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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상담사 85%, 우울증위험군…고객이 소송해도 원청은 뒷짐만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 직접고용으로 노동자 건강과 안전 보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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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건강보험공단 서울고객센터에서 6년째 일하고 있는 안경애(52) 씨는 지난해 고객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고지서 금액과 관련한 상담을 이어가던 중 고객은 상담에 불만을 표시했고, 기어코 안 씨에게 “당신 싸가지가 없네”라는 말을 내뱉었다. 안 씨는 이러한 폭언에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ARS를 송출했고, 고객은 이에 더욱 흥분해 “야, 대답해. 미친 거 아니야”라는 말을 해 안 씨는 위 ARS를 2차로 송출하고 전화가 종료됐다.

안 씨는 매뉴얼대로 업무를 하는 도중 소송을 당했으나 사측으로부터의 지원은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팀장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안경애 씨가 유명해졌고, 주시하고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며 오히려 안 씨 탓을 했다. 원청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안 씨는 “고객이 경찰에 고소한 초기 단계에서 공단이 잘 대응했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 일이 이렇게 큰일이 됐다”라며 “53년 동안 살아오면서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부터 충격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안 씨뿐 아니라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고객 폭언과 노동 감시 등으로 매우 고통받고 있었다. 8일 오전 공공운수노조는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노동자 노동건강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많은 상담사들이 정밀 진단이 필요할 정도의 우울증을 경험하고 있고, 10명 중 9명은 고객 응대, 조직 감시 등에 있어 감정 노동의 강도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공공운수노조는 직접고용을 통해 작업환경을 질을 개선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지난 1일 파업에 돌입해 현재까지 파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상담사 85%, 우울증 위험군…일반 노동자들에 비해 매우 심각

이날 발표된 실태조사는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을 상대로 감정노동, 직무소진, 근골격계질환 등 전반적인 노동안전보건실태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 1,600명 중 조합원 978명에게 온라인 설문지를 배포해 수거했고, 이 중 796명이 응답(응답률 81.4%)했다. 조사 기간은 8월 26일부터 31일까지로 총 6일간 진행됐다.

이번 조사를 진행한 전지인 건강한 노동세상 활동가는 “지금껏 조사했던 어떤 사업장의 노동 조건보다 열악했다”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 상담사들의 파업은 언제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실태조사에 따르면 상담사들의 우울증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우울증 평가 척도인 PHQ-2는 총점 6점 중 2점 이상이면 우울증 위험군에 속하는데 상담사 중 85%가 우울증 위험군으로 일반 노동자들에 비해 매우 심각한 수준을 보였다.

상담사들은 고객, 관리자, 동료, 공단 직원으로부터 무리한 요구, 인격무시 발언, 욕설, 성희롱 등의 업무상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 무리한 요구 경험에 대해 설문한 결과, 고객으로부터 이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답변이 93%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뒤를 이어 공단직원(29.4%), 관리자(22.6%) 순이었다. 인격무시 발언에 대해서는 고객으로부터 87.2%, 공단직원으로부터 53.9%로 높게 조사되었고, 욕설 경험도 고객으로부터 81%로 높게 나타났으며, 성희롱의 경험도 고객으로부터 14.4%(115명)가 있다고 응답했다.

전지인 건강한 노동세상 활동가는 “공단직원에 의한 직장 내 괴롭힘도 있었다. 5명 중 1명이 공단직원으로부터 무리한 요구를 듣고, 2명 중 1명이 공단직원으로부터 인격무시 발언을 들은 것으로 조사됐지만 건강보험공단이나 위탁업체 차원의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보호조치나 직무 스트레스에 대한 예방조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전 활동가는 “건강보험 고객센터 감정노동 위험군에 속해 있는 집단에서 직무의 소진 정도가 매우 높게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우울증, 피로도, 사회심리적 스트레스가 유의하게 높아 감정노동 위험군에 대한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라며 “매뉴얼과 관련 교육도 중요하지만 이미 나타나고 있는 건강장해에 대한 진단과 관리 또한 시급하다. 감정노동에 따른 우울증, 직무소진과 직무스트레스에 대한 전수조사와 질환자들에 대한 치료 및 상담을 지원하고, 공식적인 보호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업무 강도 역시 높았다. 조사 결과 1일 평균 콜수는 120콜 미만이 36%로 가장 많았고, 140콜 미만이 29.6%, 140콜 이상이 10%로 나타났다. 콜 처리 건수는 업무 평가의 중요한 기준으로, 임금과 직접 연결이 되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제외한 1일 평균 휴게시간은 30분 미만이 90% 이상이었고, 10분 미만도 33.7%나 됐다. 상담사 직무스트레스 관리 지침(H-31-2011)에서 1시간마다 5분의 휴식 또는 2시간마다 15분의 휴식을 권장하지만 업체의 상시적인 모니터링과 녹화감시 때문에 필요할 때 충분히 쉴 수 있는 휴식시간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설문 응답자 99.4%가 적어도 한 부위 이상의 신체에서 근골격계질환과 관련한 자각증상과 통증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많은 통증을 호소한 부위는 ‘어깨’로, 정밀한 근골격계 유해요인조사와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한 작업환경 개선이 시급한 과제로 요구됐다.

"하청 구조 속에서 상담사들 무한 경쟁에 내몰려…몸과 마음 병드는 구조"

이날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지부 김하나(36) 조합원도 안경애 씨와 함께 현장 증언에 나섰다. 2017년에 입사한 김 씨는 “입사 후 목과 어깨가 아프고 손목이 시큰거리고 눈이 많이 피로하다고 느꼈지만 무엇보다 3개월 조금 지난 무렵부터는 시작된 극심한 복통으로 매일 진통제로 견뎠다. 원인을 찾기 위해 과목을 가리지 않고 열 군데 넘는 병원을 찾았으나 ‘특별한 이상은 없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 아니냐’라는 말만 들었다”라고 했다.

김 씨는 이어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면 무조건 1초 안에 받아야 하고, 한 콜이 끝나면 그 고객과 어떤 상담을 나눴는지 간단히 내용을 남겨야 한다. 지사로 업무를 요청해야 하는 건들은 이관까지 15초 이내에 끝내고 다음 콜을 받아야 한다. 민간위탁업체에 속한 모든 상담사들이 무한 경쟁하는 구조 속에서 몸과 마음이 점점 병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씨는 “저는 본연의 업무인 상담을 하면서도 늘 긴장하고 조급해하며 자신감 없이 작아지고 있다. 민간위탁업체로 운영되는 건강보험 고객센터는 양질의 상담을 하기 어려운 구조임이 틀림없다. 고객센터 직영화로 건강보험공단이 공공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상담사들의 건강에 대해서도 돌아봐 주길 바란다”라고 촉구했다.

김 씨의 말대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은 11개 민간위탁업체에 콜센터 업무를 맡기고 있다. 민간위탁업체들은 2년마다 공단과 도급계약을 체결하며 무리한 성과 경쟁을 벌이고 있고, 이는 상담사들을 쥐어짜는 행태로 나타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이 주관하는 2020년 한국 산업의 서비스 품질지수(KSQI) 콜센터 부문 조사에서 10년 연속 공공기관 우수 콜센터로 선정되는 등 우수한 실적을 쌓고 있지만, 이날 발표된 조사처럼 우울증과 각종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날 이태의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여는 발언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당장 11개 민간위탁업체 상담사에 대한 정규직 전환을 위한 전환협의회 열어야 한다”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위험과 괴롭힘이 떠넘겨진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에게 보다 더 건강하고 유익한 상담을 할 수 있다. 상담사들이 안전해야, 국민이 안전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