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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전후의 라틴아메리카 정치경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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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롬비아 정부가 최근 서민들의 세금 부담을 늘리는 조세개혁안을 제출하면서 시작된 시위 장면 [출처: 위키피디아]

2019년 끝 무렵과 2020년 새해를 준비하던 시기의 라틴아메리카를 떠올려본다. 2019년 10월 대선과 총선을 치른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는 여야 교체가 이루어졌고, 선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는 정치 위기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다. 보우소나루가 이끄는 브라질은 트럼프의 미국과 오버랩됐으며, 칠레는 헌법 개정이라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멕시코부터 남미까지 페미사이드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으며, 임신중지권리에 대한 논의가 무르익고 있던 시점이었다. 33개의 국가, 15개 해외영토로 이루어진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사회적 경험의 단일한 경향을 상정하는 것에 대해 더욱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한 신중함은 분홍빛물결에 실려 한 덩어리로 움직여온 라틴아메리카를 더 세분화해 더 자세히 봐야겠다는 자각이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는 유기적인 총체처럼 보였다. 식민주의와 탈식민적 전환, 신자유주의와 반신자유주의, 제도적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급진화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정치적 역학 관계 안에서 라틴아메리카 전반의 정치 사회 운동이 연동했기 때문이다. 분홍빛물결은 단순히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좌파 정부가 연쇄적으로 집권했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이 물결 안에서 노동 및 사회 운동은 정당으로 세력화해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섰다. 분홍빛물결을 선도했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브라질의 룰라,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는 자유주의 정당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치 무대에서 제3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혁명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경유하여 집권했다. 지식인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도 원주민 운동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집권하기 어려웠다. 같은 시기 지식 담론에서는 근대성/식민성 그룹(Grupo modernidad/colonialidad)을 중심으로 탈식민주의 논의가 활발히 전개됐다. 분홍빛물결과 함께 원주민 운동이 성장했고, 새로운 사회 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리하여 라틴아메리카는 이론적 대안과 실천적 대안을 손아귀에 쥔 채 21세기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2015년 무렵부터 분홍빛물결이 서서히 퇴조하는 징후가 보였다. 분홍빛물결로 뚜렷해진 신자유주의와 반신자유주의, 좌파 정당과 우파 정당이라는 대립 구도에서 비켜난 사건들이 목격됐다. 키르츠네르를 소환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2019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당선했을 때, 이를 두고 좌파의 정권 탈환 혹은 분홍빛물결의 부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정부가 우파로 분류되는 마크리 전 대통령과 명확한 단절점을 보여준 것은 임신중지권리를 신속히 통과 시켜 아르헨티나의 녹색물결을 도운 것뿐이었다. 같은 해 브라질에서는 노동당의 잇따른 부패 스캔들 끝에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에 당선했다.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은 노동당은 우파와 함께 기득권 세력으로 치부됐다. 우고 차베스가 떠난 베네수엘라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하고, 볼리비아에서 에보 모랄레스가 물러났을 때 분홍빛물결을 뒷받침했던 사회 운동 세력과 민중이 이를 외면하던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우파의 공세와 좌파 정당의 약화라는 진단을 넘어서 분홍빛물결에 대한 반성이 요구됐다.

분홍빛물결은 노동, 농민, 원주민 운동 등 아래로부터의 권력이 정당과 대통령직이라는 상위 권력을 창출하고, 이를 해석하여 응고시키는 지식 담론까지 합세했던 거대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좌파 정당과 자신을 더 이상 동일시할 수 없게 된 민중이 다른 길을 모색하며 분홍빛물결은 퇴조하기 시작했으며,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고수하지 못했던 지식 담론도 영향력을 잃어갔다. 다른 한편,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 대부분은 반신자유주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성장과 발전이라는 목표는 수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 대신 신채굴주의를 선택했고, 미국과 거리를 두면서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우고 차베스는 중국을 여섯 차례 방문하는 기록을 남기며, 라틴아메리카와 중국의 우호 관계에 물꼬를 텄다. 분홍빛물결이 성공적인 복지 정책 등 다양한 사례들을 남겼지만, 한편에선 민중주의의 가면을 쓴 채굴 자본주의였다는 가혹한 평가도 나왔다.

2020년 2월 25일 브라질에서 코로나19 감염병의 첫 번째 확진자가 확인됐다.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급증한 3월이 지나고, 장례 시스템이 마비돼 에콰도르 과야킬의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국내까지 전해졌다. 감염병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아마존 열대우림에 거주하는 원주민의 취약함은 국제적인 우려를 낳았다. 실제로 2020년 9월까지 6개국(볼리비아, 브라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베네수엘라)의 아마존 지역 원주민 가운데 감염자가 6만 명을 넘어섰다. 1년이 지난 현재,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지역 전체 감염자는 3천만 명을 넘어섰고, 99만 명이 사망했다(2021년 5월 16일 기준).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콜롬비아 등의 확진자 수는 지금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2019년 지하철 요금 인상을 계기로 터져나온 칠레 시위 장면 [출처: 위키피디아]

감염병 확산 앞에서 지난 분홍빛물결은 마치 모래사장을 휩쓸고 빠져나간 파도처럼 강력한 힘으로 밀고 왔다가 별다른 흔적 없이 빠져나간 것 같이 보였다. 2000년부터 2019년 사이 라틴아메리카의 빈곤 인구는 45.2%에서 30.3%로 감소했으며, 지니 계수도 불평등이 감소했음을 확인해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분홍빛물결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코로나19 앞에서 그나마 지난 20년간 감소했다는 빈곤과 불평등의 민낯이 확인됐다. 인구의 30%가 처해있다는 빈곤이란, 손 씻기 30초를 위한 수도 시설이 공용이거나 부재하다는 뜻이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집에 머물면 당장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자, 온라인으로 대체되는 교육과 노동을 위해 필요한 인터넷 접속 환경과 전자 기기를 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감소했던 빈곤층은 코로나19 확산이 가져온 경제적 타격에 금방 상승세를 보였다. 2020년 멕시코에서는 2백만 명이 빈곤층으로 전락했으며, 페루에서는 1년 전보다 빈곤 인구가 10%포인트 상승했다.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의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사정으로,

수백만 명이 당장의 소득 감소로 빈곤층이 됐다. 이는 노동 시장의 변화를 보면 더욱 우려스러운데,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 전체에서 2천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보건 위기와 경제 위기가 중첩된 상황에서 각국 정부는 전문 지식과 경험의 부족으로 임기응변식 대처에 급급했다. 정부의 이러한 대처는 사회 전반적 동의를 얻기 어려웠고 결국 정부 권위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를 야기했다. 권위를 잃기로는 좌파 정부나 우파 정부나 매한가지였다.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20년 가까운 분홍빛물결 뒤에서 해결되지 않은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더욱 확실히 목격했다. 좌파 정부든 우파 정부든 상관없이 국가 기관의 한계를 깨달았으며, 그래서 또다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사회 운동으로 전환하면서 라틴아메리카 내외를 가리지 않고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경험이 낳은 일관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은 인류 역사 내내 반복된 시대적인 팬데믹이면서도 바로 지금 견뎌야 하는 개인들에게는 사적인 비극이 되고 있다. 보건과 의료 시스템의 문제이면서도 개인이 방역의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이다. 모든 나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바이러스이면서, 그에 대한 백신 접종은 불평등하다. 코로나19는 확산 중이며, 우리는 그것에 적응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상황에 대한 의미화와 평가를 유보한 채 지금을 성찰하는 한 가지 방식은, 이 과정을 거치며 각 사회는 무엇을 목격하고, 깨달으며, 계획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라틴아메리카는 분홍빛물결과 그 이후를 목격했다. 분홍빛물결에 가졌던 희망만큼이나 그것이 빠져나올 수 없었던 딜레마를 깨달았다. 그리고 또 다른 대안을 계획하고 있다. 그래서 분홍빛물결이 흩어지고 난 후, 좌파 정당이 물러난 후, 라틴아메리카 좌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좌파조차도 발전과 성장 담론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탓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환경 생태 운동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코로나19는 라틴아메리카 좌파에게도 하나의 전환이 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목격하고, 깨닫고, 계획하고 있는가.


남반구의 생태사회적 약속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대표적인 사회운동이 2020년 6월 출범한 ‘남반구의 생태사회적 약속(Pacto ecosocial del sur)’이다. 여기에는 아르헨티나의 마리스테야스 스밤파(Maristellas Svampa), 콜롬비아의 아르투로 에스코바르(Arturo Escobar), 에콰도르의 알베르토 아코스타(Alberto Acosta), 베네수엘라의 에드가르도 란데르(Edgardo Lander) 등 저명한 좌파 지식인과 정치인이 제안자로 이름을 올렸다. 라틴아메리카사회과학연구협의회 (CLACSO)도 온라인 플랫폼을 제공했다. 지식인 중심으로 제안된 이 흐름에 2021년 5월 현재 583개 단체가 가입했고, 3천 명 이상의 개인이 동참 의사를 밝혔으며,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넘어 공감을 받고 있다. 홈페이지 (pactoecosocialdelsur.com) 메인 화면에 게시된 성명서는 어느덧 에스파냐어, 포르투갈어, 영어에 이어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로도 번역됐다.

이들은 전 지구적 감염병의 시대에 드러난 사실을 적시한다. “엘리트 집단은 시장도 자본주의적 축적도 멈출 수 없다고 했지만, 결국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그 모든 것에 급제동을 거는 것이 가능했다.” 노동자의 생명이 위협당할 때는 멈출 수 없었던 자본의 축적이 코로나19의 확산 앞에서는 멈추었다. 그래서 이들은 감염병의 시대에 ‘비정상’이라고 불렸던 것에서 체제 전환의 가능성을 엿본다. 그리고 감염병의 시대를 통해 ‘정상’이라고 불렸던 시기에는 보이지 않았던 비정상을 드러낸다. “위기는 팬데믹으로 발가벗겨졌다. 팬데믹은 불평등에 숨을 불어넣었고, 우리의 미래가 위태롭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격리되고, 누군가는 감염, 억압, 굶주림과 싸운다.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주민은 또다시 인종말살의 새로운 물결 앞에 놓여있다. 가부장적 폭력과 인종차별적 폭력과 여성살해가 증가했다. 그동안 옛 권력 집단과 새로 등장한 권력층은 ‘일상의 회복’, ‘뉴노멀’을 틈타 위기를 이용한다.” 오히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좌파는 과거의 대안이 지금의 현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예전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사상 혹은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진 사상이 세계적 차원에서 핵심적인 아젠다가 되었다.” 보편적 기본소득이 보편적인 논의가 되었고, 부자증세가 현실적으로 필요해졌다. 무엇보다 사회 정의와 환경 정의를 연결할 전 지구적 생태사회적 협약을 위한 싸움이 본격화됐다.

500여 개의 단체, 3천 명의 개인이 가담한 ‘남반구의 생태사회적 약속’은 라틴아메리카를 위한 사회적, 생태적, 경제적, 간문화적 약속을 제안한다. 이것은 “각 정부를 향한 요구사항의 리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집단적 상상을 만들어가자는 초대이며, 새로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투쟁의 플랫폼을 위한 기반과 변화에 대한 합의된 방향을 정하자는 초대이다.” 사회 운동 세력, 지역조직, 조합, 풀뿌리 조직, 지역 공동체, 온라인 단체들을 향한 호소이기도 하지만 대안적인 지역 정부, 의회, 법관, 관료를 향한 호소이며 권력 관계의 변화를 위한 호소이다. 이들은 재분배의 정의, 젠더의 정의, 윤리적 정의, 환경적 정의를 모색한다. 구체적으로 조세 개혁, 국가의 외채탕감, 국가가 책임지는 돌봄, 보편적 기본소득, 식량 주권, 탈채굴주의, 기업이 아닌 사회가 중심에 있는 정보와 의사소통, 지역의 자치권과 지속가능성, 현재의 달러 독점 체제에서 벗어나 다차원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할 새로운 화폐에 대해 상상한다.

[참고자료]

https://www.cepal.org/sites/default/files/publication/files/46543/S2000817_es.pdf
https://www.ilo.org/wcmsp5/groups/public/---americas/---ro-lima/documents/publication/wcms_764630.pdf
https://pactoecosocialdelsur.com/
  • 문경락

    벌판의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그리 깊지 않은 뿌리탓으로 속히 고위관리들의 도덕성의 재무장과 민중의 믿음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