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검은 시위’ 발명한 폴란드 여성 사회주의자들

[지금, 여성사회주의자] 낙태권 위한 경제 타격, 검은 월요일 ‘여성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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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라디오 뉴스를 듣자마자, 바로 차를 세우고 담뱃불을 붙인 뒤 온라인에서 뉴스를 다시 확인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 다음에는 눈물이 쏟아졌다. 신장이 발달하지 않고 심장에 문제가 있는 아기를 임신한 친구 생각만 났다. 한 번도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자들이 자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 에바 크비아트코브스카, <레포팅 데모크라시>

[출처: www.fes-connect.org]

폴란드 헌법재판소가 22일(현지시각) 태아 기형의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법에 위헌 판결을 내려 세계를 경악시켰다. 폴란드 여성들은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것은 전쟁”, “내 자궁에서 1.5m”, “나는 인큐베이터가 아니라 여성”, “죽어도 출산하지 않을 것”이라는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집권당인 법과정의당(PiS) 정치인 집 앞은 돌을 던지며 반발하는 시위대와 이들을 최루가스로 진압하려는 경찰이 대치하며 아수라장이 됐다. 폴란드에선 23일 하루에만 1만3600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고, 방역을 이유로 10명 이상의 집회가 금지됐지만, 수도 바르샤바에서만 1만5천 명이 나와 헌법재판소를 규탄했다. 전국적으로도 60개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여성들은 연이어 각 지역 성당을 점거하고 주요 도로를 봉쇄했으며 27일에는 다시 ‘여성파업’을 일으켰다.

폴란드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은 낙태를 전면 금지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폴란드에선 태아에 기형이 있는 경우나 강간, 근친상간, 또는 임신 여성의 건강이 위험하다는 진단이 있을 경우에만 낙태가 허용됐다. 합법적 낙태 수술은 연간 2천 건에 달하는데 이 중 태아 기형의 경우가 98%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더 많은 여성들은 옷걸이를 이용해 스스로 낙태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폴란드의 연간 실제 낙태 건 수는 20만 건으로 추산된다.

4년 전 폴란드 여성들이 옷걸이를 들고 나와 정부의 낙태 전면 금지법안에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폴란드 여성들은 2016년 9월 대중적인 ‘검은 시위’에 이어 10월 3일에는 12만 명이 참가한 ‘검은 월요일’ 여성파업을 일으켜 집권 여당의 낙태 금지 법안을 무산시킨 바 있다. 이 같은 폴란드 여성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잇따라 전 세계 여성들의 시위도 불붙기 시작했다. 2017년 1월 미국에선 트럼프 취임에 반대하는 여성 행진이 열려 50만 명이 참여했고, 2017년 3월 8일 여성의 날에는 세계 50개국 이상에서 여성파업이 열렸다. 이듬해에는 70개국 이상의 여성들이 여성파업에 동참했다. 아일랜드에서는 2017년 여성의 날 일어난 대대적인 여성파업의 여파로 낙태 합법화를 쟁취했다.

하지만 폴란드 집권층은 더 보수적인 조치를 취하며 여성들의 행동을 억눌렀다. 이번 헌법재판소 판결도 폴란드 집권층이 강행한 백래시의 결과였다. 특히 집권당은 코로나19로 사회 통제가 심해진 틈을 타 위헌소송을 제기했고, 대부분 그들이 지명한 판사로 구성된 헌법재판소는 예상대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후 집권당은 해당 판결을 근거로 법개정에 착수한 상태다.

그러나 폴란드 여성들이 말하는 이 ‘전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가늠할 수 없다. 폴란드 여성들은 헌법재판소 판결 전후로 매일 거리로 나와 낙태권 후퇴에 저항하고 있다. 그리고 시위대 중에는 2016년 검은 시위와 ‘검은 월요일’ 여성파업을 주도한 폴란드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바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폴란드 좌파 정당 라젬(Razem, ‘모두 함께’)의 여성 정치인들이다.


폴란드 검은 시위와 여성파업 - 경제적 타격

낙태 전면 금지법안이 제출되기 전, 폴란드 사회에선 유럽 경제위기의 여파로 실업과 이민 인구가 급증하는 등 사회적 혼란이 심화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2016년 4월 낙태를 반대하는 극우 단체가 여성의 건강에 직접적인 위협이 있는 경우를 제외한 모든 낙태를 금지하는 입법 청원안을 의회에 제출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유산하는 여성은 살인혐의로 조사받을 수 있으며, 임신중절 혐의가 인정될 때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었다. 이에 라젬당의 바바라 노바스카가 이끄는 여성구조위원회는 임신 12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성교육과 피임 지원을 제공하는 법안을 발의하며 맞섰다.

하지만 우파 포퓰리스트 법과정의당이 장악한 폴란드 의회는 여성구조위의 안은 폐기한 반면, 낙태금지 법안에 대해선 의사일정을 차곡차곡 밟아갔다. 이에 반발한 라젬 소속 정치인 마우고르자타 아담지크는 소셜미디어에 #검은 시위(#czarnnyprotest) 해시태그 운동을 제안했고, 이를 계기로 여성과 남성들이 소셜미디어에 검은 옷을 입은 셀카를 공유하며 낙태 금지 강화에 반대하는 ‘검은 시위’가 시작됐다. 이 행동은 많은 유명 인사들이 참여할 만큼 대중적인 호응을 받았고 전 세계적으로도 확산됐다. 급기야 폴란드 여성 배우 크리스티나 잔다가 아이슬란드 여성파업(1)을 모델로 전국적인 ‘검은 월요일’ 시위를 소셜미디어에 제안하면서 여성파업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투적인 폴란드 LGBT 활동가로 유명한 마르타 렘파르트가 이 여성파업을 조직하며 대중적인 집회로 발전했다.

10월 3일 폴란드에선 전국 150개 이상 도시의 약 20만 명이 집회와 행진, 거리 봉쇄 등의 항의 시위를 했다. 시위에는 페미니스트나 노조 활동가뿐 아니라 지금까지 시위에 나와 본 적 없는 여성 고교생과 대학생, 여성노동자와 연예인들도 동참했다. 여성들은 검은 옷을 입고 마을 거리에 모여 가사도, 육아도, 출근도 하지 않고 하루 온종일 파업에 동참했다. 이들은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인 낙태 기구인 옷걸이를 들고 거리로 나왔고, 또 비 때문에 시위대 대부분이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후 국제적으로 채택된 여성 인권 투쟁의 상징이 됐다. 시위의 약 90%는 5만 명 미만의 도시에서 일어났으며, 시위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 지역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를 조직했다. 결국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까지 연대 시위까지 확산하면서 집권당은 두 손을 들었다.

이러한 ‘검은 시위’와 ‘여성파업’은 집권당의 법안을 무산시켰을 뿐 아니라 낙태 문제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크게 바꿔놓았다. 폴란드 여성들은 그동안 침묵해왔던 낙태 경험을 처음으로 꺼내놓기 시작했으며, 서로 비슷한 고통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여성의 몸은 국가가 아닌 여성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고, 낙태는 개인만이 아닌 사회적인 문제라는 공감대가 늘었다. 낙태 담론이 급진화 된 전환점이었다.

더구나 ‘여성파업’의 위력은 누구도 예상치 못할 만큼 강력했다.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노동을 거부하며 경제적 타격을 입혔다. 페이스북에 ‘여성파업’이 제안된 지 하루 만에 6만 명이 참여를 클릭할 만큼 대중적 공감이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지 사회주의자들은 “여성파업은 정부에 놀라운 압력을 가했는데, 정부는 이 파업이 노동계급 전체에 또 다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평했다.

자본주의로의 편입과 ‘낙태 타협’

폴란드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억압적인 형태로 낙태를 금지하는 국가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반세기 전만해도 이곳은 세계 최초의 여성 장관을 배출할 만큼 성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보장한 지역이었다. 1956년 초피아 바실코브스카는 폴란드의 첫 여성 법무장관으로 임명됐고, 같은 해 낙태 합법화도 실시됐다. 이는 미국과 프랑스보다 20년이나 앞선 조치였다. 폴란드 공산주의 정부가 가정과 직장에서 여성의 해방을 선전하며 정당성을 다지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학교에는 성교육이 도입됐고, 피임약에는 정부 보조금이 지급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성 중심의 관료주의나 열악한 보육, 의료 환경 때문에 공산주의에서도 성평등은 요원한 문제였지만, 이 기간 폴란드 여성들은 낙태와 노동시장, 육아 부문에서 비교적 많은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1993년 폴란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낙태권은 크게 후퇴했다. 이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이용해 정치권력을 장악한 집권 세력이 교회와 ‘낙태 타협’을 맺었기 때문이다. 다른 포스트 사회주의권 국가가 낙태권을 특별히 제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폴란드의 사례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이로써 가톨릭교회는 폴란드 사회에서 강력한 위치를 차지했고, 정치적 방향을 결정하는 세력이 됐다. 단적으로 1993년 ‘태어나지 않은 생명 보호법’이 통과된 것도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한 예다. 이는 공산주의 시절 사회적 토론이 억눌리고 여성의 정치적 지위가 미약했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여성들의 정치 및 노동시장에서의 위치는 그 전보다 계속 악화되기만 했다.

현재 폴란드 공교육에서는 성교육이 실시되지 않으며, 피임약도 의사 처방전 없이는 복용할 수 없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은 의사 대신 교회를 찾으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또 정부는 여성들에게 더 많은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만, 일단 아이를 낳으면 육아의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된다. 저임금과 실업, 그리고 빈곤이 만연하고 유치원이나 병원, 주택 등 보육을 위한 기반도 열악해 노동자계층 여성의 어려움은 더욱 크다.

낙태권과 체제의 문제

[출처: 마르타 렘파르트]

[출처: 아그니스츠카 제미아노비츠바크]

라젬당 정치인들이 검은 시위를 고안하고 여성파업을 조직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낙태권을 여성 노동자계급의 주요 문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권당이 낙태권을 훼손하는 법안을 발의했을 때 바로 반대 법안을 제출할 수 있었다. 또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집단 등 다양한 풀뿌리 조직이 참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여성파업을 조직한 마르타 렘파르트(Marta Lempart, 42세)다. 렘파르트는 극우 활동에 공개적으로 맞서온 폴란드의 대표적인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다. 그는 특히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아동 성착취에 대한 항의를 조직하고, 장애인 인권을 위해 전투적으로 활동하는 등 폴란드 운동사회에서 신망이 깊었다. 폴란드 주류는 그를 ‘전문 시위꾼’이라고 부르지만, 그의 활동과 함께 폴란드 LGBT와 인권 운동은 발전해왔다. 그는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브로츠와프 지역 라젬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검은 시위로 유명해진 아그니스츠카 제미아노비츠바크(Agnieszka Dziemianowicz-Bak, 36세)도 시위 조직과 대중적 연설로 주목을 받는 인물이다. 그가 2016년 여성파업 현장에서 “우리는 병원을 고문실로 만들고 의사를 교도관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은 각국 언론에 타전되기도 했다. 2016년 <포린폴리시지>는 낙태 전면 금지 반대 시위를 조직한 그를 영향력 있는 100대 사상가 명단에 올렸다. 2018년에는 <포브스지>가 마르셀리 등을 유럽 인사 30명의 명단에 포함시킬 만큼 이들의 활동은 세계적으로도 알려졌다.

이 같은 활동에 힘입어 라젬당은 2015년 처음 참여한 총선에서 3.6%를 득표한 뒤, 2019년에 12.6%를 얻어 6석을 차지했다. 폴란드에선 90년대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뒤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정치세력이 집권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권세력이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면서 사회 불평등과 민족주의가 강화됐고, 이후 수십 년 간 우파에게 정권을 내줬다. 그러나 라젬당의 등장으로 폴란드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던 여성의 투쟁이 조직되고, 정치적 지평이 커지면서 다시 사회주의가 주목을 받고 있다.

라젬당을 포함한 폴란드 사회주의 조직들은 낙태가 체제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고 본다. 현 체제가 자본주의 유지를 위해 여성의 피임과 낙태를 통제하고, 육아나 보건 같은 재생산 기반을 상품화하면서 여성이 생식과 재생산 영역 모두에서 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과 재생산 기반을 사회화하는 사회주의로의 체제 전환이 여성권 실현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0월 27일 오후 4시(현지 시각)를 기점으로 이제 폴란드 여성들은 도로, 공공시설, 공원 분수대에 붉은 색 페인트 쏟아 붓고 공공시설과 교회를 점거하고 자동차, 버스, 공항 통행을 방해하며 그들이 말한 ‘전쟁’의 최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4년 전 검은 시위가 전 세계 여성들을 고무시켰다면, 이번 그들의 ‘전쟁’은 전 세계에 어떻게 울려 퍼질지 세계 여성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각주]
(1) 1975년 아이슬란드에선 동일임금을 요구하며 여성의 90%가 여성파업에 동참해 출근도 가사노동도 하지 않았다. 이 휴업의 영향으로 아이슬란드 의회는 이듬해 양성평등임금보장법을 통과시켰다.

[참고자료]
https://www.bpb.de/237456/analyse-schwarzer-protest-in-richtung-eines-neuenkompromisses-
beim-abtreibungsrecht
http://www.gruen-ist-lila.de/2017/10/04/october-3rd-2016-a-day-when-polandstood-
still-or-a-history-of-the-black-protest/
https://www.socialistalternative.org/2018/03/09/interview-polish-socialist-feminist/
https://pl.wikipedia.org/wiki/Lewica_Razem_(partia)