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언론이 ‘금속기둥’에 미쳤던 순간에

[1단 기사로 본 세상] ‘실업급여’를 회사가 준다니… 문 닫은 학원과 과외 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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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4.13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 서울 등 대도시 주요 거리에 ‘선영아 사랑해’라는 플래카드가 일제히 나붙었다. 선관위는 선거를 앞둔 특정 후보 홍보 또는 음해인지 촉각을 곤두세웠고, 선영이란 이름의 여성에겐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궁금증을 자아냈던 이 플래카드는 여성 포털사이트 ‘마이클럽’이 오픈을 맞아 벌인 티저광고였다. 많은 사람이 허탈해 했다. 마이클럽은 50억 원을 쓴 옥외광고로 800억 원 이상의 광고효과를 봤다. 덕분에 설립 넉 달 만에 회원 수 300만 명을 돌파하며 여성 인터넷 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사이트 자체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자본주의는 돈만 되면 뭐든 한다. KT도 2009년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이름으로 티저광고를 선보였다. 자극적 상업주의가 만든 광고 산업은 더 나쁜 제품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물론 제품 가격에 광고비도 들어간다. 당시 언론은 아무 생각 없이 이를 소개하며 기업 광고에 흥을 북돋았다.

  매일경제 12월 5일 9면.

언론은 지난달부터 미국 유타주와 루마니아를 거쳐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와 캘리포니아를 옮겨 다니며 등장했던 정체불명의 ‘금속기둥’에도 열광했다. 한 달 동안 한국 언론은 수백 건의 기사를 쏟아내며 미쳐갔다. 취재도 안 된, 사실 취재할 곳도 없는데도 이런저런 살을 붙여 이야기를 지어냈다.

‘외계인 소행’은 애교다. 반세기 전인 1968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연상케 한다는 둥 숱한 화제를 지어냈다.

기껏해야 티저 광고이거나 이상한 정치집단의 홍보물에 불과할 게 뻔한데, 언론은 코로나19에 집중할 취재력의 상당부분을 여기에 할애했다. 이처럼 언론이 ‘신화 만들기’에 집중하는 사이 557조 원에 달하는 내년도 예산안은 얼렁뚱땅 처리됐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예결위원장과 예결위 여야 간사 단 3명이 밀실에서 예산 8조 원을 주물렀다. 실세 의원들 지역구 예산 챙기기는 여야를 가리지 않았다. 지역 실세의원들은 이 난리통에도 세금 낭비에 불과한 지역축제예산을 늘렸다.

  조선일보 12월 9일 10면.

  매일경제 12월 9일 33면.

코로나 위기로 학원가가 문을 닫자 한 피아노 학원 원장이 지난 8일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정부의 강제 휴원을 규탄하는 피아노 연주 퍼포먼스를 벌였다. 조선일보는 9일자 10면에 ‘트럭 타고 피아노 연주 퍼포먼스’라는 제목으로 사진 기사를 큼직하게 실었다. 1톤 트럭 뒤에 실어온 피아노를 연주하는 원장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반면에 매일경제는 같은 12월 9일자 신문 33면에 ‘학원가 문닫자… 과외 틈새 특수’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입시철인데도 학원이 문을 닫자 서울 강남의 부자동네 학부모들은 대입과 고교 기말시험을 앞두고 급하게 수학과 면접 과외선생을 찾아나서 과외시장이 반짝 활황이라고 썼다. 조선일보와 매일경제 둘 다 자극적이기만 할 뿐 코로나가 민간 교육시장에 미친 총체적인 상황을 대변하진 못했다. 우리 언론은 종합적인 시선보다는 자극적 한탕주의에 너무 오래 길들여졌다.

자영업자의 최대 고통은 월세다. 학원 등 수많은 자영업자가 피 말리는 고통을 겪는데 달세 한 푼 안 내리고 버티는 건물주를 향한 기사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모든 게 멈춘 도시에서 임대료는 왜 안 멈추는지 묻지도 않는다.

화장품회사 아모레퍼시픽이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실시한다는 소식이 중앙일보 11월 14일 13면에 1단 기사로 실렸다. 1년 내내 마스크를 쓰니 화장할 일이 별로 없어 업계가 불황을 겪는다는 보도는 이미 여러 번 나왔다. 결국 아모레퍼시픽은 만 15년 이상 근무한 직원에게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중앙일보 11월14일 13면.

단 세 문장짜리 이 기사에서 중앙일보는 언론이 노동에 얼마나 무지한지 여실히 드러냈다. 기사 세 번째 문장은 “퇴직자에게는 위로금과 법정 퇴직금, 희망퇴직 지원금, 실업급여를 지급할 예정이다”라고 돼 있다. ‘실업급여’는 회사가 주는 게 아니다. 실업급여는 노동자와 회사가 낸 돈으로 만든 고용보험기금에서 지급한다. 회사가 임의로 준다 만다 하는 게 아니다. 비자발적 실업이니 당연히 실업급여는 나온다. 이걸 마치 회사가 선심 쓰듯 준다고 보도하면 될 일인가. 아무리 회사가 보도자료에 엉뚱한 팩트를 넣어놔도 언론이라면 바로잡아야 한다.

아모레퍼시픽 희망퇴직 기사가 나오기 하루 전날(11월 13일) 여러 언론이 아모레퍼시픽 홍보기사를 요란하게 보도했다.

11월 13일 여러 신문에 등장한 홍보기사만 훑어보자. 동아일보는 B3면에 ‘아모레퍼시픽, 51세 대표 전격 발탁’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과 중국시장 부진 등으로 직면한 어려움을 젊은 최고경영자 발탁 등을 통해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계일보도 15면에 ‘실적 부진 아모레퍼시픽, 신진 인사 전격 발탁’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전임자보다 14살 젊은 대표 선임을 두고 실적 부진을 겪고 있는 그룹의 위기 타개를 위한 발탁인사”라고 칭찬했다. 중앙일보도 B3면에 ‘아모레퍼시픽 코로나 승부수 51세 CEO로 교체’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51살이 젊다는 표현부터가 우습다. 그래도 어쩌겠나 보도자료에 그렇게 써놨으니 받아써야지.

한국일보는 B2면에 ‘성장기 어린이들을 위한 건식 3총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모레퍼시픽이 큐브미 키즈 3종을 출시했다며 신제품 홍보에 열을 올렸다.

언론은 이처럼 희망퇴직이란 악재마저 51살 젊은 CEO 전격 발탁이라는 호재와 뒤섞어 버렸다.

  시계방향으로 11월 13일 동아 B3, 세계 15, 중앙 B3, 한국일보 B2면.
  • 참세상 독자

    작금의 세계는 계급의 퇴보상태, 답보상태, 진보상태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문경락

    반면에 매일경제는 같은 12월 9일자 신문 33면에 ‘학원가 문닫자… 과외 틈새 특수’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입시철인데도 학원이 문을 닫자 서울 강남의 부자동네 학부모들은 대입과 고교 기말시험을 앞두고 급하게 수학과 면접 과외선생을 찾아나서 과외시장이 반짝 활황이라고 썼다. 조선일보와 매일경제 둘 다 자극적이기만 할 뿐 코로나가 민간 교육시장에 미친 총체적인 상황을 대변하진 못했다. 우리 언론은 종합적인 시선보다는 자극적 한탕주의에 너무 오래 길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