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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정규직에서, 석회석 광산 하청 노동자까지

[특별기획: 검은 땅을 먹고 살았다] 전직 광부, 삼표시멘트 노동자 박호기(56)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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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장에서는 1년간 3명이 죽고 14명이 다쳤다. A는 차에 치여 죽었고, B는 컨베이어벨트에 머리가 끼어 죽었으며, C는 7m 아래 100도가 넘는 통에 떨어져 죽었다. D는 컨베이어벨트에 손가락이 절단됐고, E는 컨베이어벨트에 팔이 끼였으며, F는 용접 도중 추락했고, G는 점검로에서 미끄러졌다. H는 120dB 이상의 소음에 시달리다 난청을 얻었고, I는 석회가루와 각종 먼지를 마시다가 진폐에 걸렸으며, J는 컨베이어벨트에서 사망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뒤 정신 장애를 얻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500m 떨어진 마을 주민들은 공장에서 날아오는 석회 분진에 창문을 열지 못했고, 매일 방을 쓸고 닦았으며, 기침을 달고 살다가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얻었다. 그래도 공장은 잘만 돌아갔다. 얼마나 잘 돌아갔는지, 강원도에서 미세먼지 다량배출사업장 1위라는 영예까지 안았다.

[특별기획4] 삼표시멘트 공장: 인간이 만든 죽음과 재해

1) 탄광 정규직에서, 석회석 광산 하청노동자까지
2) 5월 13일 밤, 동료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3) 삼표시멘트의 공해 책임은 ‘0원’이었다



대한석탄공사에서 17년 정도 일했습니다. 1986년에 군대를 제대하고 들어간 첫 직장이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입사 경쟁률이 치열했어요. 100명 모집한다고 하면 3~400명 정도 와서 많이들 떨어졌죠. 그런데 오래 버티는 사람이 없어서 회사에선 많이 뽑았어요.

입사 후 첫 1년은 도계광업소에서, 그다음은 장성광업소에서 쭉 일했습니다. 5년만 바짝 벌어서 나가자고 한 게 길어졌어요. 예전에 석공에 다닌다고 하면 대구 경북 쪽에서 딸들을 데리고 가라고 했어요. 석공에서 매달 쌀을 배급했거든요. 월급도 적지는 않았죠. 입사하고 임시직이었을 때 받은 첫 기본급이 11만 원이었어요. 정규직이 되고는 공무원보다도 임금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노태우가 대선 후보였을 때, 공약으로 월급 2배 인상을 약속했어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한 거짓말이었지만, 그 시기부터 전 산업에서 월급이 전체적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막장을 떠받치는 나무 지지대인 동발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어요.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까 봐 막장에 들어간다는 얘기도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입사 초기에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했습니다. 선산부(기능공)랑 사인이 잘 안 맞아서 생긴 사고였어요. 탄차에 핀을 꽂아 연결하라는 지시를 받고 일하고 있었는데 선산부가 탄 실어놓은 것을 확 젖히는 바람에 제 손을 내려친 거예요. 순식간이었죠. 장갑을 벗어보니까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가 사라졌더라고요. 피는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지만, 손가락은 절단돼 있었습니다.

초기에 직접 사고를 당하고, 크고 작은 사고들을 목격하니 조심스러워지더군요. 탄광에 금기가 많은데 그런 것들을 믿게 됐죠. 예전에 광산 지역에선 남자들이 출근할 때 여자들이 그 앞으로 지나다니지 못했어요. 출근하는 남자를 가로지르면 사고가 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대합실에서도 버스가 오면 여자들은 늦게 나와야 해요. 만약에 여자가 더 빨리 지나가면 남자들이 욕을 했어요. 그리고 재수가 없다며 출근을 안 해버렸습니다.

갱내에도 그런 금기가 있었어요. 쥐는 절대 잡지 않는다는. 대형 사고가 터지기 전에 쥐들이 가장 먼저 알거든요. 쥐가 무더기로 지나가면 사고 징조가 있는 거라고 다들 조심했어요. 갱내에서는 벼룩이나 나방 같은 다른 생물들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손가락을 다치고 8개월 정도 치료를 받다가 장성광업소로 옮겼습니다. 장성에서도 처음엔 동발 설치를 했는데, 나중에 기계과로 부서를 옮겼어요. 퇴직할 때까지 제2수갱에서 기계로 채집한 탄을 실어 올리는 작업을 했어요. 이 작업은 큰 산재가 나지 않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에 석공을 퇴사했습니다. 1999년 즈음 퇴직금 누진제가 없어진 탓이 컸죠. 석공 노동자들의 낙은 퇴직금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게 사라진 겁니다. 마침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받는다기에 신청했습니다. 그때 저는 외곽에서 이래저래 노조활동을 돕고 있었는데 노조가 크게 위축돼 있었어요. 여러모로 수세에 몰린 기분이 들기도 했죠.


예전엔 석공에선 노조의 힘이 강했어요. 조합원들이 작업 현장의 어려운 점을 노조 대의원들에게 가서 이야기하면, 대의원들이 노조 중앙에 전달합니다. 그러면 지부장들이 조합원 건의 사항을 토대로 대책을 마련해 회사에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예전엔 노조 지부장 힘이 막강해서, 관리 직원들도 꼼짝도 못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지부장들이 찍소리를 못하는 것 같더군요. 석탄공사를 퇴직하고 나선 기계과 경험을 살려서 화물차도 몰고, 이삿짐차도 운전하고, 건설 현장에도 갔어요. 여러 일을 전전한 거죠. 그러다 2013년에 동양시멘트 사내하청업체 ‘대호설비기계’란 곳에 입사 했습니다. 이력서를 넣긴 넣었는데 그때 제 나이가 마흔아홉, 너무 많은 나이라 안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석공에 다닌 경험이 있으니 와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작업 환경도, 작업 체계도 모든 것이 엉망인 현장이었습니다. 여러 업체와 부대껴 일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45광구 쪽 일을 하고 있었는데 ‘동일’이라는 하청업체 사람들과는 만나기만 하면 싸웠어요. 하청업체 중에는 동일이 주로 일을 맡아서 했어요. 그 사람들은 우리가 일도 마음대로 못할 만큼 항상 지시를 했습니다. 그럴 거면 동양시멘트 모든 라인을 동일로 채우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결국, 2015년에 대호기계는 동일에 합병됐습니다.

석공 다닐 때 비하면 시멘트 광산은 아오지 탄광이죠. 너무 열악했어요. 비가 오고 추워도 쉴 데가 없었습니다. 귀마개 하나 끼고 계속 시끄러운 나대지에 있어야 했어요. 동일로 합병되고는 46광구 일을 했었는데 그때 대기실 하나 만들어달라고 계속 항의했어요. 결국 회사가 컨테이너 하나 던져두고 가더군요. 제가 지게차로 운전해서 알맞은 자리에 놓아두니까 동양시멘트 직원들도 잘 쓰던데요. 그런데 정작 하청 노동자들은 대기실 사용조차 눈치를 봤어요. 노는 것처럼 보일까 봐요.


그 시기, 동양그룹에 금융사건이 터졌고, 회사가 휘청거리며 다른 회사로 넘어간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하청노동자들로서는 회사가 바뀌면 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래서 동양시멘트 사내하청업체 동일, 두성에서 2014년에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2015년 2월에는 노동부에서 하청노동자와 동양시멘트 간에 묵시적 근로관계가 인정된다는 판단을 내렸어요. 우리 하청노동자들이 원래는 입사 때부터 정규직이래요. 그런데 이 판단이 나오자마자 회사가 노조를 결성한 하청노동자 101명을 전부 해고해버렸습니다. 노동자들이 서울까지 상경해 31개월을 싸워서 결국 회사를 이겼지요.

삼표시멘트 정규직이 되니 일단 월급부터 차이가 큽니다. 하청에 다닐 땐 연봉이 3천만 원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임금피크제로 30% 깎였는데도 연봉이 5천만 원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정당하게 우리의 권리를 찾은 것이 가장 뿌듯하죠. 노조 만들어 해고당했을 땐 울화가 치밀어서 첫째 아들 결혼식에도 못 갔어요. 곧 둘째 아들이 결혼하는데 이번엔 가야죠. 아쉬운 점은, 우리의 싸움이 더 큰 하청 노동자들의 싸움으로 번질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정규직이 되려면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하청노동자들은 지금 일자리마저 잘못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요. 아니면 우리 같이 질긴 싸움에 내몰려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지금 바라는 것은 우리 노조에 힘을 모으는 겁니다. 다른 노조 조합원들은 우리 노조의 싸움이 회사에 불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청노동자 문제를 알리는 것, 산재를 드러내는 것조차 소극적이에요. 하지만 우리의 현장은 늘 위험하고, 하청노동자의 일자리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불안정한 노동현장에 대응하고 이를 바꿔낼 수 있는 노조가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