 경찰은 1분에 한 번꼴로 경고 방송을 했고, 4분에 한번 꼴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여전히 스스로 일어나 마을회관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현장체포 및 사법처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7월 29일 26차 경찰 침탈 당시 연대자들이 다 끌려 나갈 때까지 길을 지키고 있는 소성리주민들 [출처: 사드철회상황실]

나는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경비과장의 멘트를 기록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워낙 경찰 방송과 집회 소리, 구호와 비명 소리가 섞여 가까이 가지 않고는 말소리가 담기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카메라로 찍기 시작하자 그는 초상권을 침해한다고 불쾌해 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얼굴을 집중 공략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공인이 아닌 공무원이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은 함부로 찍으며 안 되며, 만약 자신의 얼굴이 영상 화면에 나오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내게 화를 냈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 경찰공무원이 민원인들을 상대로 ‘강경한 사법처리’를 공식적으로 발언하고 있는데, 이것을 취재하고 촬영하는 것이 왜 법적 조치를 당할 일일까. 나는 경비과장이 공무집행하는 모습을 공개할 수 없다는 것으로 들려서 당혹스러웠다. 공무집행은 공식적인 것인데, 지금까지 마이크를 잡고 한 말들이 사적인 의견이었다는 말인가. 내가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무를 수행하는 이에게 질문할 권리가 없나? 또는 공무집행의 내용이나 정보를 공개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 당혹스러웠지만, 그의 공식 발언은 훗날 경찰이 미군기지 건설에 어떻게 부역하고 기여해왔는지를 증명해 줄 중요한 사료였고, 나는 이것을 집중 촬영했다.

나물 뜯으러 갔다가 벌금 500만 원 받은 부녀회장님

7월 22일은 소성리 부녀회장님의 2심 선고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부녀회장님이 사드기지 둘레길로 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철조망 길에 가로막히자, 이를 걷고 기지 안으로 들어간 사건이었다. 검찰은 건조물침입에 1건을 추가해 기소했고, 법원은 1심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2심에서 벌금 500만 원을 선고했다. 벌금 500만 원을 받은 부녀회장님은 “그냥 집행유예로 가만히 놔두지”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집행유예보다야 벌금을 받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7월 27일 25차 경찰 침탈 당시 마을주민들 [출처: 사드철회상황실]

그곳은 할머니들이 나물을 뜯으러 수시로 오르락내리락 했던 길이었다. 김천장에 장작을 내다 팔러 다녔던 길이기도 했다. 실제로 철조망 안쪽에 달구지를 끌고 다니던 길은 잘 닦여있었는데,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드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할머니들은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했다. 이제 연세가 있어 직접 사드기지 둘레길을 걷지는 못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위치를 설명하면 그 자리를 곧잘 알아맞힌다. 그곳에 어떤 나물이 자랐고, 어떤 걸 캐와서 살림에 보탰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듯 했다.

앞으로 미국의 전략무기 사드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범법자를 만들어낼까. 그 흔한 “가시나야”, “머스마야” 하는 말도 함부로 써 본적 없이 살아온 할머니들은, 팔십 평생 입 밖에 내지 않던 욕이 자꾸만 늘어간다고 한탄을 했다.
덧붙이는 말

[기록노동자 시야] 소성리사드-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성주주민이다. 노동자 편드는 글을 쓰고 싶어서 인터뷰하고 기록한다. 함께 쓴 책으로 <들꽃, 공단에 피다>와 <나, 조선소 노동자>,<회사가 사라졌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