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여성의 발명’과 ‘자연의 타자화’를 통한 자본의 축적

‘성종계급체계’와 비생산/비가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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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고 차별화하는 가부장제를 비판해 왔다. 그리고 자연과 여성을 타자화하는 것을 비판해 왔다. 이에 힘입어 필자는 《가부장체제론과 적녹보라패러다임》이라는 책에서 근대 가부장체제의 성격을 세 가지로 정의했다. 그 세 가지 중 하나가 ‘성종계급체계’다. 근대 가부장체제의 정치경제적 성격으로서 자본주의는 성의 분할을 통한 남성-이성애중심 체계인 ‘성체계’와 인간종과 자연(혹은 비인간종)의 분할을 통한 인간중심주의 체계인 ‘종체계’를 토대로 지배를 행사한다. 가부장체제적 자본주의는 ‘여성’과 ‘자연’을 ‘발명’함으로써 가능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발명’이란 말을 사용해 본다.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은 서유럽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발명’한 것이라 주장해 왔다. 그리고 ‘타자의 은폐’를 통해 제국주의적 식민지배가 가능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발명과 타자의 은폐를 통한 식민지배의 형식은 실상 오래전 ‘여성’을 발명하고, ‘여성’을 은폐해온 가부장체제의 한 단면을 설명할 언어를 제공한다. ‘여성’을 발명한다는 말은 그것의 대당 개념인 ‘남성’을 발명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부장제가 ‘발명’한 ‘여성’은 다양하게 작용해 왔지만, 자본주의 또한 이 발명을 활용해 왔다. 그리고 더불어 ‘자연’의 발명과 자연의 은폐가 작동해 왔다. ‘여성의 발명’은 ‘자연의 발명’과 같은 선상에 있다. 근대 가부장체제는 여성과 자연의 발명을 토대로 이 둘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면서 지배해 왔다. 대륙의 발명이 인종을 만들고, 인종주의를 태동시켰듯이, 여성의 발명은 젠더를 만들고 남성중심주의를 인간세계에 정착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체계’는 ‘자연’을 타자화하면서 인간 남성을 보편으로 만들고 여성과 자연과 다른 종들을 타자로 놓는 ‘종체계’와 연동된다.

근대 가부장체제의 두드러진 측면으로서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발명’하고 ‘계급체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성격을 드러냈다. 그리고 노동자의 발명이 여성과 자연의 발명과 연결되면서 자본주의의 ‘성종계급체계’를 형성했다. 지금까지 ‘계급체계’에 대해서는 논의돼 왔지만, 자본주의와 ‘성체계’, 자본주의와 ‘종체계’에 대한 논의는 미약했다. ‘성체계’와 ‘종체계’는 ‘계급체계’와의 관계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근대 체제가 노동자를 만드는 과정은 ‘시초축적’론을 통해 설명됐다. 그런데 이 시초축적 과정은 ‘여성’을 생산과 노동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물’과 ‘자연’을 노동의 대상으로 놓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렇게 생산과 노동의 영역에서 배제하거나, 노동의 대상으로 놓으면서 근대 가부장체제적 자본주의는 여성과 자연의 생산과 노동을 은폐해버렸다. 이 은폐는 지금도 계속된다. 여성이 임금노동의 영역, 사회적 노동으로 계속 진입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은폐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은폐를 도와준다.

근대 가부장체제적 경제는 이처럼 여성과 자연을 밀어낸 ‘계급체계’에 근거해 자본 축적을 계속해 왔다. 다시 말해 ‘성체계’와 ‘종체계’에 토대를 두고 ‘성모순’과 ‘종모순’을 은폐하면서 그 성격을 유지해 왔다. ‘종(species)’의 분할을 따라 인식체계를 생산해온 근대 ‘인간중심주의’적 인본주의(humanism)에 대한 질문은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의 출현으로 가능했다. 페미니즘은 ‘보편적’, ‘인간적’이라는 개념에 엄청난 비판을 해 왔다. 누가 인간에 포함되고, 누구의 보편이냐고 묻는 페미니즘은 사회적 소수자와 주변화된 타자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을 가능하게 했다. 역설적으로 근대 서구의 인본주의는 권리와 인권의 개념들을 만들었고, 지금도 우리는 이 평등과 자유의 개념을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의 결합으로 ‘인간중심주의’를 문제 삼을 수 있게 되고, 여성을 포함한 인간이 종의 위계를 당연시하며 살아온 역사를 문제 삼을 수 있었다. 즉 종차별을 넘어서 ‘종모순’의 지점까지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아직은 필자가 제시한 ‘종체계’, ‘종모순’과 ‘성종계급체계’ 등의 개념은 지식생산의 장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이 시대의 문제설정은 ‘성종계급적 모순’을 포함해야 한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비판은 노동력의 착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여성과 자연의 생산력을 착취하고 전유하지 않고서는 자본의 축적이 불가능했다고 본다. 이 착취와 전유는 여성과 자연의 생산을 ‘비생산-비노동-비가치’로 놓음으로써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범주는 확장돼야 한다. 자본주의 비판 과정의 전개에서 여성과 자연이 담당해 온 것에 우리는 여전히 침묵한다. 이제 가사생산-가사노동에 대한 임금화와 가치화가 1970년대에 이어 다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여성의 임신출산, 인간생산이라는 여성의 생산력은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는다. 현재 페미니즘 운동은 임신과 관련한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권리’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것의 시작은 제도와 권리 차원을 넘어 임신과 출산을 생산과 노동으로 보는 2018년 ‘세계여/성노동자대회’였다. 이 대회는 여성의 ‘비생산비노동-비가치’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현재 동물복지와 동물권 논의가 시작됐지만, 이후 동물 착취와 전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 역시 필요하다.

최근 20대 여성이 온라인 중고시장인 ‘당근마켓’에 태어난 지 3일 된 자신의 아이를 20만 원에 내놓으며 “아이 입양합니다. 태어난 지 36주 되어있어요(되었어요)”라고 올렸다. 이를 다룬 기사는 이 행위가 “전 국민의 공분과 걱정을 샀다”고 적었다. 그리고 “무직인 상태에서 출산”을 했으며 아이 아빠와 함께 양육할 상황도 아니라고 적었다. 이 사건을 놓고 생각해 본다. 아동복지와 관련해서는 생각할 여지가 많다. 그런데 그 이전에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이 생산이며 노동이고, 그에 대한 사회적 ‘가치화’가 진행됐다면 이와는 다른 상황이 됐을 수도 있다. 왜 임신·출산은 윤리의 문제가 돼, 사회적으로 ‘20만 원’이라는 화폐가치에 대한 공분과 걱정이 진행되는 것일까? 10개월의 임신 과정과 출산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윤리와 도덕 외에 무엇을 지원하고 있는가? 양육에 대한 지원은 별도로 하고, 임신과 출산에 대한 지원과 가치화가 진행됐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최근 “지금까지 총파업은 없었다…여자들이 부엌에 있었으므로”라는 달라 코스타의 책을 소개하는 기사가 있었다. 지금까지 총파업은 없었다. 하지만 ‘부엌’에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1970년대 서구 여성운동의 주요 쟁점은 가사노동이었지만 아직도 그 노동의 성격과 가치화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았다. 그런데 가사노동만이 아니라 여성의 생산력으로 정의할 수 있는 임신과 출산은 여전히 윤리와 도덕적 가치의 영역에 묶여 있다. 그리고 현재 ‘성산업’이라 불리는 성매매, 매춘을 둘러싼 논의는 불법/합법/비범죄화에 멈추어 있고, 매춘노동자들의 생산과 노동은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 머물러 있어, 이 영역의 착취와 전유와 폭력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섹스산업’의 자본화에 대해서도, ‘섹스산업’의 노동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가사생산, 임신출산, 섹스산업 그리고 더 나아가 동물산업이 자본과 생산-노동과 연결된 지점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총파업’을, 그리고 그 너머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