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해고

[워커스 사전]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왜 노동자들은 해고를 당하는가?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는 일을 잘하지 못했거나, 업무에 필요한 능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아니면 친화력이 부족해서 사회생활을 잘하지 못했거나, 동료들과 갈등을 빚었거나, 아니면 회사의 방침을 따르지 않고 고용주의 지시를 어겼을 수도 있다. 노동조합을 만들었거나, 내부 문제를 외부로 알려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켰을 수도 있다. 과연 이 모든 것은 해고의 사유가 되는가? 아니다. 그런데도 노동자의 해고 사유는 늘 그의 사적인 문제로 돌려진다. 노동자 해고는 ‘집단해고’나 ‘대량해고’ 정도는 돼야, 노동자 개인의 능력과 인격과 품성의 문제로 취급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회사는 노동자를 해고하는가? 동일한 해고 사건이라도 기업의 입장에서 해고 사건을 생각할 때는 사장의 능력, 인격, 품성, 행위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다. 대신 사람들은 생각한다. 저 회사에 어떤 문제가 있었나? 경영상의 어려움이 있었는가, 재정난이 심했는가,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있었는가, 관련 업계의 상황은 어떤가, 임금은 어떤가, 노동자 수가 너무 많지는 않은가? 해고당한 노동자에게 개인적인 추궁이 들어올 때, 기업의 해고에 대한 여론의 추적은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원인을 향한다. 업계 동향, 세계 경제 질서의 변화, 산업계 구조 변동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불가피한 ‘환경 변화’로 설명된다.

하비 콕스는 《신이 된 시장》에서 신학이 된 경제학을 비판한다.1 자본주의 경제학의 법칙들은 인간이 만든 시장 질서를 마치 원천적으로 주어진 자연의 질서처럼 간주한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정치적 경합과 사회구성원의 의지와 결정이 끊임없이 반영되는 시장의 변화를 마치 자연환경의 변화처럼 신적 질서로 설명한다. 자연환경의 변화조차 정치적 결과와 무관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학이 교리에서 벗어난 외부인을 이단자로 만들었던 것처럼, ‘신이 된 시장’에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질서를 벗어난 경제와 사회가 야만적 상태 또는 후진적 경제로 정의된다. 그것을 꿈꾸는 이들도 ‘야만인’, ‘광인’, ‘이단자’로 취급받는다. 신이 만든 자본주의 기계를 돌리는 자들에게 ‘해고’란 그 기계를 계속 잘 돌리기 위해 고장 난 부분이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기업의 해고는 혁신의 결단이 되기도 한다. 4차 산업혁명이나 스마트 경제, 플랫폼 경제 등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해고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동시에, 시장 변화에 선도적으로 대처하는 기업의 혁신으로 설명된다. 과거에도 해고는 일어났지만 그게 기업이나 사장의 입장에서도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기업이 노동자 해고에 떳떳할 뿐 아니라 큰소리까지 칠 수 있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이 해고를 ‘유연화’란 개념으로 재정의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세계화’를 통해 도입된 노동 유연화 정책으로 전에 없던 해고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만 해도, 기업체 대표들은 경영상의 책임을 통감하며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임직원 여러분께’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 그것은 노동자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당시 경영주들의 가부장제적 가족주의와 족벌주의 의식 때문이었다.

그래서 ‘옛날의 사장님들’은 자신들은 원하지 않지만, 세계 시장과 외국 기업의 압력에 굴복해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라고, 마치 전쟁에서 패배해 병사와 백성을 내놓는 장수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기업의 ‘해고 신화’는 그때의 패배 서사와는 정반대인 승리를 위한 전략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학자, 관료, 전문가 등 이 신화를 만드는 시장의 교부(敎父)들은 해고를 ‘섭리’에 대한 순응으로 만들었다. 경제 환경이 자연환경처럼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하는 질서가 되면, 환경변화에 따른 해고도 일종의 ‘섭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들이 만든 ‘해고라는 사상’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어떤 토론회에서 ‘기업을 차별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경제학자를 본 적이 있다. 그는 노동자를 향해 기업도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고, 사회적 논의에 참여해야 할 주체인데, 기업을 적대적으로 보고 비판만 하면 기업의 입장에서 함께 할 생각이 들겠냐고 말했다. 노사 간 관계에서 파트너십의 중요성을 말하며 노동자에게 양보와 타협, 대화와 토론을 강조하는 이런 사람들은 아마도 대학 강단에 무수히 많을 것이다. 학생들은 이런 합리와 중도의 사도들에 의해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세례’를 흠뻑 받고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노동자가 돼 사회로 나온다. 그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해고할 수밖에 없는’ 기업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합리적 이성을 가진 노예 상태가 돼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에게 사측과 ‘파트너 관계’를 가지라고 충고했던 그 사람은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사장이 노동자를 해고할 수는 있어도, 노동자가 사장을 해고할 수 없다는 사실, 이사회가 매각·폐업·구조조정을 결정할 수는 있어도 노동자가 경영진이나 이사회의 교체, 해체, 구조조정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 회사가 노동자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손배소)을 할 수는 있어도, 노동자가 회사에 손배소를 하기는 어렵다는 사실, 이 명백한 ‘권력 관계’의 진실을 그는 외면하고 있다. ‘이해관계’라는 말로 ‘권력 관계’를 대체하는 것은 오늘날 경제학의 지배를 받는 거의 모든 사회과학 분과에서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다. 시장주의 신학의 사도들의 집회인 다보스포럼이 2020년 의제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제출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노사갈등’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양자가 가진 권력의 압도적 차이와 지배 관계를 은폐며 마치 노동자와 회사가 대등한 관계인 것처럼 현실을 왜곡한다. ‘일개 노동자’와 ‘일개 회사’가 똑같은 ‘일개’, 하나의 주체일 수 있는가? 오늘날 거대 조직과 자본의 네트워크 집합체인 대기업은 ‘일개 국가’와 맞먹는다. 노동과 자본, 노동자와 기업 간의 압도적인 힘의 격차는 국가 정책 수립 등 국가에 대한 교섭력에서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 힘들의 관계는, 정치적 무중력 상태에서 발생하는 각자 이해관계의 충돌과 조정의 집합적 결과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며, 그 정치력이 ‘해고’를 둘러싼 법률과 제도에도 반영되는 것이다. 상시 해고, 쉬운 해고, 유연한 해고의 제도적 확대가 가능했다면, 해고 금지나 어려운 해고도 제도적으로 강화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사회의 지배층은 모두 해고의 일상화를 무슨 엔트로피 법칙처럼 여기고 있다. 그들은 ‘해고 금지’는 말도 안 된다며 단칼에 잘라버리고 ‘해고 금지’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은 해를 서쪽에서 뜨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떼쟁이’라고 비난한다.

해고 금지가 과도한 요구인가? 아니다. 해고 금지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지금도 법률로써 명시하고 있는 규정이다. 노동관계법에는 여러 가지 해고 금지 규정이 있다. 예를 들어,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사업장을 신고한 노동자에 대해, 사용자는 그것을 사유로 해고할 수 없다. (근로기준법 제104조 제2항) ‘남녀고용평등과일가정양립지원에관한법률’은, 성별을 이유로, 육아휴직을 이유로, 배우자 출산휴가를 이유로, 육아나 돌봄을 위한 근로시간 단축을 이유로 해고하는 것을 ‘금지’한다. 노동조합 활동이나 부당해고 신고를 이유로 해고하는 것도 당연히 ‘금지’다.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제81조 제1항) 그 외에 장애인, 연령 등을 사유로 한 해고 금지 등도 이미 법에 규정된 해고 금지 조항들이다. 물론 법이 그렇다고 해도 고용주는 그 외의 사유 등으로 법을 회피하는 여러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자본은 이 제한적인 해고 금지 조항들도 더 최소화하거나 무력화하려고 하고, 반대로 노동자들은 해고 금지 사유를 더 확대하려고 한다. 이것은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중요한 사상적 실천적 투쟁이다.

그래서 노동과 자본의 정치적 세력 관계에 따라 각 국가와 사회가 해고에 개입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코로나19 사태만 보더라도, 프랑스, 독일, 덴마크는 해고 금지로 대처했지만, 미국은 실업수당 보조로 대처했다. 전자가 고용 유지를 강제했다면, 후자는 기업의 해고를 용인하는 대신 실업자 정책으로 대응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해고 시 사회안전망을 시장적으로 대체하는 ‘페이데이 론’ 같은 임금 담보 대출 금융상품이 성행한다. 반면 좌파 정치의 경험과 전통이 있는 나라에서는 이자를 중단시킨다. 한국 정부는 어떻게 했나? 해고 금지 강제 없이 기업에 고용유지지원금을 주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는 기업의 경영권에 속하는 부분이고 당사자 간 계약이므로 정부가 강제할 수는 없다고 한다. 한국보다 훨씬 더 일찍 자본주의화 된 나라들의 해고 금지 명령은 어째서 가능한가? 신자유주의화 됐어도, 전후 서구에서 이루어진 노동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쇠락했어도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만이 아니다. 삼성 브라질 공장에서 실시간으로 목표량과 생산현황을 표시하는 전광판을 없애고, 장시간 노동과 노동 강도, 관리자의 욕설과 인권 탄압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노동법과 노동조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도 2017년 노동법이 개악됐지만, 개악된 노동법도 한국의 노동법보다는 친노동적이라는 평가다.2 노동검찰과 노동법원 제도가 있는 브라질에서는 코로나 이후 해고가 늘어나면서 노동소송이 급증했다. 브라질 정부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정부가 노동자의 임금손실분을 보충해주는 방식으로 고용유지 지원정책을 수립했지만, 지원을 받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지원 조치가 끝난 이후에도 12개월까지 해고를 금지했다.

왜 이것이 한국에서는 불가능한가? 비상사태라 ‘영업 중지’ 명령을 내리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해고 금지’ 명령도 비상하게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해고야말로 노동자에게 가장 비상한 사태가 아닌가. 미국에서 도입된 ‘필수노동자 법’의 애초 취지는 필수노동자의 고용유지와 보호보다는 ‘노동 유지’를 위한 행정명령이었다. 노동유지 명령이 가능하다면, 해고 금지 명령은 왜 불가능한가? 재난 시의 해고는 불가피한 것도 불가항력적인 것도 아니다. 불이 나거나 홍수가 났다고 노동자를 해고하는가? 팬데믹도 마찬가지고, 기후 위기도 마찬가지다. 해고를 정당화하는 사유가 될 수 없다. 재난이나 기후변화에 따른 산업 전환이 필요하다면, 노동 전환 설계도 함께 논의돼야 마땅하다. 일단 해고하고 나중에 구제하는 대책이 아니라, 고용을 유지하는 전환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노동자들이 함께 참여해 결정해야 한다. 국가적 차원만이 아니라 회사 안에서도 해고에 대한 ‘쌍방의 합의와 조정 과정’을 보장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누가’ 결정하는가? 이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물음이라면,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해고 결정에서도 ‘그 결정은 민주적인가?’라는 정치적 물음을 던져야 한다. ‘민주적’이란 것은 절차적 정당성이 아니라 결정할 권력을 ‘누가’ 가질 것인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해고 금지 투쟁은 ‘우리를 고용해서 계속 착취해 달라’고 요구하는 투쟁이 아니다. 자본의 해고 권력을 분쇄하고 약화하기 위한 것이다. 해고할 힘은 복종시키는 힘의 원천이다. 해고의 권력은 생살여탈권이다. 해고의 주체는 총체적으로는 자본이고, 현실적으로는 고용주이며, 구체적으로는 내 위의 임면권자이다. 해고는 사용자만이 고용 관계를 해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해고할 힘이 복종시킬 수 있는 사용자의 권력을 구성하는 것이다. 언제 당할지 모르는 해고는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의 말과 행동을 위축시키며, 천천히 중독되는 독가스처럼 노동자를 자본이 만든 ‘해고’라는 사상에 중독시키고 행동을 통제한다. 회사에서는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복종의 미덕’을 익히고, 회사 밖에 나와서는 불의와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민주 시민’이 될 수 있는가? 노동시장 유연화와 그에 따른 불안정화 전략은 자본에 막강한 해고권을 준 것이고, 노동자들에겐 거부할 힘과 단결할 힘을 빼앗은 것이다. 그러므로 해고 금지 요구는, 해고할 수 있는 자와 해고당할 수밖에 없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권력 관계와 불평등성을 드러내며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한 정치적 투쟁이다.

해고 투쟁을 하는 노동자를 향해 왜 임노동의 족쇄를 스스로 차려고 하느냐는 관념적 반자본주의 논자들과 ‘해고 금지’를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노동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유주의적 동정론은 바로 그 점을 놓치고 있다. 해고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쟁취하는 투쟁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에 고용을 요구하는 투쟁이 아니라, 시장이 신이 아님을 폭로하는 투쟁이며, 해고당하지 않을 권리를 획득하는 투쟁이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일터에서 자기 권리를 찾고 작업장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일터에서 싸워본 노동자의 경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함께 싸운 기억은 되살아나는 힘을 가졌다. 자본주의 기획자들이 서사를 바꾸는 것은 그 힘이 두렵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을 옳다고 믿는 그 힘이. 이제 그들이 만든 해고의 서사를 바꿔보자. 우리는 노동자들이 사장을 해고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고.

[각주]
1. 하비 콕스, 유강은 옮김, 『신이 된 시장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문예출판사, 2018.
2. ‘근무여건 개선 이룬 브라질 삼성…강한 노동법·노조 있었다,’ <한겨레신문>, 2019.07.02
  • 문경락

    서구만이 아니다. 삼성 브라질 공장에서 실시간으로 목표량과 생산현황을 표시하는 전광판을 없애고, 장시간 노동과 노동 강도, 관리자의 욕설과 인권 탄압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노동법과 노동조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도 2017년 노동법이 개악됐지만, 개악된 노동법도 한국의 노동법보다는 친노동적이라는 평가다.2 노동검찰과 노동법원 제도가 있는 브라질에서는 코로나 이후 해고가 늘어나면서 노동소송이 급증했다. 브라질 정부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정부가 노동자의 임금손실분을 보충해주는 방식으로 고용유지 지원정책을 수립했지만, 지원을 받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지원 조치가 끝난 이후에도 12개월까지 해고를 금지했다.

  • 걸개의 전성시대

    요즘 갑자기 경제지표가 좋아졌네요. 그런데 왜 80년대나 90년대의 선거철이 생각납니까. 그때 정부 여당은 갑자기 경제지표를 조작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합니다. 요즘 나아지고 있다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지표는 진실일까요. 사기일까요. 브라질은 하루 3600명의 사망자가 나온다고 합니다. 요즘 세계 경제지표도 좋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선거 끝나고 뉴스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까요.

  • 걸개의 전성시대

    사냥개 쇠끼. 내가 나중에 니 철창신세 지게 하나 못하나 두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